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표 물병 세례는 진보 진영 최악의 선택

[편집위원장 칼럼] 진정성과 편가르기...1991년 성대 앞과 2019년 송정역, 극단은 감성을 이기지 못해

임두만 | 기사입력 2019/05/03 [19:40]

황교안 대표 물병 세례는 진보 진영 최악의 선택

[편집위원장 칼럼] 진정성과 편가르기...1991년 성대 앞과 2019년 송정역, 극단은 감성을 이기지 못해

임두만 | 입력 : 2019/05/03 [19:40]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광주방문 상황 sbs 현장 중계화면 갈무리     © 편집부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1991년은 슬픈 해이다. 민주화를 쟁취했는데도 노동자들과 시민사회, 그리고 대학생들의 반발은 강렬했다. 87항쟁의 성공으로 직선제는 쟁취했지만 정권은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잡았다. 이듬해 88년 총선에서 국민들이 다시 여소야대를 만들어줬으나 2년 후 김영삼 김종필은 노태우와 3당합당으로 민중항쟁의 진의를 왜곡시켰다.

 

이에 시민사회와 노동계, 대학생들을 비롯한 열혈 운동권은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 반대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그 기세는 1991년 들어 절정에 달했다.

 

시위는 격렬했으며 경찰의 진압도 격렬했다. 무수한 최루탄과 진압봉을 든 백골단은 길거리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무력진압한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불길한 기운을 이야기했다.

 

그 불길한 기운은 맞아 들어갔다.

 

1991426.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당시 시위로 구금된 명지대 총학생회장을 구출한다며 명지대생들이 학원자주화 완전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가다 생긴 일이다.

 

사흘 후 29일 전남대 박승희, 51일 안동대 김영균 씨가 분신 사망했다. 53일 경원대 천세용 씨가 분신 후 투신하여 사망했다. 그 상황에서 55,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로 젊은이들의 분신을 지탄했으나 5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분신했다. 검찰은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며 잡아 가두고 친 여권 언론은 운동권의 도덕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다시 10일 전남대에서 윤용하 씨가 분신했다. 이어 18일 명지대생 故 강경대 씨 노제 영결식 도중 연세대 굴다리 위 철길에서 이정순 씨가 분신했고, 전남 보성에서 고교생 김철수 군이 ‘5.18 11돌 추모행사중에 분신했다. 5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정상순 씨가 분신했다.

 

가히 분신과 투신 등 젊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가면서 대학생도 운동권도 경찰도 더는 물러서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 525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3차 국민대회거리 시위 중 성균관대 김귀정 씨가 백골단을 피하려다 시위대와 함께 퇴계로 3가 대한극장 건너편으로 향했고 막다른 골목에서 최루탄 세례와 무차별 구타 속에 압박 질식 사망했다. 시신은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성균관대 학생들은 물론 시민사회 단체가 백병원 영안실을 지켰다.

 

하지만 경찰은 부검을 이유로 김 씨 시신을 탈취하려 했으며, 이로 인해 운동권은 더 결집했다. 이로써 김 씨 시신을 두고 경찰과 운동권이 백병원에서 대치하기를 무려 19, 이 기간 경찰은 계속해서 시신탈취를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시신 전쟁에서 승리한 시민사회는 김 씨의 장례식을 '민주장'으로 정했다.

 

이윽고 612, 김 씨의 장례식, 하지만 이 장례식은 원활하지 않았다. 백병원을 출발한 김 씨의 시신이 장례식이 치러질 성균관대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뜻하지 않게 성균관 유림들이 유생 차림으로 교문을 막고 나섰다. 이유는 "성균관에는 정몽주·퇴계 선생 등 성현 3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 장례 때도 시신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 故 김귀정 씨 운구 당시 성균균 유림들 앞에 무릎을 꿇은 학생들. 사진 : 김귀정 추모사업회    

 


그러면서 유림들은 학내로의 시신운구를 결사 저지했다. 비는 추적추적 내렸고 늦은 오후여서 땅거미까지 지고 있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길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은 채 맨살을 아스팔트에 드러내놓고 애원했다.

 

"귀정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간청에 유림들은 정문은 안 된다면서도 슬그머니 기세를 누그려뜨려 운구 행렬은 정문을 피해 도서관 옆문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성균관대 금잔디광장에서 장례식은 치러졌다.

 

이후 이 장례행렬은 성대를 출발, 파고다공원 앞에서 1차 노제, 대한극장 앞에서 2차 노제를 치른 뒤 모교인 무학여고 앞을 거쳐 밤 늦게 모란공원에 묻힐 수 있었다.

 

이 과정이 스팩타클하다.

 

최루탄과 쇠파이프에 맞서던 운동권 학생들, 이들의 밤낮 없는 시위로 장사를 못해 울쌍이던 상인들...양 측은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미묘한 갈등관계가 있던 사이다. 그런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늦은 오후 학생들이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더 나아가 상복으로 검은 색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빗속에 무릎을 꿇었다. 유림들은 요지부동이고 학생들은 처연했다. 이 때 나선 것이 주변 상인들...

 

이 상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유생들의 양보를 요구했다. 결국 유생들이 누그러진 것은 학생들의 읍소와 상인들의 동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감성이 극단을 이긴 사례다.

 

만약 이런 상황이 지금 벌어졌으면 어떨까?

 

학생들은 힘으로 유생들을 밀어붙였을 것 같다. 적폐세력에 동조하는 꼴통 보수 운운하고, 퇴치만이 살 길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인들이 학생들 편을 들었을까? 애초 운동권들의 시위로 감정이 좋지 않은데 이 사태는 더욱 에스컬레이트되어 운동권과 상인들의 괴리감만 넓혔을 것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그렇다면 왜 당시 앞서 언급한대로 그렇게 강경하던 운동권이 읍소작전을 작전을 해야만 했을까? 이는 다분히 김귀정 사인과 시신을 두고 경찰과 운동권이 대립하던 시기 정원식 계란 밀가루 테러사건이 터져, 운동권이 민심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4월부터 5월, 무수한 젊은이들 주검이 전 국민을 날이 시퍼렇게 선 장검 같은 날카로움 속에 있게 했다. 노태우 정부는 더는 버티기 힘들어 총리부터 바꾸는 개각으로 분위기 쇄신을 노렸다. 하여 김귀정 사건이 나기 하루 전인 24일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정원식 외대 교수를 총리서리로 임명하는 개각을 했다.

 

▲ 당시 상황이 보도된 동아일보 기사...자료 기사 캡쳐     © 임두만

 

63, 고별강의를 위해 외대를 방문한 정원식 총리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 달걀 세례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들은 대서특필했으며 TV에는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 쓴 총리서리의 모습이 여과없이 방송됐다. 학생들은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노태우 정권은 이를 국면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버리라는 충고에 보수진영은 동조했으며 이에 힘을 받은 보수언론은 물만난 고기마냥 대대적으로 전대협패륜아로 매도했다. 이로써 김지하가 원했던 굿판도 거둬지고 노동자들 파업기세도 학생들 가투기세도, 운동권의 노태우 정권 비판도 힘을 잃었다.

 

정권은 파업현장에 경찰을 투입하고 운동권 지도부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등 공안정국을 만들었다. 외대를 기준으로 운동권 지도부를 무려 300여 명이나 잡아들여 구속했다. 극단이 버틸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1991년 5월의 봄날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해 620일 치러진 전국 광역의원 선거는 민자당이  압승했다. 거의 정원식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민자당은 전국 광역의원 564석을 휩쓸었다. 김대중의 신민주 연합당 165, 이기택의 꼬마민주당은 21, 그 와중에 무소속이 115명 당선되는 등의 지형을 만들어 냈다.

 

201953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광주에서 물세례를 받았다는 취재기자의 보고와 함께 사진들이 올라왔다. 이를 보면서 언뜻 정원식 사례가 연상되었다. 지금 황교안이 야당 대표이기 때문에 정권이 공안통치로 전환할 것이라는 우려는 없다. 하지만 모 언론의 기사 제목에서 보듯 경부선에서 '고무된' 한국당, 호남선에선 '문전박대'” 상황은 자유한국당이 오매불망 노리던 상황이다.

 

▲ 보수언론은 이런 사진을 절대로 쓰지 않을 것...     © ytn 뉴스화면 갈무리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일보는 마치 황 대표가 테라라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진을 써서 인터넷판 기사를 송고했다. 황 대표와 자유한국당에 어떤 방식이면 도움이 될 것인지를 잘 아는 언론플레이다, 그리고 지금 전 언론의 인터넷판은 물론 모든 방송의 저녁 종합뉴스도 탑을 장식할 것이다.

 

그래서다. 이미 대중운동의 답은 나와 있다.

 

촛불이 성공한 것은 대중의 당시 심리가 박근혜 정권을 무능하고 부도덕하며 퇴출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암묵적 합의는 이명박의 4자방 실정, 편가르기에 이은 박근혜의 편가르기에다 세월호와 이화여대 부정입학은 물론 권력이 비선에서 움직였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이에 이 암묵적 합의는 촛불 100만으로 나타났다. 이 민심에 대통령 권력도 국회 권력도 헌재 권력도 견딜 수 없었다. 즉 대통령-행정권력, 국회-입법권력, 헌재-사법권력 등 3권 모두가 국민적 여망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말이다. 민심의 물결은 터지면 이처럼 무섭다.

 

지금 감히 추정하건데 문재인 정권에 대한 민심이 극을 향해 달리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정치 경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임계점이 가깝다는 것은 편가르기가 극심해지는 것이 징조로 나타난다. 이를 자유한국당은 노리고 있으며 그 인계철선을 이번에 황교안은 광주방문으로 건드렸다.

 

따라서 그에게 생수세례를 퍼부은 세력은 어쩌면 황교안과 자유한국당이 가징 바라는 일을 해준 세력일 수 있다. 결국 또 다시 음모를 직전으로 삼는 세력에게 키를 넘겨주는 우를 범한 것이다.

 

나는 앞서 1991년 김귀정 장례식을 길게 묘사했다. 그리고 외대 정원식 사건을 덧붙였다. 감성과 극단의 사례가 가져 온 결과가 어떠한지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정권과 그 지지자들, 그리고 좋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극단의 심리에서 벗어나 감성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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