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 ‘환도산성’ 百 ‘공산성’...다른 듯한 닮음에 고개를 ‘끄덕’

추광규 기자 | 기사입력 2019/12/07 [08:54]

高 ‘환도산성’ 百 ‘공산성’...다른 듯한 닮음에 고개를 ‘끄덕’

추광규 기자 | 입력 : 2019/12/07 [08:54]

 

산과 하천 등 천연 지리를 활용해 방어에 유리한 곳에 세우는 ‘산성’은 외침이 있을 경우 적과 맞서 싸우는 핵심 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 산성인 ‘환도산성’과 백제 시대의 대표적 산성인 ‘공산성’ 두 곳 모두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은 11월 7일 1박 2일 일정으로 또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환구산성’은 11월 28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찾았습니다.

 

두 산성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환도산성은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상징합니다.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 도읍인 국내성의 배후산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해 공산성은 백제의 쇠락기를 상징합니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세워진 왕성이라는 슬픈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안시에 있는 환도산성 성곽입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 만주 벌판에 거칠고 투박한 기세로 세워진 ‘환도산성’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ㆍ예술ㆍ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 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하는 단안을 내렸다. (단재 조선상고사 1편 총론)


조선상고사 총론에 나오는 '집안현' 즉 현재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는 고구려의 도읍지인 국내성이 자리하면서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장수왕릉(장군총)'여기에  '환도산성(산성자산성)등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있는 곳 입니다.

 

환도산성은 서기 2년인 유리왕 21년에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전시에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으로 광개토대왕비에서 약 8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입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광개토대왕비는 비각안에서 보호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유리감옥에 갇혀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현지에서 바라본 관리 상태는 휼륭했다는 점에서 그 같은 지적은 억측이라고 보여집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유적지에서 환도산성으로 가는 중간에는 무용총 벽화로 유명한 ‘우산 귀족 묘지’를 지나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공개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유적보호를 위해 문을 닫았다고 했습니다. 고구려 무사의 호쾌한 기상을 잘 표현한 무용총 벽화는 어둠속에서 세월의 무게를 더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환도산성으로 가는 길은 강원도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나 있는 길을 지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산의 수목들도 너무나도 친숙한 소나무와 참나무들입니다. 북한 자강도 만포시와 불과 몇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뿐더러 압록강 수백 미터 물길을 건너면 닿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합니다.

 

▲ 광개토대왕릉입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광대토대왕릉 석실입니다. 이 석판위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이 놓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환도산성은 마치 삼태기처럼 생겼습니다. 동쪽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빙 둘러서 험준한 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남쪽에 나있는 좁은 입구가 전부입니다. 남쪽 또한 압록강 지류인 통구하가 흘러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환도산성은 우리 일행이 이날 오전에 둘러본 광개토대왕비는 물론 장수왕릉 등과 같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돼 1982년부터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장군총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장수왕릉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중국에서 문물보호단위는 국가급, 성급, 현급의 세 단계가 있고, 특히 국가 급의 것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하고 있는데 1271건이 나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 집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 가운데 4곳이나 국가 급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고 했으니 중국 당국도 그 역사적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이 때문에 환도산성은 중국 당국에 의해 잘 관리되고 보전되고 있는 듯 했지만 아쉬운 점은 남아 있는 유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성 안에는 ‘수졸거주지’ ‘연지유적’ 그리고 남북길이 92m 동서 폭이 62m 정도의 ‘궁궐터’ 정도가 발굴 보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환도산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지 않고 마치 현대식 건물을 세워 놓은 것처럼 복원을 해놓아 안타깝기 까지 했습니다. 이는 우리 문화재청이 익산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해서 복원하는 과정에서 작은 돌조각에도 번호를 매기고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조심스럽게 복원작업을 진행 하고 있는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쉬움 속에서도 험준한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지고 있는 성곽의 모습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만주 벌판을 거침없이 질주하던 고구려 무사가 뜨겁게 토해내는 거친 숨결을 떠올리게 합니다. 삭풍을 맞으면서 고구려 병사들이 서 있었을 수졸자리에서는 그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수졸자리가 있는 곳을 알리고 있습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환도산성 알림표지와 성곽의 모습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한편 환도산성에 대해 중국 당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환도산성은 고구려 초기와 중기의 유명한 성터중의 하나이다. 국내성의 군사 수비성으로 세워진 환도산성은 고구려 시대 두 번이나 수도로 정해져 있어 고구려의 역사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환도산성은 평면으로 볼 때 불규칙적이고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삼태기’를 방불케 한다. 둘레는 6947m이다. 성벽의 구조는 자연 지리 환경을 충분히 활용하여 산성으로서의 건축적 특징을 살리고 있다.

 

환도산성은 주변의 산을 보호벽으로 곡구를 대문으로 산 중턱을 궁으로 하여 중국 전통의 ‘풍수지리설’의 이념을 충분히 살렸다. 산성의 방어는 견고하고 성내의 공간은 넓으며 자연이 아름다워 인류의 창의성과 자연과의 완벽한 융합을 자랑하고 있다.”


◆ 완만한 곡선이 위태롭게 보였던 웅진백제시기 마지막 보루 ‘공산성’ 

 

근개루왕이 그의 말을 달게 여겨 전국의 남녀를 전부 징발하여 벽돌을 구워 둘레 수십 리나 되는 왕성(王城)을 높이 쌓고 성 안에는 하늘에 닿을 듯 한 대궐을 짓고 욱리하(郁里河) 지금의 양성(陽城) 한래 가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대석관(大石棺)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고 큰 왕릉을 만 틀어서 묻고, 왕성의 동쪽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쌓아 어떠한 장마에도 물의 재난이 없도록 하였다.

 

이 같은 공사를 치르고 나니 국고가 탕진되고 군자(軍資)도 모자라고 백성들의 힘도 쇠잔해지니,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나라 형세가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았다. 이에 도림이 성공한 줄을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조선상고사 제8편 中)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제8편에서는 백제 21대 근개루왕(개로왕)이 장수왕의 음모에 빠져 도성을 호화롭게 세우다 한강유역을 빼앗기는 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公山城)은 바로 이 근개루왕의 아들인 백제 22대 문주왕이 한성 유역을 빼앗긴 후 남하 해 도읍으로 건설한 방어성이자 왕성입니다.

 

공주시에는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는 2개의 유적을 품고 있는데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입니다. 이들 유적은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 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백제 역사와 문화의 특출한 증거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 받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선대 근개루왕이 호화로운 궁성을 쌓다가 패망에 이른 교훈 때문인지 아들 문주왕이 세운 공산성은 대체적으로 소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강성했던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면서도 찬란한 백제 문화를 일궜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공산성의 부드러운 성곽의 곡선이 눈길을 끕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실제 토성으로 쌓았다는 공산성은 문주왕이 자신의 재위 원년(475년)에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 16년(538년)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고구려에 맞서 왕도를 지켜냈는데 성곽의 크기가 환도산성의 절반도 안 되는 2.6km에 불과 할 정도로 작은 성입니다.

 

아담하다 할 정도로 작은 성이기에 붉은 피가 피어나는 전쟁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오히려 성곽의 능선을 바라보면 부드러운 부처님의 미소가 떠오르는게 환도산성의 거친 이미지와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이와 함께 우리 문화재 당국은 ▲추정 왕궁지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임류각 ▲명국삼장비 ▲광복루 ▲연지 및 만하루 ▲영은사 등을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복원 또는 유지하면서 현대적 색채마저 띄고 있는 환도산성 유물 관리도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공산성 성곽 길을 따라 걷노라니 북쪽에서 쳐들어올 고구려 기마병의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백제 병사의 긴장된 눈초리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또 고구려의 환도산성이 험준한 산등성이를 따라 성곽을 쌓은데 반해 공산성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격적인 고구려인의 기상과 상대적으로 방어적인 백제인의 기질이 비교되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장수왕을 굉장히 야비하다고 평가하듯이 두 산성을 비교하자니 드세고 욕심많은 놀부와 순박하고 마음씨 여린 흥부가 비교되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기질과 성격이 다르다지만 그들은 한배에서 나오면서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환도산성과 백제의 공산성이 그 기세와 분위기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많이 닮아 있다는 점에서 그 원류는 하나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환도산성의 거칠고 억센 모습과는 달리 공산성은 부드러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사진 = 인터넷언론인연대

 

 

한편 공산성에 대해 공주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성은 웅진백제시기(475~538)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인해 문주왕 원년(475)에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16년(538)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 까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이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성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성이다. 성의 길이는 총 2,600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