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뉴스] 김양수 칼럼니스트 = 새해를 맞이한다. 2017년 5월. ‘촛불혁명’의 대의를 받들었다는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순간, 1987년 6월 혁명의 끝이 노태우 정부의 탄생이라는 학습효과가 뇌리에 사무쳤던 나는 일치감치 ‘달라질 세상’에 대한 역치를 한없이 낮추어 놓았었다.
하지만 정부의 대책은 20세기 초 청교도 이상에 사로잡혔던 미국과 같은 수준이다. 비트코인만 때려잡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사고방식. 20세기 초 미국도 그랬다. 금주법만 시행하면 술로 고주망태 되는 알코홀 중독자는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래서 미국은 술 없는 천사들의 나라가 되었나? 천만에, 금주법은 의도와 정반대로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의 몸집을 키웠고, 금주법 폐지로 밀주로 수익을 얻을 수 없게 된 거대 범죄조직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마약 산업에 진출하면서 오늘날 미국을 마약에 찌든 나라로 만들게 되었다는 역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상식에 속한다.
비트코인을 규제하면 그곳에 몰렸던 투기 광풍은 즉시 사그러지리라. 하지만 그것으로 근로소득 보다 투기소득에 올인하고 집착하는 대한민국 병리현상이 과연 치유될까? 천만에. 홍종학 부의 세습은 착한 증여이고 이재용의 삼성 상속은 경제적폐라는 이중 잣대가 뻔뻔하게 존재하는 한, 비트코인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의 투기광풍은 절대로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외교와 안보는? 적폐의 상징이라는 박근혜 조차 중국에 가서 천안문 꼭대기에 오르는 대접은 받았었다. 하지만 문재인의 방중은 외교 의전 상 숱한 파문과 의혹이 그치지 않다가 급기야 대통령을 수행 취재하던 기자들이 얻어맞는 수모를 당하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반성은커녕 성공한 방중외교를 읊조린다. 사드 배치 후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문재인의 공약은 어느 새 ‘사드 봉인’이라는 우리만의 말잔치로 변질되고 말았다. 문재인은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북핵 위기 해결의 운전사를 자처하지만 북한은 한국 정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들의 핵 프로그램을 착실하게 진행하며 안보위험을 에스컬레이트 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의 졸렬함과 위법성을 폭로한다고 한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강대강 충돌국면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시점에서 개성공단 재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결국 문재인 정권의 폭로는 안 그래도 한국정부를 미국의 푸들정도로 인식하는 북한정권에게 더더욱 한국정부는 상종 못할 집단이라는 당위성만 키워줄 뿐이다.
이 정권에게 과연 평화를 구현할 철학과 의지가 있는지, 아니면 최악의 시나리오인 전쟁에 대비한 위기관리와 돌파를 가능케 할 역량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현재 이 정권의 외교안보 정책이나 행보를 지켜보면 전혀 일 수 없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다. 7개월 간 더욱 심화된 북핵 위기 국면에서 사실상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문재인 정부의 자화상을 감상해 보면 답은 너무도 쉽게 나온다. 안보 위기를 정권 안위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박근혜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이나 도진개진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고 이후 상황을 냉정하게 복기한 결과, 출항 후 10분 거리에서 전복한 선박에 갇힌 인명을 구조하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자랑은 순식간에 꼬리를 감추고 여론의 흐름은 해경에 대한 질타로 이어졌다. 그런데 해경 폐지를 박근혜의 적폐로 규정하고 조직을 부활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렇다면 적폐청산의 결과물로 부활한 해경의 사고 대응 수준이 한마디로 세월호 참사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봐야 하는가
국민들이 재난에 직면했을 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청와대의 재빠르고 허울 좋은 명령이 절대로 아니다. 명령 따위 없어도 국민을 모든 위험과 위기에서 지켜주고 구해주는 공권력의 존재가 절실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창 1호 사고 때 국민은 시의적절한 공권력의 구호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박근혜와 일곱 시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빨리 등장하여 멋들어진 명령을 내린 문재인은 해경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자신만은 깔끔하게 면죄부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는 부인이 외도로 낳은 것이 분명한 자식을 마주한 아버지가 자신과 어디도 닮지 않은 아들을 보며 단 하나라도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느라 애간장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던 아버지는 급기야 아기의 발가락이 자신과 닮았다며 자기 자식이 맞다고 자기 암시와 위안을 삼게 된다.
집권 7개월이 지나 해를 넘겼음에도 박근혜 단죄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박근혜 정권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수준과 역량을 드러내고 있는 문재인 정권을 바라보면 나는 이 소설이 오버랩되면서 분노를 넘어 측은한 심정마저 든다.
그래도 문재인 정권과 광적인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박근혜 정권과 정말로 다르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얼마만큼 다른 것이냐고. 모든 것이 박근혜 정권과 본질에서 거의 다르지 않은 문재인 정권. 그래서 혹시 그들은 발가락에서 닮은 구석을 찾고 위안을 얻었던 김동인 소설의 주인공처럼 박근혜와 다른 하나를 발견했다며 정말로 이렇게 외치지는 않을까? ‘우린 박근혜와 달라요! 적어도 발가락은 다르다니까요!’ 2018년 새해 벽두. 이른바 ‘이니교도’로 표현되는 문재인의 광적인 지지자들이 제일 먼저 깨우쳐야할 진실은 그들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것은 바로 박근혜를 몰락시킨 주범들이 다름 아닌 ‘박근혜 정권은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될 정권’이라는 맹신에 사로잡힌 광적인 지지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맹신이 그들이 처음부터 발본색원해야 했던 최순실의 존재를 모르쇠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박근혜가 국민을 우습게 아는 오만에 사로잡힌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여 마침내 박근혜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 문재인 정권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유지되는 높은 지지율은 일부 광팬들만의 정서인 문재인에 대한 팬덤 보다 다시 재림할지 모르는 박근혜 세력에 대한 비토에 기인한다고 봐야한다. 아직까지는 문재인의 무능에 대한 염증보다 박근혜에 대한 혐오가 더욱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문재인과 그 팬덤들이 자신들은 박근혜와 그저 발가락이 다르다는 사실 하나에 만족하며 지금의 오만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패권정치의 무능을 반복한다면 문재인의 마지막 또한 결국 박근혜와 발가락이 다른 정도로 비참하게 끝나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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