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板門店) 남북정상회담의 의미

김형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4/26 [17:24]

판문점(板門店) 남북정상회담의 의미

김형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4/26 [17:24]

[신문고뉴스] 김형 칼럼니스트 =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다. 전 세계의 관심은 회담이 열릴 판문점에 쏠려 있고, 모든 언론이 앞다퉈 회담의 의의와 전망,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달리 회담장소인 판문점에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판문점은 1951. 10. 25 휴전회담이 처음 열린 이래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냉전대결의 산물이자 민족분단의 한과 아픔을 고스란히 품은 지역이다.

 

이따금 판문점에서 화해와 교류협력을 위한 남북대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1951. 7. 8 개성의 요리집 내봉장(來鳳莊)에서 열린 휴전회담 예비회담 이래로 판문점에 천막을 치고 열린 본회의 159회를 비롯,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의를 거친 휴전회담이건, 정전협정 조인이건(국제연합군 클라크 총사령관은 문산 숙소에서 서명), 군사정전위원회 회의건 우리는 끼어들 자리도, 몫도, 자격도 없었다.

 

▲ 휴전회담 조인을 위해 조인식장을 새로 짓는 모습. 조인식장은 회담장(원 안)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지어졌다. 이 건물들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 떨어져 있어 북한 측에 편입된 상태이고, 지금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휴전협정 이후 새로 조성된 것이다. 김형 칼럼니스트 제공    

 

바로 그 판문점에서 분단국가의 당사자로서, 주권국가로서 정전협정의 상대인 북한과 직접 회담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첫 번째로 꼽는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다.

 

판문점은 6·25전쟁 직전 널문리라 불리던 곳으로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침송리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농촌마을이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지역이 개성부 판문평(板門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부근에 널문다리(板門橋)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설과 마을에 널판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에 널문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러니 판문점은 판문평, 판문교에서 유래했다고 할 것이다.

 

판문점이 휴전회담 장소로 처음 결정된 것은 북한측의 제안이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장소 주변에서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회담장소의 중립성이 문제가 되자 국제연합국측은 1951.9.6 회담장소 이전을 제의하였고, 북한이 1951.10.7 새 회담장소로 도로변에 초가 4채가 있던 널문리 주막마을로 제안하자 국제연합측이 다음날 이에 동의함으로써 회담장소가 옮겨지게 된 것이었다.

 

이번 정상회담 장소인 판문점도 북한의 제안이었다. 그런 만큼 정전협정처럼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 진일보한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북한의 전향적 자세와 회담에 임하는 의지가 보이는 것에 두 번째 의미를 두고 싶다.

 

▲ 현재의 판문점...김형 칼럼니스트 제공   

 

과거 휴전회담 장소로 널문리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듯이, 67년이 흐른 지금 다시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예전에 사람이 왕래하고 교류하던 통로인 판문교, 널문리 주막마을처럼 이제 판문점이 남북평화와 통일로 가는 다리이자 분단의 한을 씻어주는 공간이 되어주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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