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토지거래! 이렇게 이루어 졌다.

김락기 | 기사입력 2007/02/02 [07:50]

조선시대 토지거래! 이렇게 이루어 졌다.

김락기 | 입력 : 2007/02/02 [07:50]
신안주씨가의 명문(明文) 
 
조선시대에 우리 시흥시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곳곳에 산재한 그 시대의 무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 우리 시의 향토유적 16곳 중에 9곳이 조선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반면에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유물이나 유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     ©운영자

 
그런 와중에 과림동의 신안주씨가에서 전해 내려온 조선후기의 각종 문서는 생활사라는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안주씨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약 80년간, 3대에 걸쳐 과림동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1917년에 주민들이 『신안주씨 삼세적선비(三世積善碑)』를 세웠을 정도로 과림동 인근에서는 잘 알려진 집안이고, 지금도 후손들이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이 집안에서는 약 2,000건에 달하는 각종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논밭을 파고 사면서 작성한 명문(明文, 토지매매문서) 약 80여장은 같은 지역의 문서가 조선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남아 있어 이 지역 토지소유권의 변동, 토지가격의 변화, 문서양식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림 1은 지금으로부터 약 270년 전인 1731년(영조 7년), 당시 인천부 황등천면 6리(현 계수동)의 논 6마지기, 11배미(배미는 논의 크기에 관계없이 두렁으로 둘러쌓인 하나의 구획을 말한다)를 논주인 오로미(吳老味)가 김춘서(金春西)에게 95냥에 판다는 매매문서로 증인은 김만이(金万伊)이고 글씨는 차덕량(車德良)이 썼다.

군데군데 빛이 바랜 종이가 알려주듯이 우리 지역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토지매매 문서이다.
 
 
그림 2는 1888년에 인천부 신고개면 장언(樟堰) 아래 있는 논과 신고개면 3리(현재 은행동)의 논을 매매한 문서인데, 산 사람이 주씨(朱氏) 가문의 남자종 개삼복(朱奴 介三福)’으로 되어 있어 양반들이 토지거래도 노비에게 맡겨서 처리했음을 알려주고, 또 논 주인이 김판종(金判宗)의 부인인 김조이(金召史, ‘召史’는 조선시대에 양반가 여인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널리 쓰인 것으로 한자음은 ‘소사’이지만 ‘조이’로 읽는다)로 되어 있어 조선 말기의 여성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게다가 도장 대신 찍혀있는 선명한 손자국은 120여년전 문서에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준다.
▲ 그림3 1910년의 계약서     ©운영자
 

위의 두 문서에서는 형식상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시기를 알려주는 연호도 청나라의 ‘옹정(擁正)’과 ‘광서(光緖)’로 같고, 문장을 구성한 형식도 동일하다.

그런데 1910년 8월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 작성된 그림 3은 앞의 문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연호가 일본의 ‘명치(明治)’로 바뀌었고, 문서의 명칭도 명문(明文)에서 계약서로 달라졌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결(手決, 싸인)이 있던 자리에 동그란 도장이 붉은 색으로 선명하게 찍혀있다. 또 문서의 중간 중간에 한글이 병기되는 모습도 그 전과는 다른 것이다.
 
 

 
▲ 그림4 1815년 (추정) 패자     ©운영자
▲ 그림5 1824년(추정) 패자     ©운영자
그림 4와 5는 패자(牌子)라 부르는 것인데, 요즘말로 한다면 위임장이다. 즉 그림 4는 상전 崔一이 남자 종 억만(億萬)을 시켜 인천 신고개면 3리 한천동(은행동 찬우물)의 논을 팔아오도록 한 것이고, 그림 5는 같은 인천 신고개면 3리 한천동의 논을 돌세(乭世)에게 팔아오게 한 것이다.
 
두 자료사이에는 9년의 차이가 있는데, 억만이 윤씨에게 땅을 팔았고, 다시 윤씨가 돌세를 시켜 다른 사람에게 팔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현재도 은행동 찬우물에 파평윤씨가 대대로 살고 있어, 그림 5에 상전으로 나타나는 윤씨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윤씨 사이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신안주씨가의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연구한다면 약 300년간에 걸친 토지매매 관행과 형식, 같은 토지에 대한 가격 변화 등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이것은 실제 자료에 근거하여 시흥의 역사를 연구해 나가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림은 위에서부터 1,2,3,4,5 입니다.

〔김락기(시흥시 향토사료실 상임위원)〕 시흥웹진

김락기님의 글은 <시흥웹진> "시흥역사통신"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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