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 칼럼] 누가 ‘멸공(滅共)’을 함부로 이야기하나?

송필경 원장 | 기사입력 2022/01/16 [01:13]

[송필경 칼럼] 누가 ‘멸공(滅共)’을 함부로 이야기하나?

송필경 원장 | 입력 : 2022/01/16 [01:13]

[신문고뉴스] 송필경 칼럼 = 지금 권력 교체기에서 ‘멸공’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막강한 보수 기득권의 인식에 내 마음이 몹시 두렵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이나 여성 그리고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을 금기시하고 있다. 차즘 그러한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낡은 이데올로기 2분법으로 남북관계나 국제관계를 재단하는 비하 발언을 규제할 지침(가이드라인)이 없는 게 안타깝다. 

 

아직 우리사회는 “관용하지 않는 사상만은 관용하지 않는” <상식>을 확립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다.

‘멸공’은 사상의 자유를 관용하지 않는 불관용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멸공’은 남북과 국제관계에 파탄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금지해야 할 대표적 표현이다.

 

‘멸공’ 인식은 스스로 정신적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자기표현이기 때문에 말하는 자의 정신위생을 위해서도 금지해야 한다. ‘멸공’은 맹목적인 증오이기 때문에 사회적 분노조절 장애로 변하면 심각한 사회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다음은 레바논계 미국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의 말이다.

 

“미국(서양)의 정신을 우리가 포용하면 친구가 되지만 그것에 사로잡히면 적이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향해 마음을 열면 친구가 되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굴복하면 적이 됩니다. 미국(서양)의 정신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취하면 친구가 되지만 그것이 우리를 길들이게 놔두면 적이 됩니다.”

 

국제 관계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상대방이 선악이라는 어떤 객관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세에 따라 상대방이 적일 수도 있고 우방일 수도 있다.

 

주관적 의지(마음)에 따라 우리가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우방으로 만들기도 한다. 외교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영원한 적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불교 용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이런 의미에서 적절한 표현이리라.

 

우리가 당당하다면 어떤 나라도 우방으로 만들 수 있고, 상대방의 힘에 눌려 우리가 비굴해지면 진짜 적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노예근성이라고 나는 본다.

 

국제관계에서 보수 기득권이 말하는 ‘멸공’의 주요한 대상은 중국이다. 멸공의 대척점은 ‘숭미(崇美)’다. 

‘숭미’에 사로잡히고, 굴복하고, 길들여지면 ‘멸공’이 된다. 이 극단적인 인식 구조는 20세기 냉전의 유치한 산물이고, 21세기가 지향하는 실사구시적인 국가 이익을 해치게 한다.

 

무엇보다도 ‘멸공’을 우리민족인 북한을 겨냥한다면, 또 겨냥할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으니, 그러한 막강한 보수 권력의 증오 본능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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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힘 있는 권력자 생각의 한 단면이 민족의 앞날에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권력자의 디테일 속에 멸공이란 악마가 숨어 있다면?

 

지나고 보니 노무현 통치나 이명박 통치나 내 현실 삶에는 그리 큰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이명박이 보인 악마적인 이기심은 상식적인 시민의 정신에 큰 상처를 주었으리라.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대장동 게이트니 후보 부인의 구설수에 왈가불가하며 서로 피장파장이라는 데에는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초적 언론에만 취해서 남북관계를 도외시하는 장삼이사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진보적인 실천운동을 해왔고, 진보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조선일보류 언론에 부화뇌동해서 조국 사태니 대장동 게이트를 들먹이며 이번 양대 후보를 피장파장이라 강력히 비난 데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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