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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보니 알겠더라》 - 짐 싸서 놀러 다니는 노년의 행복 - ▪︎ 글: 유호근(예종)
사람은 아파봐야 안다. 건강할 때는 건강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혼자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고, 가벼운 가방 하나 들고 집을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된다.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이제는 짐을 싸서 놀러 다니며 살아야겠다.” 젊을 때처럼 거창한 여행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행기 표를 끊고 먼 나라로 떠나는 것만이 여행도 아니다. 며칠 묵을 작은 숙소 하나 정하고, 옷 몇 벌 가방에 넣고, 좋아하는 책 한 권 챙기고, 아내와 천천히 길을 걷고, 바닷가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노년의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 가지고도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에 있는지도 모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젊은 날에는 늘 시간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고, 자녀를 키워야 했고, 일을 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다. “나중에 가자.” “조금만 더 있다가.” “일이 끝나면.” 그렇게 미루었던 ‘나중’이 어느새 오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인생에는 ‘나중에’가 반드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건강할 때 가야 할 곳이 있고,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할 길이 있으며, 함께할 수 있을 때 함께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러니 이제는 삶을 너무 뒤로 미루지 않으려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파보니 알겠더라. 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큰 집에 산다고 반드시 평안한 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에게 남는 것은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가, 어디에서 마음이 평안했는가, 누구에게 사랑을 주었고 누구의 사랑을 받았는가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제는 여행의 목적도 달라졌다. 관광지를 몇 곳 더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손을 한 번 잡아주는 것도 좋겠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오늘 참 감사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하루는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마 전 제주에서 며칠 쉬었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쉬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라는 것을. 파도는 우리가 서두르지 않아도 밀려왔고, 바람은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불어왔으며, 해는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떠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 오래 달려왔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노년은 끝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삶을 다시 누리는 시간이어야 한다. 물론 몸은 예전 같지 않다. 주름도 늘고, 머리카락도 희어지고,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곳이 아프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불행은 아니다. 오히려 노년에는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나무 한 그루가 아름답고, 아침 햇살 하나가 고맙고, 따뜻한 차 한 잔에도 마음이 평안하다. 젊을 때는 목적지를 보며 달렸다면 이제는 길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젊을 때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것이 나이 듦이 주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래서 나는 노년을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짐을 싸자. 너무 많은 짐은 필요 없다. 옷 몇 벌이면 되고, 세면도구 하나면 되고, 좋아하는 책 한 권이면 되고, 서로의 손을 잡을 마음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떠나자.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제주도 좋고, 바닷가 작은 마을도 좋고, 산골의 조용한 숙소도 좋다. 하루 이틀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아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나고 싶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혼자 목적지에 도착하는 여행이 아니라 함께 걷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여행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세월이 모두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울었고, 때로는 지쳤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러니 이제는 지나간 날만 돌아보며 살고 싶지 않다. 남은 날을 바라보고 싶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물론 노년의 여행은 단순한 소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회복을 위한 여행, 감사를 위한 여행, 사랑을 확인하는 여행, 그리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여행이면 좋겠다. 어쩌면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며칠 머물다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 묶여 살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가방 속 물건은 그대로인데 마음의 짐은 조금 가벼워져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파보니 알겠다. 인생은 오래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니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아직 걸을 수 있다면 걷고, 아직 볼 수 있다면 바라보고, 아직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하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만나고,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한 사람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어느 아침에는 작은 가방 하나를 챙겨 집을 나서자. 목적지는 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길이 열리는 대로 가보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짐을 싸서 놀러 다니는 노년. 나는 이제 그것을 철없는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주어진 작은 축복일 수 있다. 남은 생을 조금 천천히 살아도 된다. 조금 더 웃어도 된다. 조금 더 사랑해도 된다. 조금 더 놀아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감사하며 누려도 된다. 언젠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가능한 한 자주 가방을 싸고 싶다. 아내의 손을 잡고,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참 잘 살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다. “주님, 오늘도 살아서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노년의 행복은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은 가방 하나, 사랑하는 사람 한 사람, 걸을 수 있는 두 발, 그리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파보니 알겠다. 삶은 언젠가 끝나지만, 끝나기 전까지는 아직 떠날 수 있는 날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오늘도 짐을 싸자. 그리고 놀러 가자. 남은 생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아름다운 여행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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