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45]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다

강명준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6/09 [10:08]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45]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다

강명준 변호사 | 입력 : 2018/06/09 [10:08]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1944. 2. 3.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1월 30일에 쓴 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러나’와 ‘만일’이라고 말할 기회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대신 내가 대답하겠다. 너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렇게 볼 때에는 내 육체적인 힘, 특히 심장의 힘이 몹시 약해진다.’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박사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겪는 일이 인간적이라는 증거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항상 힘을 강화해 주지, 결코 약함을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탈혼 상태에 빠진 위대한 사람들이 탈혼 중에는 내적인 상처와 큰 출혈의 결과인 고통과 물질의 무게를 없앰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그들 자신을 육체적으로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큰 행복을 누리다가 탈혼이 끝나자마자 자기들의 영혼이 자기에게서 떠나갔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기절하여 땅에 쓰러져 버리는지 그들은 나에게 설명해 주기 바란다. 또한 내 여종 테레사(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역주)의 고통과 같이, 내 성녀 젬마의 고통과 같이, 그리고 내 사랑과 그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내 수난을 몸소 겪을 자격을 얻었던 다른 영혼들의 고통과 같이 내 고뇌를 되풀이하는 더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몇 시간 겪고 난 그 사람들이 왜 가장 건강한 사람들도 가지지 못한 육체적인 기운과 균형을 도로 얻는지 또는 얻었는지도 설명해 주기 바란다.

 

나는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주인이다. 나는 그러한 내 종들을 내 마음대로, 내 손 안에서 장난감이 되는 예쁜 실처럼 사용한다. 너에게 있어서는 기적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네 지금의 육체적인 상태, 기적적으로 연장되는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극히 기초적인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될 정도의 탈진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격정을 느끼고 그 지복에 이르는데도 그것으로 인하여 죽지 않게 된다는 그것 말이다. 기적은 내가 불러주는 것이나 다른 영들이 하늘나라 말을 가져다주는 것을 네가 적은 시간에 너에게서 솟구친 것과 같은 생명력이 지금 이 시간에 너에게서 솟구쳐 오르는 데 있다. 기적은 너에게 남아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생명력이 기쁨으로 인하여 다 소멸한 후에 이렇게 갑자기 기운을 다시 얻는 데 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내가 너에게 부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강기슭으로 흘러들어가 적셔 주는 물과 같이, 나로부터 말라 버린 네 정맥으로 들어가는 피와 같은 것이다. 강기슭은 물에 잠겨 있는 동안은 젖어 있다가 다시 말라서 다른 물이 흘러내려올 때까지는 마른 채로 있다. 그것은 마치 새로 수혈을 받을 때까지 네게 있는 내 피를 뽑아내는 수술과 같은 것이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너는 내가 계획하는 것을 위하여, 내가 원하기 때문에 고통 중에서 일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이 아니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가련한 인간이다. 너에게는 다른 공로가 없다. 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원인이 되고 싶어 하는 갈망 외에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오래 전에 네 존재는 죽음 속에서 해체되어야 하였을 터인데 네가 그대로 살아 있고, 또 내가 호의를 가지고 네 생명을 보호하여 주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관조의 세계에서 너를 안고 다니지 않게 되고 너에게 말하지 않게 되면 네가 말하듯이 네가 ‘넝마조각’으로 되돌아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네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무슨 일이든 내가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난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내가 같은 의지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네 병을 고쳐 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내 사랑과 내 호의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내 종들의 임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판단하면 그들의 생명을 항상 보존해 주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행복한 생활은 결코 마련해 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 이유는 내 임무들은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내 종들도 내 소원과 같은 소원, 즉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겠다는 소원밖에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운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말을 하지 말고, ‘인자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의향과 내 기쁨을 위하여 내 약함을 사라지게 하셨는데, 지금 나는 인자하신 그분이 내가 그렇게 되기를 허락하신 상태로, 즉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태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자 이제는 사랑 가득한 순종으로 계속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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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2. 3. 저녁.

 

사람도 살지 않고 초목도 없는 벌판이 보인다. 곡식을 가꾸는 밭은 없고, 흙이 좀 깊이가 있고 덜 메마른 곳에는 드문드문 난 몇 포기의 풀들만이 여기저기 덤불을 이루고 있다. 이 메마르고 황폐한 땅이 내 오른편에 있고, 북쪽이 내 등 뒤에 있으며 거친 땅이 남쪽으로 뻗어나갔다는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반면 내 왼쪽에는 제방이 아주 낮은 강이 보이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다. 물이 매우 천천히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하상이 가파르지 않고, 이 강은 평지가 함몰된 곳을 따라 흘러간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물의 흐름은 겨우 물이 고여서 늪을 이루는 것을 막기에나 충분할 정도이다. 물이 깊지도 않아서 바닥이 보인다. 깊이가 1미터, 기껏해야 1.5미터 이상도 될 것 같지 않다. 너비는 산 미니아또 엠뽈리(S. Miniato―Empoli) 근처의 아르노(Arno)강 정도로서 대충 20미터쯤 될 것 같다. 내 짐작은 정확하지 못한 편이다. 그럼에도 강기슭 가까이에 있는 물은 약간 초록색을 띤 하늘색이며 강기슭의 축축한 땅에는 초록색 풀무더기가 띠 모양으로 자라고 있어, 앞으로 한없이 계속되는 돌과 모래로 된 그 우중충한 벌판으로 피로한 눈을 달래 준다.

 

내가 무엇에 주의해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내가 말한 그 내적인 목소리는 내 앞에 보이는 것이 요르단 강 계곡이라고 알려 주었다. 내가 이것을 계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강이 흐르는 곳을 흔히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곡이라면 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근처에는 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계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요컨대 나는 요르단 강 근처에 있고, 내 오른쪽에 보이는 황량한 벌판은 유다의 사막이다.

 

사람이 살지 않고 인공물의 흔적이 없는 이곳을 가리키는 데 있어 사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옳겠지만, 사막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여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막의 모래언덕은 없고, 홍수 후의 충적토처럼 돌과 자갈이 널려 있는 그저 메마른 땅이 있을 뿐이다. 먼 곳에는 산들이 있다.

 

하지만 요르단 강 근처에는 큰 평화, 특별하고 예외적인 어떤 것이 있는데, 트라시메나(Trasimena) 호숫가에서 자주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다.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이나 천상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으로 충만한 장소처럼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내 영혼과 대화하는 곳에 내가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관찰하고 있는 동안 이곳에는 요르단 강의 우안을 끼고(내편에서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많은 남자들이 있고 옷도 가지각색이다. 술과 선으로 장식된 들의 옷을 보니 어떤 사람들은 서민층의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 어떤 사람들은 바리사이들 같다.

 

그들 가운데에 한 남자가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나는 그를 처음 보지만 단번에 그가 세례자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가 군중에게 말하고 있는데, 그의 설교는 결코 부드럽지 않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셨는데, 이 과격한 설교자를 나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세례자 요한은 벼락, 눈사태, 지진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그만큼 그는 연설과 몸짓이 과격하고 준엄하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선포하고, 모든 장애물을 뿌리 뽑고, 자기 생각을 바로잡아 오시는 메시아를 맞아들일 마음을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한다. 격렬하고 과격한 화법이다. 선구자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있어 예수와 같은 부드러운 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상처를 노출시키고 철저히 조사하여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의사이다.

 

내가 요한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그의 말은 복음사가들이 쓴 그 말이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는다. 그 말은 급류와 같이 쏟아져 나온다. 요르단 강변의 풀이 나고 그늘진 사면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이 나아가시는 것이 보인다. 이 시골길 아니 오솔길은 물이 얕아서 쉽게 건널 수 있는 지점으로 가기 위하여 여러 해, 여러 세기를 다닌 대상들과 여행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그 오솔길은 강 건너편으로 이어지다가 건너편 기슭의 초록빛 띠 속으로 사라진다.

 

예수는 혼자이신데, 천천히 걸어 앞으로 나아가 요한의 뒤에 다다르신다. 예수께서는 광야 속죄자의 우레 같은 목소리를 들으시면서 그분 자신도 세례를 받고 메시아의 오심에 대비하여 정화되려고 요한에게로 오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신 것처럼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신다. 예수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옷차림은 서민층 같으시나 몸가짐과 잘 생긴 외모는 귀족처럼 보이신다. 그러나 그분을 군중과 구별해 주는 어떤 신성한 표시는 없다.

 

그럼에도 요한은 그분으로부터 발산되는 특별한 영성(spirituality)을 느끼는 것 같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그 발산의 근원을 즉시 알아본다. 요한은 강단처럼 쓰던 바위에서 충동적으로 내려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어 나무줄기에 기대어 서 계시는 예수를 향하여 빨리 간다.

 

예수와 요한은 잠시 서로를 응시하신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다정한 파란 눈으로 보시고, 요한은 대단히 검고 반짝이는 엄격한 눈으로 바라본다. 가까이서 보니 두 분의 모습은 완전히 정반대다. 두 분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신데, 그것은 그분들의 유일한 같은 점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예수는 금발이고 긴 머리카락은 잘 빗겨져 있으며, 얼굴빛은 흰 상아색이며, 눈은 푸르고, 옷은 수수하지만 위엄이 있다. 요한은 털북숭이고, 검은 직모가 들쭉날쭉하게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성긴 검은 수염이 거의 얼굴 전체를 덮고 있고, 단식으로 인하여 뺨이 쑥 들어갔으며, 열띤 눈은 검고, 얼굴은 햇볕과 비바람으로 인하여 구릿빛으로 그을렸고 몸은 털로 덮였으며, 반라의 몸에 가죽 끈으로 허리에 졸라 맨 염소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옷은 그의 상체를 가리고 야윈 옆구리 아래까지만 겨우 내려오며, 오른쪽에는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데, 갈비뼈에 덮인 것이라고는 오직 바람에 그을어 구릿빛이 된 피부가 있을 뿐이다. 마주 서 있으니 두 분은 마치 야만인과 천사 같다.

 

요한은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예수를 찬찬히 살피고 나서 부르짖는다.


“여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께서는 조용히 대답하신다.


“회개의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요.”

“결코 안 됩니다. 주님, 제가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주님께로 가야 하는데, 주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요한의 머리에 한 손을 얹으시고 대답하신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그렇게 해서 모든 정의가 실현되고, 당신의 의식이 더 높은 신비의 시작이 되게 하고, ‘희생자’가 이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이 전해지게 하시오.”

 

요한은 눈물로 인하여 부드러워진 눈으로 예수를 응시한 다음 앞장서서 강둑을 향하여 간다. 예수께서는 겉옷과 무릎까지 내려오는 속옷을 벗으시고 일종의 반바지만을 입으신 채 요한이 앞서 들어가 있는 물로 내려가신다. 요한은 허리띠에 매달린 잔 같은 것으로 강물을 떠서 예수의 머리에 부어 세례를 준다. 그 잔 같은 것은 조개껍데기나 박을 반으로 쪼개서 속을 파내고 말린 것 같다.

 

예수는 참으로 어린양이시다. 그 하얀 피부색으로도, 태도의 겸손함으로도, 그 눈빛의 온유함으로도 어린양이시다.

 

예수께서 강둑으로 다시 올라오셔서 옷을 입으신 다음 기도와 묵상에 잠겨 계신 동안 요한은 그분을 군중에게 가리키며 그는 하느님의 성령이 구속주(Redeemer)라고 지목하는 틀릴 수 없는 표로 자기에게 알려 주셔서 그분을 알아보았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데 주의를 집중했기 때문에 강둑의 초록빛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빛나는 그 얼굴 밖에는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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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표시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미리 성화된 그의 영혼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이 가졌을 초자연적인 지성의 통찰(penetration of supernatural intelligence)을 가지고 있었다. 아담의 죄가 없었더라면 모든 사람이 이 초자연적인 지성을 가졌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은혜와 무죄성과 창조주에 대한 충성을 보존하였더라면 그는 외적인 시각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았을 것이다. 창세기에는 주 하느님께서 죄 없는 사람과 친숙하게 말씀하셨고, 사람은 그 목소리를 듣고 기절하지 않았으며, 그 목소리를 혼동 없이 식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이해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이 하느님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어 그는 감히 하느님을 쳐다보지 못하게 되었고, 하느님을 보고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점점 더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내 종형 요한은 전에는 불임의 여인이었다가 임신하게 된 엘리사벳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the Full of Grace, 성모 마리아-역주)이 사랑으로 껴안았을 때 정화되었다. 아기는 태중에서 마치 상처가 나을 때에 딱지가 떨어지듯 죄의 딱지가 자기의 영혼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기뻐 뛰었다.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만드셨던 성령께서는 사람이 된 구원을 담은 살아 있는 성막(the Living Tabernacle of Incarnate Salvation))이었던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나려는 그 아기를 위한 구원사업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그 아기는 혈연관계로만이 아니라 사명으로도 나와 결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말하는 입술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복음과 순교에 있어 선구자였고, 나는 하느님으로서의 완전성으로 요한이 시작한 복음과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당한 그의 순교를 완전하게 하였다.

 

요한에게는 아무런 표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어둠으로 인하여 표시가 필요하였다. 이해가 느리고 둔한 사람들의 눈과 귀에 분명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닌 어디에 요한이 자기의 주장의 근거를 둘 수 있었겠느냐?

 

나는 세례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주님의 지혜는 우리 만남의 순간과 방식을 선택하셨다. 요한을 그가 거하던 동굴에서 광야로 나오게 하시고 나를 집에서 나오게 하셔서 그 순간에 우리를 결합시키신 다음 내 위에 하늘이 열리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사람 위에 당신 자신인 하느님의 비둘기를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시고, 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선언이 하늘에서 내려와 들리게 하신 것이다. 그 선언은 천사의 목소리보다 더 강력했는데, 그것은 내 아버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야 할지 따르지 말아야 할지 변명하거나 의심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공현(the manifestation of Christ)은 무수히 많았다. 탄생 후 첫 번째 표시는 동방박사들의 표시였고, 두 번째는 성전에서였으며, 세 번째는 요르단 강변에서였다. 그 다음에는 무수한 다른 표시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너에게 알려주겠다. 내 기적들은 내 부활과 승천 같은 맨 마지막 기적에 이르기까지 내 천주성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내 조국은 내 공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동서남북 사방에 뿌린 씨와 같이 그것들은 모든 계층과 장소에서 일어났었다. 목자들에게 권력자들에게 학자들과 쉽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사제들과 지배자들과 어린이들과 군인들과 히브리인들과 이교도들에게 말이다.

 

내 공현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만, 그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은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은 현재의 공현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것들은 잊어버린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하여, 너희를 나에 대한 믿음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똑같은 일을 되풀이한다.

 

마리아야, 네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에게 복음서를 보여 줌으로써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이것은 사람들을 나에게로 데려오기 위한 더 강력한 시도이다. 너는 열렬한 기도로 사람들을 내게로 데려오기를 갈망하였다. 나는 이제 말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말은 사람들을 피로하게 하고 멀어지게 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쩌겠느냐? 그래서 나는 내 복음서의 환시들을 포함하여 환시들을 사용할 것이고, 그것들을 더 매력 있게 하고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설명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는 환시를 보는 위안을 주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를 알기를 원할 가능성을 준다. 만일 이번에도 이 환시가 소용이 없고, 그들이 무정한 어린이들처럼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물리친다면, 너에게는 내 선물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내 분개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오래 전의 꾸지람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었는데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통곡했는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회개의 가망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자꾸 모아 놓도록 내버려두고, 목자를 알려고 애쓰는 어린양들 쪽을 향하자. 목자는 나이고, 너는 양들을 나에게로 데려오는 목자의 지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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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 보시는 바와 같이 저는 서둘러서 이 상세한 점들을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것들이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았었는데, 신부님은 그것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저는 오늘 적어 놓은 것을 읽다가 신부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문장에 주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신부님은 제 독특한 문체로 인하여 묘사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저는 그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스승님께서 이 공책의 최근 받아쓰기에서 불러 주신 것과 반대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네가 더 주의를 기울이고 더 정확하면(제가 보는 것에 대한 묘사가 말이지요) 그럴수록 나에게 오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질 것이다.”

 

이것은 묘사들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들로 인해 많은 영혼이 예수께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점에 대해 신부님의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신부님께 맡겨 드리니 가장 좋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저에 관한 한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니 인간적으로는 저도 신부님과 같은 의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변자의 인간적인 면까지도 사라져야 합니다. 오늘 불러 주신 것에서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복음서를 보여 줌으로써 나는 사람들을 나에게로 끌어오기 위한 더 강력한 시도를 한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말만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환시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더 매력 있게 하고,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나 저는 미천한 사람이고 또 저 자신으로서는 즉시 움츠러들기 때문에, 신부님의 의견을 듣고 불안에 빠졌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반대로 시기하는 자(the Envious One)는 기뻐합니다. 제가 어느 정도까지 불안에 빠졌느냐 하면, 더 이상 환시는 묘사하지 않고, 불러주시는 것만 쓰겠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마귀는 제 귀에 속삭입니다.

 

“너도 알겠지? 그 유명한 네 환상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너를 미친년으로 취급받게 하는 데나 소용될 뿐이다. 사실 너는 미쳤다. 네가 보는 것이 무엇이냐? 혼란스러운 네 마음의 속임수들이다. 하늘을 볼 자격을 얻으려면 훨씬 더한 것이 필요하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집요한 유혹으로 저를 고문했습니다. 크나큰 육체의 고통도 제가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이것만큼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마귀는 저를 절망으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이번 금요일은 저에게는 영적인 유혹의 금요일입니다. 저는 광야에 계신 예수님, 겟세마니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교활한 마귀가 웃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마귀와 또 제 안에 있는 덜 영적인 것과 싸우면서 오늘 제 기쁨을 신부님께 편지로 알려드립니다. 동시에 저로서는 제 가장 큰 기쁨인 이 환시의 은혜를 예수께서 거두어 가시면 매우 기쁘리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사랑과 자비를 계속 베풀어 주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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