亡父歌, 하늘을 뚫고 퍼붓는 빗속으로 그렇게 가셨습니다.

김양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9/08 [12:14]

亡父歌, 하늘을 뚫고 퍼붓는 빗속으로 그렇게 가셨습니다.

김양수 칼럼니스트 | 입력 : 2018/09/08 [12:14]

[신문고뉴스] 편집부 = 이 칼럼은 최근 부친을 여위신 본보 칼럼니스트 김양수 내과원장의 절절한 '亡父歌'입니다. 본인의 허락에 의해 전문 그대로를 싣습니다. [편집자 註]

 

亡 父 歌, / 김양수 칼럼니스트

 

아버지께서는 이승과의 인연을 천천히 끊어가셨습니다. 팔십 평생 희로애락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지워가며 의식을 비우셨고, 의식이 비워진 만큼 바닷가 모래성처럼 육신도 스러져갔습니다.

 

저는 형제 중 막내였지만 의사라는 직업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결정은 온전히 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되풀이 되던 입원과 퇴원, 그럴 때 마다 조금씩 시들어가는 생명의 기운. 제가 감당할 수도 없고, 감당해서도 안 되는 결정들 속에서 저의 뇌리 속에는 이게 과연 최선일까?’라는 한마디만 수없이 맴돌았습니다.

 

 

▲ 이미지속 인물은 본문과 관계가 없습니다.     © 편집부

 

아버지는 서른네 살 나이에 막내인 저를 얻으셨습니다. 60년대로 치자면 늦둥이였지요. 이미 아들 둘이 있음에도 굳이 저를 낳으신 이유는 손녀를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바람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뜻을 거스른 셈인데 그래도 늦둥이 막내인 저를 아버지는 유난히 귀여워하셨습니다. 첫돌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를 안고 계신 아버지를 보고 어떤 사람이 아이가 참 이쁘다고 말을 건넸더니 아버지께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 아빠가 된 이후에도 아버지에게 있어 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형들과는 다르게 저를 키우셨습니다. 사내아이라면 응당 배워야할 야구 축구 같은 운동도 혹시나 다칠까봐 못하게 하셨고, 자전거 타기도 위험하다며 가르쳐 주지 않아 제가 자전거를 배운 시기는 남들보다 한참 늦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형들은 수영을 잘했는데 멘토는 아버지셨습니다. 아버지의 수영 강습은 한마디로 스파르타식이었습니다. 기본 동작을 가르쳐 준 후 깊은 물에 던져놓고 알아서 아버지 쪽으로 헤엄쳐 나오게 하는 식이었죠.

 

형들처럼 아버지는 제게 수영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잔꾀가 발동한 저는 깊은 물에서 자꾸만 뒷걸음치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맥주병이 되었습니다. 형들과 달리 아버지는 저를 야단치지 않으셨고 제 수영 강습은 그냥 끝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우리 집은 가난하진 않았지만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저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내셨습니다. 그 시절 등록금은 봉투에 담아 선생님께 직접 전달하곤 했는데 봉투에 적힌 금액들은 어린 제가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는 이렇게 비싸게 학교를 다녀도 되냐고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면서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담배 값을 모아 등록금을 내면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곱셈을 모르던 저에게 아버지께서 종이에 복잡하게 계산을 하시며 아무 문제없다는 결과를 보여주셨는데 그 결과가 참인지 거짓인지 지금도 저는 알지 못합니다.

 

20세기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제 아버지도 살가운 애정표현에 익숙하진 않으셨습니다. 저 또한 아버지와 어떻게 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이를 먹어가며 아빠와 귀여운 막내 사이에는 시나브로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장벽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겐 간섭 받는다는 기억도 없었고, 시시콜콜 어떤 가르침을 주신 적도 거의 없으셨습니다. 대신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제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과 자신감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는 무언의 암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를 앓으면서 저 또한 다른 친구들처럼 살짝 반항도 하고 어긋나 보기도 했지만 송두리째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은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저의 입시 관리자를 자청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사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치른 모의고사와 학교 시험 때마다 결과를 철저히 분석해서 목표로 한 대학을 가려면 어느 과목에서 몇 점을 더 받아야 한다는 세밀한 조언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저는 학력고사에서 과연 몇 점을 받을지 몰랐지만 아버지께서는 저의 학력고사 최종 점수를 단 1점의 오차로 예측해 내셨습니다. 지금도 모의고사 성적표와 석차표와 씨름하며 이런 저런 계산에 여념이 없으셨던 아버지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안 3대를 통틀어 최고 학벌의 주인공이셨으며, 엘리트 공무원으로서 20년 넘는 세월 화려한 공직을 역임하셨습니다. 장남으로서 우리 가족뿐 아니라 가문의 기둥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셨고, 자기 관리에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로맨틱하게 이어가셨던 낭만가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년은 평온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의 질곡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공직을 떠나신 아버지께서는 사업가로 변신하셨지만 치부(致富)는 아버지의 영역은 아니었었나 봅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아버지는 재기를 위해 고군분투하셨지만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육신보다 정신이 훨씬 더 빨리 쇠락하게 된 이유 또한 짧지 않은 세월 아버지께서 겪으셨을 회한과 좌절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아버지께 전혀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속마음과 달리 쌓여간 어색함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시지 않아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존경한다는, 힘내시라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고 시쳇말로 전문직이면서도 고소득과는 거리가 멀어 아버지의 재기를 위한 작은 발판조차 마련해 드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치매의 징후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저에게 앞섰던 것은 아버지는 아니실 거야.’ 라는 현실부정이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은 최악의 예감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저는 최선일 것이라는 확신이 전혀 서지 않은 결정의 결과들로 인해 조금씩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처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아버지를 생각하면 납골묘에 모셔진 유골함이 떠오릅니다.

 

제는 밥을 먹지 못해도 걱정할 일이 없고, 욕창의 처절한 아픔도 없을 것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도 못 알아보시는 초점 잃은 눈망울이 나를 서럽게 하지도 않겠지만, 그렇게 영원한 안식을 얻으신 아버지께서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지 알 도리가 없어 오늘도 병실의 암울한 기억들이 차라리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 나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큰 형, 작은 형,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었습니다. 가장이 되어 나의 가정을 꾸린지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가장으로서 짊어져야할 고된 일상은 시도 때도 없이 천진난만한 막내였던 시절의 포근함을 애타게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를 여읜 지금, 이제 남은 생에서 제가 아버지의 막동이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요. 다섯 가족의 행복했던 시절 또한 그저 흐려져 가는 기억 속 에서 잊혀진 전설이 되겠지요.

 

아버지께서는 샹송 눈이 나리네를 즐겨 부르곤 하셨습니다. 이승 너머 무슨 급한 일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첫 눈이 내리는 날 대신 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붓는 날에 피안의 저 편으로 떠나셨습니다. 아버지로 인해 내가 간직할 수 있었던 나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도 사라져 버리고, 아비 잃은 저는 그렇고 그런 존재가 되어 이제 하루하루 늙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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