조선의 바다, '뱃놈' 어민들이 지켰다

조종안 | 기사입력 2017/07/29 [05:55]

조선의 바다, '뱃놈' 어민들이 지켰다

조종안 | 입력 : 2017/07/29 [05:55]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3층 전시장 입구     © 조종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과 나라 전체가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된 일본, 이 두 나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운명적인 접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일찍부터 바다를 향한 거침없는 욕망을 드러낸 일본으로 인해, 바다를 생업의 현장으로 삼았던 우리 어민들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바다의 수탈은 육지보다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수탈의 바다-그날의 기억 전·展'(5월 29일~8월 25일) 설명문 중 첫 대목이다. 설명문에 나타나듯 우리나라는 육지보다 바다가 먼저 침탈당했다.


일제는 수산자원이 풍부한 조선 어장을 일찍부터 탐내고 있었다. 울릉도에서는 17세기 말부터 일본 어민들이 불법 어업을 자행했다. 이에 울릉도의 평범한 어민이었던 안용복(安龍福)이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우리 어업권과 영토를 지켜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부터 일본 어민들이 조선의 어장을 침투하기 시작한다.


'통상장정' 체결은 '일제 약탈'의 다른 표현에 불과


강화도조약(1876) 이후 청국과 일본어선 수백 척이 수시로 서해상에 출몰하여 어족자원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무기력한 조선 정부는 강력한 단속을 펼치지 못하였다. 외교에 무지했던 조선은 고종 19년(1882) 조청상민수산무역장정, 이듬해(1883) 조일통상장정, 1889년 조일통어장정을 차례로 맺는다. 이는 조선의 어업권을 일본에 공식 넘겨주는 조약으로 침탈의 외교적 거점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됐다.


조일통상장정(1883)은 강화도조약 직후 맺어진 '조일무역규칙'을 약간 수정한 것으로 일본이 전라, 경상, 강원, 함경도 어장을 합법적으로 이용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것은 종래에 자행되던 어장 침탈을 강압에 의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상인들에게 최혜국 대우를 해야 하는 등 불평등 조항이 많았다.


일본은 조선 어장을 수산물 수탈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은 본토에서 조선 해상으로 왕래하는 어업을 통어(通漁)라 하였다. 또한 '통상장정'에서 통상(通商)은 말이 좋아 수입·수출이고 거래이지 일제 약탈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다.


조일통어장정(1889) 체결로 조선 해역에서 어로 활동을 합법화한 일본은 군산과 고군산군도 섬(島)에 이주촌을 건설하고 침략의 전초전으로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생계를 위협받은 조선 어민과 격렬한 충돌이 잦았다. 조선 아낙을 희롱하고 강간하는 등 일본 어민들의 망동으로 투석전이 벌어지거나 살인으로까지 비화하는 예도 있었다.


조선의 바다, 경술국치 이전 일제의 손아귀로 넘어가
 

▲ 조선 어민들의 생계수단이었던 2~3톤급 목선     © 군산 수협


고군산군도 어장은 금강, 만경강, 동진강 등이 유입되고 넓은 갯벌이 발달하여 수산 생물이 서식하기 좋은 천혜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 '호남 고군산은 어세(漁稅)가 가장 높고, 어전(漁箭)이 많이 모인다'고 기록될 정도로 사계절 어장이 형성됐다. '고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는 은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군산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경포(중동·경장동·경암동 지역)는 일본 거류민 사무소와 도선장(나루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청도는 1885년경 일본인 잠수부들이 기항하였다. 1889년에는 일본인 카미 메이타로오(加味榮太郞)가 20호의 이주촌을 조성하고, 개량된 어구·어법으로 어장을 누비며 어족자원을 약탈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전국이 된다. 그 후 일본 어민의 조선 침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에 반해 조선 어민의 어업활동은 더욱 위축됐다. 1899년 5월 군산이 개항하고, 이듬해(1900) 경기도에 이어 충청도 등 한반도 연안의 전 어장이 개방된다. 이는 조선의 바다는 경술국치(1910) 이전 이미 일제의 손아귀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자국 어민의 한반도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에는 어업법 제정을 강요한다. 관리들의 무능으로 황실 소유의 어장은 일본 어민들의 소유가 된다. 황실 소유 어장이 수산국으로 이관되어 일본 어민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던 것. 어업권 제도 시행 역시 일본영사관을 통해 이뤄졌다.


조선 병사들과 어민들, 의병으로 나서
 

▲ 군산부영 수산시장(1930년대)     © 군산부사


일제가 3년(1909~1911)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진 <한국수산지>는 군산 근해에 조기, 준치, 청어, 도미, 민어, 갈치, 삼치, 농어 등의 어장이 형성됐다고 기록한다. 군산 개항 이전부터 일본 어민들이 불법 어획을 자행했던 것. 한국인의 식탁을 책임지는 수산업은 육지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렇게 침탈당하고 있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조선 어민들은 결사 항쟁으로 맞섰다. 당시 군산 관할 녹도에서는 조선 병사들이 의병이 되어 나타났다. 1907년 8월 일제가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병사들이 집단으로 병영을 빠져나와 녹도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펼쳤다. 의병들이 녹도를 근거지로 삼은 이유는 조기, 멸치, 까나리 등이 많이 잡히는 어장으로 어민들 요청에 따라 경비를 위해 자주 왔던 친근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의병들은 녹도 앞을 지나는 세미선(稅米船)을 공격한 게 빌미가 되어 군산 주둔 일본군 12사단 14연대 소속 수색대 7명의 추격을 받는다. 그러나 녹도 포구에서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주민과 함께 마을 뒤 야산에 묻어버렸다. 이후 일본군의 보복 공격으로 마을은 폐허가 됐다. 주민들은 의병들이 '곧 일본군 보복이 있을 것이니 피하라'고 해서 무사했다고 한다.


1994년 11월 19일 치 <한겨레> 신문은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진 섬 주민들은 녹도로 돌아와 폐허가 된 마을에 임시로 움막집, 토담집 등을 짓고 살았는데, 그 당시 지은 토담집 한 채가 지금도 남아 있어 당시의 참상을 대신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신문은 1908년 당시 참상을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들었다는 주민 김시영(어민) 씨도 소개한다.


녹도 어민들은 의병들이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게 총격을 가한 지점도 알고 있으며, 일본군이 묻힌 곳을 초상이 난 곳이라고 해서 지금도 '초상골'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신문기사에서도 느껴지듯 조선 어민과 의병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그날까지 치열하게 항거하였다.


조선 어민들이 기댈 곳은 자그만 돛단배뿐, 그럼에도 해상에서의 저항은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일제의 동력선 진출로 피해가 막심했던 서해안 도서(島嶼) 지역에서 자주 일어났다. 그들은 해상강도단으로 몰아붙이는 일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투쟁했다. 이처럼 수산자원의 보고인 바다를 지켜온 사람은 '뱃놈' 소리 들으면서 처절하게 살았던 우리 어민들이었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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