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35] 이집트로의 피난

강명준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5/05 [17:30]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35] 이집트로의 피난

강명준 변호사 | 입력 : 2018/05/05 [17:30]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1944. 6. 9.

 

내 영혼은 다음 광경을 본다.

 

밤이다. 요셉은 아주 작은 자기 방에서 작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다. 그 잠은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쉬는 사람의 평화로운 잠이다.

 

나는 방의 어둠 속에 있는 그를 보는데, 약간 열린 창틈으로 들어 온 한줄기 달빛 덕택이다. 작은 방이 너무 덥거나 동트는 새벽빛에 잠이 깨려고 요셉이 창문을 약간 열어 두었던 것 같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 자면서 꿈속에서 무슨 환상이라도 보는지 빙그레 웃고 있다.

 

그러다가 요셉의 미소는 불안한 표정으로 바뀐다. 그는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긴 한숨을 쉬더니 벌떡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가 그는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 쪽을 바라본다. 깊은 밤이다.

 

그가 침대 밑에 펼쳐져 있는 겉옷을 집어 침대에 앉은 채 맨살 위에 입은 소매 짧은 속옷 위에 걸친다. 그는 이불을 젖히고 방바닥으로 내려서며 샌들을 찾아 신고 끈을 맨다. 그가 일어나 침대 맞은편 문 쪽으로 간다. 그 문은 박사들을 맞이하였던 방으로 통하는 침대 옆에 있는 문이 아니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라는 말을 알아들은 요셉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소리 나지 않게 반쯤 닫는다. 그는 문으로 향해 가기 전에 심지 하나만 있는 작은 기름등잔에 불을 켜서 발밑을 밝혔었다. 자기 방보다 약간 더 큰 방이다. 요람 옆에 낮은 침대가 놓여 있다. 야등이 하나 켜져 있는데, 한구석에서 흔들리고 있는 작은 불꽃은 마치 약한 빛을 내는 작은 금빛별과 같아서 다른 사람의 잠을 방해하지 않은 채 볼 수 있게 한다.

 

마리아는 자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요람 가까이에서 무릎 꿇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예수를 지켜보며 기도드리고 있다. 예수는 내가 동방박사들을 본 환상 때와 같은 나이다. 아름답고 발그레하며 금발인 한 살쯤 된 어린이다. 그는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한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주먹을 쥔 한 손은 턱에 얹은 채 자고 있다.

 

“당신 아직 자지 않고 있었소? 왜? 예수의 몸이 좋지 않소?”


요셉이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아니오! 예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기도하고 있었어요. 저는 나중에 자겠어요. 당신은 왜 오셨어요, 요셉?”

 

마리아가 무릎을 꿇은 채로 말한다.

요셉은 아기를 깨우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지만 흥분해 있다.


“즉시 여기를 떠나야 하오. 즉시 말이오. 가능한 모든 물건들을 넣을 수 있는 상자와 자루를 준비하시오. 나머지는 내가 준비하겠소. 나는 가능한 한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가겠소. 새벽에 도망칩시다. 나는 더 일찍 떠나고 싶지만 집주인 여자에게 말해야 하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야 해요?”

“내가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겠소. 예수를 위해서요. 한 천사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하라’고 나에게 말했소.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준비하겠소.”

 

마리아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마리아는 천사, 예수, 도망을 언급하는 요셉의 말을 듣자마자 아들에게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깨닫고, 밀랍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서서 몹시 불안해하며 한 손을 가슴에 얹는다. 마리아는 빠르고 가볍게 걸으며 상자와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있는 침대에 펼쳐 놓은 자루에 옷들을 넣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불안해하지만 당황하지 않으며, 서두르지만 질서 있게 행동한다. 그녀는 이따금씩 요람 곁으로 지나갈 때, 조용히 자고 있는 아기를 들여다본다.

 

“도움이 필요하오?”


요셉이 벙싯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며 가끔씩 묻는다.

 

“아니오. 고마워요.”


그때마다 마리아가 대답한다.

마리아는 자루가 꽉 차서 무겁게 되었을 때에 요셉을 불러 그것을 묶고 침대에서 치우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요셉은 마리아가 거들어 주기를 원치 않고 혼자서 요령 있게 긴 자루를 들고 자기의 작은 방으로 옮긴다.

 

“모직 담요들도 가져갈까요?”


마리아가 묻는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가요. 나머지는 모두 잃어버릴 테니까요.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전부 가져갑시다. 그것들은 유익할 거요. 왜냐하면 우리는 먼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요, 마리아!”


요셉이 매우 슬퍼하며 말한다.

마리아가 어떤 심정인지 쉽게 나는 느낄 수 있다. 마리아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자기 이불과 요셉의 이불을 개키자 요셉이 곧바로 그것들을 동여매면서 말한다.

 

“침대보들과 매트들은 여기 그냥 두고 갑시다. 나귀 세 마리를 쓴다 해도, 그놈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울 수는 없소. 우리 앞의 여정은 산을 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사막도 지나가야 하는 멀고 힘든 길이오. 예수를 잘 감싸시오. 산속에서나 사막에서의 밤은 추울 거요.

 

나는 동방박사들의 선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거기서 우리에게 유익할 거요. 나에게 있는 돈은 나귀 두 마리를 사는 데 모두 쓰겠소. 우리가 나귀들을 돌려보낼 수 없으니 그것들을 사야 하오. 나는 새벽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가겠소. 나귀를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나는 알아요. 그 동안 당신은 모든 준비를 끝내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고 요셉이 밖으로 나간다.

 

마리아는 또 어떤 물건들을 모은 다음 예수를 살펴보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가 전날 빨았는지 아직 축축해 보이는 작은 옷 몇 가지를 가지고 돌아온다. 그 옷들을 개켜서 옷들 속에 뭉쳐 넣은 다음 다른 짐들과 함께 놓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마리아는 몸을 돌려 한구석에 있는 예수의 작은 장난감을 본다. 나무로 깎아 만든 작은 양이다. 마리아는 흐느끼며 손으로 집어 그것에 입 맞춘다. 나무에는 예수의 작은 이빨자국들이 있고, 양의 귀는 온통 닳아 있다. 마리아는 가벼운 나무 조각을 깎아 만든 값어치 없는 그 장난감을 쓰다듬는다. 이 장난감이 예수에 대한 요셉의 애정을 그녀에게 말해 주고 마리아에게 아기를 생각하게 해 주기 때문에 대단히 귀중한 물건이다. 마리아는 그것을 닫힌 상자 위에 있는 다른 물건들과 함께 놓는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요람에 있는 예수뿐이다. 마리아는 아기를 잘 준비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아기를 깨우려고 요람을 조금 흔들자 아기는 잠깐 끙끙거리며 돌아누운 다음 계속 잔다. 마리아가 아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예수는 그 작은 입을 벌리고 하품한다. 마리아는 몸을 숙여 아기의 뺨에 입 맞춘다. 예수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엄마를 보자 방긋 웃으며 두 손을 엄마의 가슴을 향해 내민다.

 

“오냐, 엄마의 사랑아. 그래, 젖을 주마. 보통 때보다는 이르다마는… 그렇지만 너는, 너는 언제나 엄마 젖을 빨려고 하지, 내 거룩한 어린양아!”

 

예수는 웃으면서 작은 발을 담요 밖으로 내밀고 흔들며, 보기에도 귀여운 어린이다운 기쁨으로 팔을 내저으면서 논다. 아기는 엄마의 명치에 두 발을 갖다 대고 몸을 구부려 금발 머리를 엄마의 가슴에 갖다 대며 몸을 젖히고 마리아의 옷을 여미는 끈을 잡고 옷을 헤치려고 하면서 웃는다. 아마포로 지은 소매 짧은 셔츠를 입은 아기는 매우 아름답고 포동포동하고 꽃처럼 발그레하게 보인다.

 

마리아가 몸을 숙이고 요람을 껴안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울고 웃는다. 아기는 모든 아기들이 하는 말과는 다른 말로 조잘거리는데, 그 말 가운데서 ‘엄마’라는 말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다. 아기는 엄마가 우는 것이 이상한 듯 쳐다보며 뺨으로 흘러내리는 반짝이는 눈물자국으로 손을 뻗어서 엄마의 얼굴을 만진다. 그 바람에 아기의 손가락에 눈물이 묻는다. 그런 다음 아주 사랑스럽게 엄마의 가슴에 자신의 몸을 갖다 대고 작은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는다.

 

마리아는 아기의 머리에 입 맞추고 안아 앉히고 옷을 입히는데, 모직으로 만든 옷을 입히고, 양발에는 아주 작은 샌들을 신긴다. 마리아가 아기에게 젖을 주자 예수는 엄마의 맛있는 젖을 열심히 빨기 시작한다. 오른쪽 가슴에서 젖이 조금 밖에 안 나오자 왼쪽 젖가슴을 더듬으며 웃는다. 그러면서 아래에서 위로 엄마를 올려다본다. 그러다가 아기는 머리를 마리아의 가슴에 대고, 발그레하고 동그란 작은 뺨을 어머니의 희고 둥근 젖에 갖다 댄 채 잠이 든다.

 

마리아가 일어나 아기를 침대의 이불에 내려놓고 자기의 겉옷으로 감싼다. 요람으로 가서 작은 담요들을 개키면서 작은 매트도 가져가야 하나 하고 망설인다. 그렇게도 작은데! 가져갈 수 있다. 마리아는 매트를 베개와 함께 상자에 있는 물건들 옆에 놓고, 자기 아들과 함께 박해당하는 가엾은 엄마는 텅 빈 요람을 내려다보며 운다!

 

요셉이 돌아온다.

 

“다 준비되었소? 예수도 준비됐고? 아기 담요와 작은 침대도 챙겼소. 요람은 가져갈 수 없소. 하지만 작은 매트는 있어야 하오. 사람들이 목숨을 노리는 가엾은 아기!”

“요셉!”


마리아가 외치며 요셉의 팔에 매달린다.

 

“그렇소. 마리아, 그들이 아기를 죽이려고 하오! 헤로데가 자기의 인간적인 왕권으로 인해 아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기를 죽이려 하고 있소. 그 더러운 짐승 같은 자가 이 무죄한 어린이를 두려워한단 말이오. 아기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 때에는 우리는 멀리 가 있을 거요.

 

나는 그가 갈릴래아까지 찾아와서 복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우리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고, 나자렛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는 더 어려울 것이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울 거요. 사탄이 자기에게 충성스럽게 종노릇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서 그를 도와준다면 또 몰라도.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느님 쪽에서도 우리를 도와주실 거요. 마리아, 울지 마시오. 당신이 우는 것을 보는 것이 망명지로 떠나야 하는 것보다 나에게는 훨씬 더 고통스럽소.”

 

요셉, 용서하세요! 저 때문에 우는 것도 아니고,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잃는 것이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 때문에 우는 거예요. 당신은 이미 그렇게도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당신은 단골고객도 다 놓치고, 집도 없어졌어요! 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큰 짐이 되는데요, 요셉!”

 

 

 

 

“얼마나 짐이 되느냐고? 아니오. 마리아, 당신이 나에게 짐이 되지는 않소. 당신은 나를 위로하오, 항상. 내 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에게는 동방박사들이 준 보물들이 있소. 그 보물들이 초기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요. 그 다음에는 내가 일거리를 얻게 될 거요. 유능하고 재치 있는 일꾼은 항상 길을 찾아내오. 당신, 여기서 보았지요. 나는 시간이 모자라서 맡은 일을 다 해내지 못할 지경이었소.”

 

“알아요, 그렇지만 누가 고향에 대한 당신의 향수를 달래 주겠어요?”

“그러는 당신은? 당신에게 그렇게도 소중한 집에 대한 향수는 누가 달래 주겠소?”

 

“예수가요. 예수가 곁에 있으니 제가 그곳에서 가졌던 것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셈이에요.”

“나에게도 예수가 있으니 몇 달 전에 돌아가기를 바랐던 고향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오. 나는 내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소. 당신도 보다시피 무엇보다 나에게 소중한 것 가운데 잃은 것은 전혀 없소. 우리는 예수를 구하기만 하면 되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소. 비록 이 하늘과 이 땅, 그리고 이보다 더 소중한 갈릴래아 땅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해도, 예수가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셈이오.

마리아, 갑시다. 동이 트기 시작했으니,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작별하고 짐을 실을 때가 되었소. 모든 것이 잘 될 거요.”

 

마리아는 순종하여 일어난다. 마리아가 겉옷을 입는 동안 요셉은 마지막 꾸러미를 싸서 들고 나간다.

 

마리아는 아기를 소중히 들어 올려 숄에 싸 가슴에 꼭 껴안고 여러 달 동안 살았던 방의 벽을 손으로 어루만진다. 마리아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었던 복된 집!

 

마리아가 나온다. 요셉의 방이었던 작은 방을 지나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집주인 여자는 눈물 흘리며 마리아에게 입을 맞추고 인사한 다음, 숄을 들치고 조용히 자고 있는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들은 바깥 계단으로 내려온다.

 

이른 새벽의 미명으로 겨우 물건들을 구별할 수 있다. 이 희미한 빛 속에 성가족이 타고 갈 짐승 세 마리가 보인다. 가장 튼튼한 놈에게 짐이 실려 있고, 다른 놈들에게는 안장이 얹혀 있다.

 

요셉은 첫째 나귀의 길마 위에 궤와 꾸러미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자루 위에 목수의 연장을 싸서 올려놓은 것이 보인다. 또 다시 눈물어린 작별인사를 한 다음 마리아가 나귀에 올라타고, 그동안 집주인 여자는 예수를 팔에 안고 있다가 엄마에게 돌려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춘다. 요셉도 마리아가 나귀 새끼를 제대로 잡게 하기 위해 자기가 탈 나귀를 짐 실은 나귀에 붙잡아 맨 다음 올라탄다.


아직 동방박사들의 환상적인 광경에 대해 꿈꾸고 있는 베들레헴이 임박한 일을 알지 못한 채 평온하게 자고 있는 동안 도망이 시작된다.

 

환상은 그것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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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일련의 환시도 이렇게 끝난다. 나는 까다로운 학자들과 일절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태어남과 동시에,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났던 광경들을 너에게 보여 주었다. 그 이유는 그 광경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광경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하느님께 더 큰 찬미를 드리기 위해―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용서받기는 하였다마는―사실을 그대로 두었으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덧붙여진 요소들에 의해 그것이 왜곡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식으로 인해 내 인간성과 마리아의 인간성이 축소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 천주성과 아버지의 위엄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사랑이 적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 어머니의 공로와 내 완전한 겸손과 영원하신 주의 전능하신 자비도 그로 인하여 빛난다. 우리가 그 광경들을 너에게 보여 준 것은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 광경에서 이끌어내는 초자연적인 의미를 적용할 수 있게 하고, 그 의미를 너희에게 삶의 규칙으로 주기 위해서다.

십계명은 율법이다. 그리고 내 복음은 이 율법을 더 명백하게 하고 지키기에 더 사랑스러운 것이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 율법과 이 가르침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안에서 영혼을 지나치게 지배하는 인간성에 너무 얽매여서, 율법과 내 가르침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낙망하여 멈춘다. 너희는 너희 자신과 너희를 향상시키려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예들을 인용하면서 말한다.

 

‘하지만 예수, 마리아, 요셉은(성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와 같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강했지요. 그분들은 고통 중에서도 금방 위로를 받으셨고, 그분들이 당한 그 얼마 안 되는 고통 중에도 격정을 느끼지 않으셨어요. 그분들은 이미 세상 밖에서 사는 분들이었지요.’

 

얼마 안 되는 고통이라고! 그들은 격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우리에게는 고통이 충실한 벗이었다. 고통은 갖가지 모습을 띠었고 온갖 이름을 다 가졌다.

 

격정…, 너희를 빗나가게 하는 악습들을 ‘격정’(passions)이라고 불러서 부정확한 말을 쓰지 마라. 그것들을 아예 ‘악덕(vices)’이라고, 그것도 으뜸가는 악덕이라고 불러라. 이러한 악덕들을 우리가 몰랐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눈과 귀가 있어서 보고 들을 수 있었고, 사탄은 사람들의 행동 중에 있는 이 악습들을 그 추악함과 함께 보여 주고, 암시로 유혹하면서 이 악습들을 우리 앞과 우리 주위에 내보이곤 했다. 그러나 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겠다는 의향으로 긴장해 있었기 때문에 추악함과 암시가 사탄이 꾀하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탄이 더 활동할수록 그가 우리 육체와 영혼의 눈에 내보이는 더러운 암흑에 대한 혐오감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빛 속으로 더욱 더 피해 들어갔었다.

 

그러나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열정(passions)은 우리 마음 안에서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향을 사랑했고, 그중에서도 우리의 작은 나자렛을 팔레스티나의 다른 모든 도시보다 더 사랑하였다. 우리는 우리 집과 친척들과 친구들을 좋아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왜 안 되었겠느냐?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감정들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 감정들은 우리의 좋은 친구들이었다.

 

내 어머니는 약 4년 후 나자렛의 자기 집으로 돌아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그녀가 ‘예’ 하는 말로 자기 태를 열어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였던 방 벽에 입을 맞추었다. 요셉은 자기 친척들과 더 수가 많아지고 성장한 조카들에게 기쁘게 인사했다. 요셉은 동향인들이 자기를 기억하고, 자기의 유능함을 인정하여 즉시 일을 부탁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좋아했다. 나 자신도 사람들의 우정에 감사하였고,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정신적 십자가 수난과 같은 고통을 느꼈다. 왜 그러지 않겠느냐? 하지만 내 어머니도, 요셉도 집과 친척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하느님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않았다.

 

나는 말해야 할 때에는 히브리인들의 미움이나 유다의 반감을 살 수 있는 말들을 참지 않았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들을 나에게 복종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구속자로서의 나에게가 아니라 부유한 나에게 집착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빵을 많아지게 했는데, 내가 원한다면 돈을 많이 생기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인 만족을 얻게 하려고 오지는 않았다. 내가 부른 사람들에게 그럴 생각은 나에게 더더욱 없었다. 나는 희생, 초탈, 순결한 생활, 겸손한 자리를 권장하였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어떤 사람을 붙잡아두는 방법이라고 해서 그의 탐욕과 관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돈을 그들에게 주었다면, 내가 어떤 종류의 스승이며 의인이었겠느냐?

 

내 나라에서는 스스로 ‘작아지면 ‘위대한 사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내 나라에서는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은 마귀들의 침대에 까는 지푸라기다. 세상의 위대함은 하느님 율법의 반대명제(antithesis)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부정한 방법으로 가장 좋은 자리를 독점할 줄 아는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웃을 자기가 밟고 올라갈 발판으로 삼고 그를 짓밟는다. 지배하기 위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사람들을 죽일 줄 알고, 자리들을 강탈하거나 나라들을 정복하며, 남들에게 피 흘리게 하여 자신을 살찌우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세상은 종종 범죄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아니다. ‘위대함’은 죄악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위대함은 착함과 정직과 사랑과 정의에 깃들어 있다. 너희의 ‘위대한 사람들’이 너희에게 어떤 독 열매를 주는지 보아라. 그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악마적 정원에서 그 열매들을 따는 것이다.

 

나는 그 마지막 환상에 대하여 말하고 싶을 뿐 자신들에 관한 진실을 듣기를 원치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권유해도 소용없을 다른 것에 대해 말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이 마지막 환상은 마태오 복음에 두 번 말한 어떤 특별한 점을, 두 번 되풀이한 어떤 구절을 설명해 준다.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His Mother)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해라’(2: 11),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2: 27). 그런데 너는 마리아가 자기 방에서 아기만 데리고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나를 낳은 후의 마리아의 동정과 요셉의 순결은, 자신들이 더러운 진흙이기 때문에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 빛처럼 순수하고 깨끗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강하게 부정되어 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이 그토록 부패하고, 마음이 육체로 인해서 너무 간음하여, 여자에게서 육체를 보지 않고 영혼을 봄으로써 그녀를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갈망하면서 초자연적인 분위기에서 살도록 자기를 들어 올릴 수 없게 되어 버린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 나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나비가 될 수 없는 벌레들에게, 자신들의 호색적인 점액으로 더러워지고 백합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는 파충류들에게 말하고 싶다. 마리아는 동정녀였고 동정녀로 남아 있었으며, 그녀의 영(spirit)이 오직 하느님 성령과만 결합하여 그분의 작용에 의하여 성부와 마리아의 외아들(the Only Begotten Son of the Father and of Mary)인 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것과 정확히 똑같이 오직 그녀의 영혼(soul)만이 요셉과 결혼하였다고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 어머니라는 복된 여인에 대한 애정 어린 존경으로 인해 나중에 꾸며진 전통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이 진리는 초기부터 알려져 왔다.

 

마태오는 수세기 후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마리아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마태오는 산골에서 자라서 시시한 이야기를 쉽게 믿는 보잘것없는 무식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너희가 지금 세리라고 부르고, 우리 시대에는 염세리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보고 듣고 이해할 줄 알았고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줄 알았다. 마태오는 풍문으로 제삼자를 통하여 사실들을 들은 것이 아니라 스승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직접 마리아의 입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나는 마리아의 불가침성(inviolability)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마리아가 거짓말했다고 감히 생각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마리아에게 다른 자식들이 있었더라면 나 자신의 친척들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 유다, 시몬, 요셉은 마태오와 같은 내 제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만일 두 가지 이상의 설명이 있었다면, 그것들을 쉽게 대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오는 ‘일어나 네 아내를 데리고’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고,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라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말하였다.

 

그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내’라는 용어가 불명예스러운 말이나 되는 것처럼,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말투였다고 나에게 말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순결을 부인하는 자들아, 그렇지 않다. 성경 첫머리에서부터 ‘남자는 자기 아내와 결합할 것이다’는 말이 있다. 실질적인 결혼 전에는 ‘짝(companion)’이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는 여러 차례, 그리고 여러 장에서 ‘아내’라고 부른다.

 

아담 아들들의 배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불린 사라도 마찬가지다. ‘네 아내 사라’라고 되어 있다. 또 롯에게도 ‘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라고 하였다. 룻기에 ‘마흘론의 아내 모압 여자’라는 말이 있다. 열왕기 상에는 ‘엘카나는 두 아내를 거느렸다’라는 말이 있고, 더구나 ‘그리고 엘카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였다’는 말이 있고, ‘엘리야가 엘카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였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열왕기에 ‘히타이트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말이 있다.

 

또한 교회에서 너희에게 결혼생활에서 거룩하게 지내라고 권고하기 위해 너희 결혼식 때에 노래하는 아름다운 책인 토빗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토빗이 자기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또 ‘토빗은 그의 아들과 아내와 함께 도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음서에, 즉 그리스도 시대에, 고대어와 비교해볼 때 당시의 현대어로 쓰던 시대에, 따라서 베껴 쓰는 데 착오가 있을 수 없던 시기에 쓰인 마태오 복음 22장에 이런 말이 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죽어서 그의 아내를 아우에게 남겨 주었다’고 말이다. 또 마르코 복음 10장에 ‘아내를 버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고, 루카는 네 번 계속해서 엘리사벳을 즈카르야의 아내라고 부르고, 8장에는 ‘쿠자스의 아내인 요안나’라는 말이 있다.

 

너희가 보다시피, 이 아내라는 명사는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금지된 단어가 아니었고, 하느님과 그분의 놀라운 업적이 화제에 올랐을 때에 말해서는 안 되고 더구나 써서는 안 되는 불결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천사가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하고 말할 때 마리아가 예수의 친어머니였지만 요셉의 아내는 아니었다는 것을 너희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로 영원히 남았다.

 

이것이 이 환상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후광이다. 침범되지 않은 동정녀, 순결하고 의로운 남자. 이들은 두 송이의 백합이었고, 나는 그 가운데에서 오직 순결의 향기 이야기만 들으면서 자랐다.

 

작은 요한아, 너에게는 자기 집과 고향을 억지로 떠나게 된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필요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네가 알고 있으며, 너는 그로 인해 죽도록 괴로워한다. 네 고통을 나에게 다오. 나는 그것만을 원한다. 그것이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것이다. 마리아야, 오늘은 금요일이다. 네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골고타에서의 내 고통과 마리아의 고통을 생각하여라. 우리의 평화와 사랑이 너와 함께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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