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는 날의 단상..'거지 할머니가 사는법'

[살며 사랑하며] 어떤 할머니의 동냥법을 보며

김기준 | 기사입력 2010/02/26 [05:55]

봄비 내리는 날의 단상..'거지 할머니가 사는법'

[살며 사랑하며] 어떤 할머니의 동냥법을 보며

김기준 | 입력 : 2010/02/26 [05:55]
사무실 가까운 곳에 버스 승강장이 있다.그 승강장 좌우로 벤치가 놓여있는데 사람들이  쉬어가기에 알맞은 곳이다. 나는 그곳을 점심식사를 위해,혹은 은행일을 보기 위해 가끔 지나다닌다.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 있는데 그곳에 한 할머니가 앉아서 행인들에게 동냥하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분을 하나님이 보낸 천사라면 나는 오늘 땡 잡은 거다.'
 
호주머니에서 만원권 지폐를 들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순간 망설였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영화관엘 갔다. 영화 한편이 끝나고 방송이 흘러 나왔다.

행운권 추첨을 하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몇 사람이 당첨됐는데 나도 거기에 끼었다.알겠지만 돈을 더 내고 당첨 선물을 받았다.
 
'신상품 카메라'였다. 며칠 뒤 그걸 사용할 기회가 있었다.형이 결혼을 하는데 카메라가 필요했다.

내가 자신있게 나섰다. 신랑측 카메라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날 이후로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쥐구멍을 찾는다.카메라? 불량품이었다.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 다녀오던 길이었다. 버스에서 마악 내려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말쑥한 차림의 청년이 다가왔다.
 
"참,부끄러운 일인데~제가 소매치기를 당해서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있어예! 차비를 빌려주시면 꼭 갚을끼라예!"
 
경상도 말씨를 쓰는 그 사람은 정말로 쑥쓰러워했다.나는 전라도 사람이지만 경상도 말투를 좋아한다.특히, 경상도 여성의 말투는 감칠맛 그 이상이다.
 
"식사는 하셨는가요?"
"아니라예, 아직"

 
나는 그날 버스비와 점심 식사비를 그 청년에게 주고, 건네준 계좌번호에 돈이 입금되기를 기다렸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계좌에는 아직 입금 소식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자신은 일제때 소학교 영어 교사였는데 서울에서 자식집에 살다가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어투에서는 교사 냄새가 묻어났다.
 
"경찰에 알려서 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창피해요. 차비가 모여지면 혼자 찾아갈 거예요."

 
식사는 하셨느냐고 묻자 몇끼를 굶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직은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는데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배후에 폭력조직이 있다는 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으로 눌러버렸다. 만원권 한장을 통째 드렸다. 할머니는 몇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할머니가 며칠 보이지 않길래 정말로 서울에 가셨나 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후에 그 자리에 다시 앉아서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계신다. 며칠 전에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장 가던 걸음을 재촉하는데 할머니가 구시렁구시렁하신다. 안줄려면 왜 쳐다보느냐는 말투다. 가로수는 어느덧 봄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다. 사람들은 훈훈한 마음으로 벤치주변을 오고가며 동전도 놓고, 할머니의 영어발음도 확인해보곤 한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얼어 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 꿉니다.
정직하고 분명하면 떳떳하고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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