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29] 우리 주 예수의 탄생

강명준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4/15 [14:26]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29] 우리 주 예수의 탄생

강명준 변호사 | 입력 : 2018/04/15 [14:26]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1944. 6. 6.

 

나는 마리아와 요셉이 짐승들과  같은 공간에서 기거하고 있는 그 초라한 돌투성이 동굴의 내부를 보고 있다.

 

작은 모닥불도 졸고 있고, 불을 살피는 사람도 졸고 있다. 마리아는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머리를 들고 주위를 살펴본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머리를 가슴에 파묻은 채 자고 있는 요셉을 보고, 깨어 있겠다는 그의 착한 뜻이 피로에 꺾였구나 하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환하게 미소 짓는다. 마리아는 장미꽃에 앉는 나비가 내는 소리보다 더 조용하게 앉았다가 무릎 꿇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기도드린다. 그녀는 팔을 거의 십자 모양으로 교차시켜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기도하는데, 그 힘든 자세도 마리아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다. 그러다가 그녀는  한층 더 열렬하게 기도하는 자세로 건초에 얼굴을 대고 엎드린다. 오랫동안 그녀의 기도가  계속 된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난다. 불이 거의 꺼져 외양간이 어둠에 싸여 있음을 본다. 잔가지를 한 줌 던져 넣자 불꽃이 다시 살아난다. 그는 큰 가지를 얹고, 그 다음에는 더 큰 가지들을 얹는다. 이 폐허의 사방으로 파고드는 조용한 겨울밤의 추위가 매섭기 때문이다. 가엾은 요셉은 문―요셉이 자기의 겉옷으로 막아 보려고 하는 뚫린 구멍을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몸이 꽁꽁 얼었을 것이 틀림없다.

 

요셉은 불꽃 가까이 두 손을 갖다 대고, 샌들을 벗은 다음 두 발도 불 가까이에 갖다 댄다. 몸을 녹이는 것이다. 불이 잘 붙어 불빛이 환해지자 몸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칙칙한 건초 위에 밝은 빛을 그어 놓던 마리아 베일의 흰빛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요셉이 천천히 일어나 마리아에게 간다.

 

“마리아, 자지 않고 있소?”


그는 세 번이나 묻는다.

마리아가 뒤늦게 알아듣고 대답한다.


“네, 저는 기도드리고 있어요.”

“필요한 건 없소?”

 

“없어요.”

“좀 자도록 해 보오. 좀 쉬기라도 해요.”

 

“그렇게 해 보겠어요. 하지만 기도드리는 것은 피곤하지 않아요.”

“잘 자요, 마리아.”

“잘 자요, 요셉.”

 

마리아가 원래의 자세로 돌아간다. 요셉은 더 이상 잠에 지지 않으려고 불 곁에서 무릎 꿇고 기도드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기도하다가 불에 나무를 얹을 때나 얼굴에서 손을 뗐다가 열렬한 기도로 다시 돌아간다.

 

나무가 탁탁 튀는 소리와 가끔 땅바닥을 두드리는 나귀의 굽 소리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달빛 한 줄기가 천장의 터진 틈으로 들어오는데, 마리아를 찾아 내려오는 은빛 칼날 같다. 달빛은 달이 하늘로 올라감에 따라서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오더니 마침내 마리아에게 이른다. 이제는 달빛이 기도드리는 마리아의 머리를 비춘다. 달빛은 마리아를 빛나는 흰 빛의 후광으로 둘러싼다.

 

마리아는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머리를 들고 나서 다시 무릎을 꿇는다. 아아! 이 순간 이곳은 참으로 아름답다! 마리아가 머리를 드는데, 그 얼굴이 흰 달빛으로 빛나고, 미소는 인간의 그것이 아닌 듯 신비한 미소로 변한다. 이 순간에 마리아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무슨 소리를 듣는 것일까?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다만 나는 마리아 주위에 빛이 커지고, 커지고, 또 커진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 빛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고, 마리아의 주위에 있는 보잘것없는 물건들에서 발산되는 것 같은데, 특히 마리아에게서 발산되는 것 같다.

 

짙은 하늘빛인 마리아의 옷은 물망초와 같은 부드러운 하늘빛을 띠었고, 그녀의 손과 얼굴은 거대한 밝은 청옥빛 불 아래 있는 듯 하늘빛으로 보인다. 이 빛깔을 보니 비록 더 엷기는 하지만 거룩한 천국에 대한 환시에서 보았던 빛깔이 생각나고, 동방 박사들이 오는 것을 본 환시의 빛깔도 생각난다. 그 빛은 특히 물건들 위로 점점 더 퍼져서 그것들을 감싸고 깨끗하게 하며 휘황찬란하게 보이도록 해 준다.

 

마리아의 몸에서 빛이 점점 더 발산되어 달빛을 흡수한다. 그 빛이 하늘에서 내려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지금 마리아는 빛의 보관자인데, 그녀는 장차 세상에 그 빛을 주게 될 것이다. 세상에 주어지려고 하는 찬란하고, 저항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영원하고 숭고한 이 빛이 새벽과 더불어, 새벽을 알리는 지저귐과 더불어, 깨어나는 새벽빛과 더불어, 점점 더 커지는 빛의 원자들의 합창과 더불어, 거대한 향의 소용돌이처럼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밀물처럼, 급류처럼 내려와서 베일 모양으로 펼쳐지는 밀물처럼 퍼진다.

 

갈라진 틈과 거미줄과 절묘하게 균형 잡힌 것같이 보이는 불쑥 튀어 나온 파편 투성이의 꺼멓고, 그을린, 혐오감을 일으키는 천장이 왕이 사는 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돌 하나하나가 은덩어리 같고, 틈 하나하나가 유백색으로 빛나며, 거미줄 하나하나가 은과 금강석으로 짠 캐노피 같다. 두 돌덩어리 사이에서 동면하는 큰 도마뱀은 어떤 여왕이 거기 두고 잊어버린 벽옥 목걸이와 같고, 동면하는 한 무리의 박쥐는 귀중한 마노로 만든 샹들리에 같다. 가장 높은 시렁에 늘어져 있는 건초는 풀이 아니고, 물결치는 머리채처럼 우아하게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는 은색 실이다.

 

투박한 나무로 만들어진 구유는 광을 낸 은덩어리가 되었다. 벽들은 수단으로 덮인 듯하고, 비단의 흰 바탕이 도드라지게 수놓은 진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땅바닥이 이젠 흰 빛으로 비추어진 수정이다. 불쑥 내민 곳들은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땅 위에 놓아둔 빛나는 장미꽃 같다. 구멍들은 방향을 풍기는 귀중한 잔들 같다.

 

빛이 점점 더 환해져 눈이 부셔 그 빛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빛 속으로,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빛의 베일에 빨려 들어가듯이 동정녀가 사라진다.

 

그런 다음 그 빛에서 어머니가 나타난다. 그렇다. 내 눈이 빛을 견딜 수 있게 되었을 때, 마리아가 갓난 아들을 안고 있는 것을 본다. 장미꽃 봉오리만한 손과 장미꽃 속에도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작은 발을 흔들며 몸부림치는 분홍빛의 토실토실한 작은 아기, 작은 나무딸기같이 빨간 입을 벌리고, 장밋빛 입천장에 닿는 작은 혀를 보이면서 금방 태어난 어린양의 목소리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는 아기다.

 

어찌나 가는 금발인지 머리카락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작고 동그란 머리를 흔드는 아기. 어머니는 그 작은 머리를 한 손바닥으로 받쳐 들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아기에게 경배하고 입 맞추기 위해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그녀는 순결한 머리에 입 맞추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뛰고 또 뛰는 작은 심장이 있는 가슴 한가운데에 입 맞춘다. 나중에 상처를 입게 될 그곳에 어머니는 티 없는 이의 입맞춤으로 그 상처를 미리 싸매 준다.

 

환한 빛 때문에 잠이 깬 소는 요란한 굽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 운다. 나귀도 머리를 들고 운다. 그놈들은 빛 때문에 잠이 깼다. 그러나 나는 그놈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또 모든 동물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창조주께 인사드리려고 했다고 믿고 싶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초연할 정도로, 마치 탈혼 상태에 든 것처럼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요셉도 몸을 흔든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이상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에서 손을 뗀 다음 머리를 들고 돌아선다. 서 있는 소에 가려 마리아가 보이지 않지만 마리아가 그를 부른다.

 

“요셉, 이리 오세요.”

 

요셉이 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흠숭하는 마음으로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려고 한다. 그러나 마리아가 재촉한다.

 

“이리 오세요, 요셉.”

 

마리아가 왼손으로 건초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아기를 붙잡고 가슴에 꼭 껴안으면서, 다가오려는 마음과 불경스러움을 걱정하는 두려움 사이에서 망설이는 요셉에게 간다.

 

잠자리 맡에서 두 부부가 만나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서로 쳐다본다.

 

“오세요. 예수를 아버지께 바칩시다.”


마리아가 말한다.

 

요셉이 무릎 꿇는 동안, 마리아는 천장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 서서 두 팔로 아기를 쳐들고 말한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 저는 아기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고 제가 여기 왔습니다. 그리고 아기와 더불어 저 마리아와 제 남편 요셉도 여기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들이 여기 있습니다. 어느 때든 어떤 경우든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사랑을 위하여 당신의 뜻이 저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몸을 숙이고 다시 말한다.


“요셉, 받으세요.”

 

마리아가 요셉에게 아기를 준다.

 

“나, 나에게! 아, 안되오! 나는 자격이 없소!”


요셉은 하느님을 만져야 한다는 생각에 당황하여 몹시 겁을 낸다.

그러나 마리아는 미소 지으며 고집한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있어요. 당신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을 택하셨어요. 요셉, 아기를 받으세요. 그리고 제가 배내옷을 찾는 동안 안고 계세요.”

 

요셉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팔을 내밀어 작은 아기를 안는다. 아기가 추워서 운다. 요셉이 아기를 안았을 때의 경외심으로 아기를 멀리 떨어져 있게 하려는 생각은 오래 가지 않는다. 아기를 가슴에 껴안고 흐느끼면서 말한다.


“오! 주님! 내 하느님!”

 

그 작은 발에 입 맞추려고 얼굴을 숙이려다가 발이 꽁꽁 얼어 있는 것을 느끼고, 땅바닥에 앉아 품에 아기를 꼭 껴안는다. 그리고 그의 갈색 옷과 두 손으로 아기를 가려 따뜻하게 해 주고, 밤바람을 막아 주려고 애쓴다.

 

불 옆으로 가고 싶었지만,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있어서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낫다. 바람을 막아 주고, 약간의 온기를 줄 두 짐승 사이로 가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는 소와 나귀 사이로 가서 어깨를 문 쪽으로 돌리고, 갓난아기 위로 몸을 숙여 그의 가슴으로 오목한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의 안쪽 벽은 귀가 긴 회색 머리와 김을 내뿜는 콧구멍과 축축한 순한 눈을 가진 커다란 흰 입이다.

 

마리아가 궤를 열고 속옷과 기저귀를 꺼내 따뜻하게 하려고 불 옆으로 가 불의 온기를 쪼인 다음 따뜻해진 속옷을 아기에게 입히고 작은 머리를 베일로 감싸 준다.

 

“아기를 어디에다 눕힐까요?”

 

요셉은 휘 둘러보면서 생각하다가 말한다.

 

“기다려 봐요. 두 짐승들과 꼴을 좀 더 저쪽으로 밉시다. 더 위쪽에 있는 꼴 시렁에서 건초를 끌어내려 이 안에 넣읍시다. 이 구유의 옆면이 바람을 막아 줄 것이고, 건초는 베개가 될 것이고, 소가 입김으로 아기를 약간이나마 따뜻하게 해 줄 거요. 소가 나아요. 소는 참을성이 더 많고 조용하니까.”

 

요셉이 일을 시작하자 마리아는 아기를 가슴에 꼭 껴안고 흔들면서 작은 머리를 따뜻하게 해 주려고 뺨을 갖다 댄다.

 

요셉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려고 나무를 아끼지 않는다. 건초를 불에 쬐어서 말려서 어기 있는 곳으로 오는 동안 다시 차가워지는 것을 막으려고 가슴에 안는다. 그런 다음 아기의 요를 만들 만큼 건초를 넉넉히 모았을 때 구유로 가서 정리하여 요람을 만든다.

 

“자 다 됐소. 이제는 아기가 건초에 찔리지 않게 하고 아기를 덮어 줄 담요가 한 장 있어야겠는데…”

“제 겉옷으로 하세요.”


마리아가 대답한다.

 

“당신 추울 텐데.”

“오! 그건 괜찮아요. 담요는 너무 까칠까칠해요. 겉옷이 부드럽고 따뜻해요. 저는 조금도 춥지 않아요. 이제는 아기가 고통당하지 말아야 해요.”

 

요셉은 폭신한 모직으로 지은 짙은 파란색 넓은 겉옷을 집어 두 겹으로 해서 건초 위에 깔았는데, 겉옷의 한 자락이 구유 밖으로 나와 있다. 구세주의 첫 번째 침대가 준비되었다.

 

어머니는 물결치는 것 같은 걸음걸이로 아기를 안고 가서 내려놓고 겉옷 자락으로 덮어 주고, 겨우 마리아의 얇은 베일로 건초에 찔리지 않게 되어 건초에 파묻힌 맨 머리 주위를 겉옷 자락으로 싸준다. 드러나 있는 것은 어른 주먹 만한 크기의 아기의 작은 얼굴뿐이다.

 

두 사람은 구유 쪽으로 몸을 숙이고 행복해 하며 아기가 처음 잠자는 것을 들여다본다. 따뜻한 배내옷과 건초가 아기의 울음을 그치게 하였고, 온순한 예수를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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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예수가 그의 평화를 너에게 가져다주러 올 것이라고 너에게 약속했었다. 그런데 성탄 날 내가 아기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네 안에 있던 평화가 기억나느냐? 그때는 네 평화의 때였다. 지금은 네 고통의 때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도 고통 속에서 우리와 이웃을 위한 평화와 일체의 은총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사람인 예수는 수난의 무서운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인 예수가 되었다. 예수는 다시 평화가 되었다. 그가 떠나왔던 하늘, 세상에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그의 평화를 널리 베푸는 하늘에서 다시 평화가 되었다. 그러나 수난의 시간에는 세상의 평화인 그가 이 평화를 빼앗겼었다. 만일 그가 평화를 소유하고 있었더라면 고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통당해야 했다. 그는 완전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여인의 죄를 대신 속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인의 구속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동정을 서원함으로써 일체의 인간적인 결합을 거절함으로써 일체의 육체적 만족을 물리쳤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하와의 죄는 가지가 넷 있는 나무와 같은 것이었다. 네 가지는 교만(pride), 탐욕(avarice), 탐도(gluttony), 음란(lust)이라는 가지다. 나무를 뿌리까지 메마르게 하기 전에 이 네 개의 가지를 잘라야 했다.

 

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를 낮추면서 나는 교만을 이겼다. 나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나를 낮추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의 내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다 겸손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겸손을 가지고 계셨다. 여자인 나도 겸손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내가 도무지 저항하지 않고 견디어야 했던 사람들로부터의 그 모든 모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느냐?

 

의인이었던 요셉마저도 마음속으로 나를 비난했었다. 의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내 임신을 비방하여 죄를 지었고, 그들 말의 소문이 가혹한 파도처럼 몰려와서 여인으로서의 내 명예를 부숴뜨렸다. 이것이 예수와 인류의 어머니로서의 내 일생이 나에게 마련해 준 수많은 모욕 중의 처음 것들이었다. 가난의 굴욕, 피난자로서의 굴욕,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청년이 된 예수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내 행동을 심약한 탓이라고 공격하던 친척들과 친구들의 비난으로 인한 굴욕, 예수의 전도 생활 3년 동안의 모욕, 골고타의 그 시간에 받은 가혹한 모욕, 내 아들을 장사지내기 위한 자리와 향료를 살 돈이 없음을 인정하기까지에 이르는 굴욕감 따위 말이다.

 

나는 내 아들을 미리 포기함으로써 첫 부모들의 탐욕을 이겼다. 어머니는 강요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만일 조국이나 아들의 아내의 사랑으로나 하느님 자신이 그의 마음에 아들을 요구하면 어머니는 그 이별에 저항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인격을 우리의 인격과 연결시켜 주는 끈을 절대로 완전히 끊지는 못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배꼽의 줄이 끊어진 뒤에도 어머니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신경, 육체의 신경보다 더 살아 있고 더 민감하며, 아들의 마음에 연결된 영적인 신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의 사랑이나 조국에 대한 의무 때문에 아들이 어머니를 떠나가게 되면 그 줄이 고통을 줄 정도로 팽팽하게 늘어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죽음이 어떤 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가면 그 줄이 끊어지면서 심장을 찢어 놓는다.

 

그런데 나는 내 아들을 가진 그 순간부터 그를 포기했다. 나는 내 아들을 하느님께 바쳤고, 너희에게 주었다. 나는 하느님에게서 열매를 훔친 하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내 태에서 나온 열매를 버렸다.

 

나는 지식에 대한 탐도(gluttony)와 향락에 대한 탐도를 이겼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알게 하신 것만 알기를 수락하고, 내가 들은 것 이외에는 내 자신에게도 하느님께도 묻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나는 탐구하지 않고 믿었다.

 

나는 향락의 탐도를 이겼다. 육체의 감각적인 만족을 일절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육체를 발로 짓밟았다. 사탄의 도구인 육체를 사탄과 더불어 내 발뒤꿈치 밑에 두어 하늘에 오르기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 내 목적인 하늘! 내 유일한 갈망이신 하느님이 계신 곳 말이다. 이 갈망은 탐도가 아니고, 우리가 당신만을 갈망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데 필요한 것이다.

 

나는 게걸스럽게까지 되는 탐도인 음란을 이겼다. 억제되지 않은 악습은 더 큰 악습으로 이끌어 간다. 그렇지 않아도 비난할 만한 하와의 탐도가 그를 음란으로 이끌어 갔다. 자기 혼자서 만족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하와는 자기의 죄를 세련된 격렬함에까지 이끌어 갔다. 하와는 음란을 알았고, 그것을 남자 동무에게 가르쳤다.

 

나는 그 순서를 뒤집어서 내려가는 대신 항상 올려갔다. 타락시키기는 고사하고 나는 항상 정상을 향하여 끌어당겨서 의인이던 내 짝을 천사로 만들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하느님과 더불어 그분의 무한한 보물을 소유하기가 무섭게 나는 서둘러 나를 버리면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아기를 위하여, 아기에 의하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애정과 생각까지도 자제하는 사람이야말로 순결한 사람이다. 나는 육체와 마음과 영혼이 불결한 암컷(female)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하여 순결해야 했다. 나는 자제심을 버리지 않고, 하늘에서는 오직 하느님의 것이고 세상에서는 오직 내 것이던 내 아들에 대해서까지도 “이 애는 내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을 원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와로 인해 잃어 버린 평화를 여자에게 돌려주는 데에는 이것으로도 충분치 못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 평화를 십자가 아래에서 얻었다. 죽어가는 내 아들이 외치는 소리에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나는 여성성을 모두 잃었다. 그때 나는 이미 육체가 아니고 천사였다. 정배로서 성령과 결합한 동정녀 마리아는 그 순간에 죽었다. 남아 있는 것은 고통으로 낳은 은총을 너희에게 준 은총의 어머니였다. 성탄날 밤 내가 다시 여자(woman)로 확립한 암컷(female)이 십자가 아래서 하늘의 인간이 되는 방법을 얻었다.

 

나는 만족을, 거룩한 만족까지도 일절 거부하면서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하였다. 하와로 인하여 동물의 암컷보다 나을 것이 없는 암컷들로 비하되었던 너희를, 너희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하느님의 성녀로 만들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올라갔다. 내가 요셉을 인도한 것처럼 나는 너희를 높이 들어올렸다. 칼바리아의 바위가 나에게는 올리브나무 동산이다. 거기서 나는 다시 거룩하게 된 여자의 영혼과 하느님의 말씀을 낳고, 하와의 마지막 흔적까지 없애 버림으로써 영광스럽게 된 내 육체를 하늘로 옮겨 가기 위해 도약했다.

 

그것은 독 있는 가지 넷이 달린 그 나무의 마지막 뿌리까지, 인류를 타락으로 끌고 간 관능에 깊이 박힌 뿌리에 이르기까지 없애 버렸다. 그 뿌리는 세상 끝 날까지, 또 마지막 여인에 이르기까지 너희 마음을 괴롭힐 것이다. 내가 이제 사랑의 빛 속에서 빛나는 그곳에서 너희를 부르며, 너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알려 줄 터인데, 그 약은 내 주님의 은총과 내 아들의 피다.

 

내 목소리인 너는 예수의 이 새벽의 빛 속에서 네 영혼을 쉬게 하여라. 네가 면치 못할 장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고통을 통해 오는 이곳에 네가 오기를 원하는데, 세상에 은총을 얻어 주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겪을수록 더 높이 올라오는 이곳에 네가 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평안히 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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