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 답사기(1)

편집부 | 기사입력 2008/01/22 [19:44]

마이산 답사기(1)

편집부 | 입력 : 2008/01/22 [19:44]
편집자 주) 이 글은 군산 동고등학교 김형근 교사 필명 '효량'님이 지난 2003년 쓰신 글 입니다. 우연히 웹써핑을 하다 글을 발견하고 시기와 상관없을 듯 해 글을 퍼왔습니다.
 
1. 가까워서 멀었던 마이산..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진안의 마이산을 가보기로 작정을 하고 아침 일찍 출발을 하였다.
마이산은 우리 관촌중학교에서 자동차로 불과 15분이면 가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동안 찾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마 가까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람들은 흔히 가까운 곳에 있는 보물들을 보지 못하고 먼 곳으로 찾아 헤매는 경향이 있는데,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물? 그래. 사람이든 산이든 존귀한 것은 보물단지로 표현을 해 보자.

물론 옛적에도 마이산을 가본 적은 있었다. 10년 전인가? 그 때는 진안 쪽에서 가는 길로 북 쪽에서 산으로 진입해서 탑사를 둘러보고는 다시 북쪽으로 빠져 나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진입을 하였다. 관촌중학교와 가까운 쪽이 남쪽 출입구 쪽이었기 때문이다.

2. 용암 동맹

먼저 마이산 진입로에 들어서자 진입로 우측에 밥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거대한 바위산이 눈에 띄었다. 이름하여 '용바위'. 표지판과 설명이 적혀 있고, 바위 아래쪽에 무슨 글이 새
겨져 있기에 호기심이 일어 차에서 내렸다. 아! 여기가 호남의병 창의동맹을 맺은 곳이구나!
김석용, 전기홍 등 500여명이 모여 손가락에 피를 내어 서로 섞어 결의를 맺고 술을 나누어 먹었다는 그 유명한 삽혈동맹(揷血同盟).. 그들의 의로운 깃발은 오늘 세대의 지나는 객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의기로 온몸을 덥히고 있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결의문을 한자씩 또박또박 다시 읽으며 1907년의 의기를 느껴 보자니, 망국민의 처지와 그들의 비분강개가 어떠했을까 짐작이 간다.

'하늘이 인간세상을 굽어살피고 계시나니, 우리가 모인 것은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함 뿐이니, 사사로운 효보다 충을 택한 우리들, 하늘이여 우리가 만약 두 마음을 먹는다면 죽임으로 우
리를 응징하소서. (維皇上帝監此人極 凡我同盟一體殉國 君父萬歲忠公孝私 有懷二心神其極之)'


바위 위에는 창의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 龍岩이란 휘호 밑에 좌로 150여명의 명단이, 우로 130여명의 명단이 횡서로 두 세줄씩 새겨져 있었다. 송병선, 최명호, 최재국, 이기해, 이호용, 한창희, 최제학, 최은상... 한사람 한사람씩 모두의 이름을 읽어보았다. 누가 이들 창의한 유생들 이름을 하나씩 읽어 줄까 하여 정성스럽게 읽어 나갔다.

일제하에는 독립운동 계열이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진다. 먼저 용암창의동맹을 맺었던 유생들처럼 조국을 독립하려는 동기가 이씨 왕조의 복원에 있는 집단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씨 왕조가 민중들의 삶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줄 수 없다는 한계(봉건체제) 때문에, 초기의 결의와 기세와는 달리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독립을 원하는 유생들 의병집단은 곧 사멸해 버리고 말았다.
 
또 서구식 부르조아 민족주의를 꿈꾸며 독립운동을 하던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3.1운동 후에 국내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못하고, 망명정부의 상징성을 지키는 상해 임시정부나 테러집단인 의열단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들 집단도 민족 자본가나 양심적인 지식인 계층에서는 일부 지지를 받았으나 민중들의 구체적 지지나 조직화에 이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주의 또는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집단이 있다.
 
이들은 국내에서 광주 학생운동이나 신간회 등을 조직해서 좌우 합작운동을 벌였는가 하면 기층 민중들을 조직해 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 활동을 벌인 그룹(보천보 전투 등)도 여기 마지막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생들의 독립운동은 구시대의 봉건적 틀(이씨조선 복원)을 벗을 수 없었기에 냉정한 역사의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선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의로운 기상은 아무리 높게 쳐주어도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일체의 비판을 잔인하게 막아 버렸지 않은가? 나중에 조선인의 성씨마저 바꿔버린 사람들인데.. 세상에 어느 강대국이 점령지 백성들에게 성씨를 바꾸게 했던가? 이런 조건에서 비분강개와 저항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행위는 그 노선이 잘못되어 성공을 담보할 수 없을지라도 가장 숭고한 애국심의 발로요, 대아적인 삶의 전형이다.


3. 비례물동(非禮勿動) 과 청구일월대한건곤(靑邱日月大韓乾坤)

용바위에 새겨있던 유생들의 명단을 마지막 성명까지 읽고는, 당시 이들을 따랐던 머슴들 평민(농민)들의 이름은 어디에 있을까 회상해보며 다시 진입로에 들어섰다.
 
조금 걷다보니 좌측으로(용바위 반대편) 잘 가꾸어 놓은 터가 있었고, 그 쪽의 나트막한 바위 위에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말이 현판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고종이 호남 유림에게 내린 친필 편액이었는데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비례무도한 왜놈들과행동을 같이 하지 말고 결연히 맞서 싸우라는 왕의 어지(御旨)였을 것이다. 고종의 친필편액 그 앞과 주변을 잘 다듬어 놓았음에도 어딘지 허성해 보였다. 아마 나라를 망하게 한 왕의 발버둥으로 보였기 때문이리라.

조금 더 걷다 보니 역시 용바위 반대편인 좌측 능선 밑 바위에 커다랗게 '청구일월대한건곤(靑邱日月大韓乾坤)'이라는 김구선생님의 휘호가 눈에 띄었다.
 
경비에게 물어보니 해방후 광복운동 성지로 이곳에 이산묘를 만들 때 운봉길의사, 안중근의사 등 5인의 독립운동지사들의 신위를 이곳에 같이 모셨기에 그 하례로 김구선생님이 광폭으로 써 주신 것을 큰 바위에 새겼다 한다.
 
김구선생님이 어떤 분이신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문지기 노릇부터 평생을 조국 독립에 일신을 바쳐 사셨던 분 아닌가? 일제하 해외에서 풍찬노숙의 세월을 얼마나 겪으셨는가? 해방 후에 미국과 이승만이 남쪽만의 단독선거를 진행하자 그것을 막자고 남북협상의 북행길에 다녀오신 분 아닌가?
 
다녀오셔서는 곧바로 경교장에서 비운의 총탄을 맞고 서거하신 분 아닌가? 그래. 그 분의 글은 언제나 저렇게 기상이 넘쳤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뭐였지?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독립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살지 않겠노라'고. 그 분처럼 그분의 글도 저렇게 거센 비바람을 알몸으로 맞으며 산허리를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청구일월대한건곤(靑邱日月大韓乾坤), 이 말은 '한민족이여 영원하라'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이겠는가? 뉴라운드다, 이라크 파병이다 하며 국민에게 혼돈을 주는 이 시대에도 '우리 민족이여 영원하라' 하는 말은 위정자들이 새겨들을 일이다.
 
민족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주권이 제대로 확보되어야 한다. 식량 주권, 군사주권.. 청구일월대한건곤(靑邱日月大韓乾坤)..
민족이여 영원하라..

아니다. 민중들이 새겨둘 일이다. 위정자들이야 제대로만 된다면야 민중들의 공복 아닌가? 민중들이 못나서면 위정자들이 민족을 배반하고 자기 사리사욕을 우선 했던 예를 역사 속에서, 그것도 최근세사 속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 왔지 않은가?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재기용이 민중을 배반한 역사이고, 역대정권의 친미예속이 또 그것이다.
 
민족의 고통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몫으로 된다. 그래서 민족의 주권을 지켜나가는 일도 민중의 책임으로 둘 일이다.

낮고 안전한 곳에 예쁘게 새겨 있던 고종황제의 글과 산허리에 새겨있어 비바람 다 맞으며 선연하게 살아나는 김구선생의 글이 객의 한가슴을 또 덥히고 있었다.

4. 이름 있는 자들과 이름 없는 자들

다시 진입로에 들어서서 용바위 쪽 주필대에 있는 이산묘(?山墓)라고 이름 붙혀진 제각들을 둘러보았다.

주필대(駐?臺)란 왕이 수레에서 내려 잠시 머무는 곳을 뜻하는 것으로 이 곳 주필대는 이성계가 운봉땅 황산 싸움에서 왜구에게 대승을 거둔 후 전주로 들어오다가 잠시 머물렀던 곳
이라고 한다.
 
머문 이유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황금자를 주며 나라를 재어보라고 했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여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에 정도전에 의해 몽금척무가(夢金尺舞歌)가 지어지고 조선의 최고 훈장으로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이 만들어졌다는 설명문은 내게 그다지 큰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다.
 
역성혁명을 이룬 태조에게는 찬탈한 왕권의 당위성을 인위적인 내용으로 치장했어야 했을 것이지만, 왕의 잣대가 법이 되는 일인 중심 사회가 빚어내는 왕조사(王朝史)는, 집권자들에
게 이씨 국가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의미는 있을지언정, 민중들의 권리나 이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에 의해서 만들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보더라도 이태조(이성계)의 할아버지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비를 피했는데 호랑이가 그를 알아보고 자리를 비켜주더라는 등 터무니없이 허황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지 않았는가?
 
통치자가 바뀜으로써 민중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통치자 의 통치권에 대한 당위를 아부 칭송해대는 지식인의 곡학아세(曲學阿世), 글품 팔기에 불과한 글들일 뿐이었지 않은가?

이산묘(?山墓)는 안쪽 제각(祭閣)부터 단군, 이태조, 세종, 고종 4군왕을 모신 영덕전(永德殿)이 있었고, 그 아래로 우측으로 조선조 개국이래 충신과 유림 40위를 모신 영모사(永慕
祠), 좌측으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을사조약이후 순국선열 34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로 배치되어 있었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영모사 아래 쪽, 그 안에 커다란 비석만 덩그러니 있는 작은 제각이 눈길을 끌었다. 다가가서 보니, 비석의 내용인즉 대한광복기념비(大韓光復記念碑)란 이승만의 친필휘호를 새기고 있었고 그 뒤로 이 마이산의 이산묘를 만들 때 돈을 낸 사람들이 줄줄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이름을 새기고 싶었던 것일까?

착잡했다. 바위에 이름을 새긴 삽혈동맹 유생들이야 정명(正名:이름을 바로 세움)을 기본으로 하니 이름 석자 부끄럽지 않도록 드러냈다고 해도(사실은 이 부분도 문제는 있음. 일제에 ‘날 잡아잡수시오’라며 정보를 노출시킨 것이니까), 이승만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독립을 청원하고 다니면서 미국의 한 주로 편입시켜달라는 몰상식한 언동들부터, 해방 후에 미국을 등에 업고 온갖 권모와 술수로 민족 정기를 깡그리 흩어버린 인물 아닌가? 4.19로 축출되기까지 군사 작전지휘권이고 뭐이고 다 미국에게 퍼 주면서, 제 민족에게는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아 민족끼리 분열과 증오만을 심고 퍼트렸던 인물 아닌가?
 
그래도 어줍잖은 국조의 반열에 서고 싶었던 것일까? 여기서 어줍잖다는 말은 이산묘(?山墓) 영덕전(永德殿)에 단군과 세종 그 사이에 망국의 임금 고종이 끼어 있기에 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권력에 눈이 멀어 민족을 회칠해 버린 인물의 비석까지 덩그렇게 모셔져 있으니 착잡할 밖에..

역사를 일구어온 사람들이 누구인가? 군왕인가? 몇몇 탁월한 인물 개인들인가? 아님 민중인가? 1380년 조선에 침입했던 왜구에 맞서 장군들 못지 않게 황산싸움에 목숨걸고 싸운 사람들,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기울어지자 만주벌판에서 이름 없이 싸우다 죽어간 숱한 독립운동가들.. 그들에게도 이름은 있었을텐데..
 
이름 석자보다 소중한 것이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죽어 나라가 산다면, 이름 없는 들풀로 피었다 지더라도 민족이 민족답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위대한 세상을 꿈꾸면서 집단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같이 했던 사람들, 한
덩어리로 세상의 빛이 되고자 자기 몸을 초개처럼 던져냈던 무명용사들. 이들 알짜배기 싸움꾼들에게 이름 석자가 무엇이었겠는가?

비석에 새겨져 서로를 뽐내며 다투는 이름들이, 이름이 없던 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런저런 사념을 하며 제각을 나오는데 한 모퉁이에 또 최근에 세워진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얼핏보니 김대중 대통령의 비석! 그 뒤에 또 국회의원이며 군수며 하는 재정기부자 명단이 깨알같이 쓰여 있고. 더는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마이산 탑사(塔寺)를 향했다. 애써 털고 지워버리며 탑사를 향해 꽤 무거워진 발걸음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가 떠올랐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이름을 붙이면 이미 이름이 아닌 것을...


5. 암마이산, 숫마이산

마이산을 찾아 올라가는 길은 금당사란 옛 사찰의 복원공사가 한창이어서 시끌하였고, 마이산의 기이한 돌산 형태를 구경온 인파들로 벅적대 산사의 청량함과 고즈녁함을 즐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길 양편에 자리 잡은 상인들의 호객행위는 조잡한 기념품가게의 물건들과 더불어 마이산 때문에 먹고 살 수 있는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처량하게 보이기에 충분했다.

한참을 걸어가니 금당지(金堂池)란 연못이 나오고 그 연못을 지나니 드디어 마이산이 그 용솟음의 형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옛날 아라비아에서 나오는 명마(名馬)인 천마(千里馬?)를 이곳에 팔러 왔다가, 여기서 말이 지쳐 궁해서 쓰러져 죽으니 두 귀만 남아 그것이 변하여 암 수 두 봉우리가 이루어졌다는 슬픈 천마의 전설을 가진 마이산!
 
가까이 다가설수록 웅장한 형세가 더해만 갔다. 이 쪽 지역의 산들은 저렇게 암벽으로만 이루어진 산이 별로 없어 서인지 하늘을 향해 불쑥 솟은 두 봉우리 각각 신비함과 위압감이 더해만 갔다.

암마이산은 어릴 적 옥수수 빵처럼 군데군데 생긴 커다란 구멍 흔적이 패어 있어 세월의 풍상을 스친 거대한 암각화 같았다. 과학을 가르치는 전병은 선생이 마이산은 다 굳기도 전에
솟아오른 역암으로 군데군데 구멍 뚫린 타포니(taffoni) 지형이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아득한 옛날 어떤 지각변동이 일어나 강바닥 자갈돌로 굳어진 저 거대한 바위산(또 부분적으로 덜 굳어진 바위)을 하늘 높이 솟아오르게 하였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신비스러움으로 이런 자연 현상을 이해하게되고..
 
오랜 풍혈 작용으로 거인의 발자국 같기도 하고 포탄 맞은 자리 같기도 한 거대한 구멍들에는 새들이 둥지를 틀었는지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또 나무들도 그 안에서 새로 자라고 있었다.

숫마이산은 볼이 쳐진 넉살좋은 할아버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암마이산에 비해 더 깍아 세운 듯 날카롭게 솟아 있었고 타포니(taffoni) 흔적도 적은 비교적 말끔한 돌산이었다.
 
높이가 해발 600미터에서 700미터 밖에 안되지만 (암마이산의 경우 673미터), 두 봉우리 모두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그 하늘과 닿은 봉우리 끝이 보이니, 육중하고 경외스럽게 높이 솟아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 두 봉우리는 땅에서 솟아난 이후 세세년년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암마이산 숫마이산 그 가운데에는 유명한 마이산 돌탑과 탑사(塔寺)가 자리잡고 있었다.


6. 돌탑의 공력도 세월의 흐름을 비켜서진 못하고..

바람에 흔들려도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불가사의한 돌탑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대웅전 뒤 쪽으로 천지탑과 오방탑이 있었고, 앞 쪽으로는 약사탑이, 그 아래로 월광탑과 일광탑이, 그리고 중앙에 중앙탑이 있었다. 이 탑들은 사람의 흔적이라고 믿기가 어려울 만큼
자연석을 정교하게 쌓았다.
 
맨 밑에는 축대를 쌓고 하나씩 크고 작은 돌을 모아서 쌓아 올렸으며, 맨 위에는 비슷한 크기의 돌들이 옥개석마냥 12개, 13개, 14개씩 일자로 쌓아 올려져 있었고 꼭대기에는 큼직한 호박모양의 돌이 얹혀져 있었다. 이러한 주탑들 주변에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신장탑이란 탑들이 주탑들을 보호하고 있는 듯 하였다. 신장탑은 큼직큼직한 돌들을 20개 이상씩 일자로 쌓아져 있어 그것대로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이는 저 탑들의 지탱은 무슨 힘일까? 쉽게 공력(功力)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갑용처사가 평생 쌓았다고 하는 이 탑들은 인공적 세련미에 익숙한 나에게 자
연적 인공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였다.
 
일월 광명을 뜻하는 두 탑 뒤편에 앉아 제법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고 휴대폰을 껐다. 그리고 몇 번씩 심호흡을 하였다. 한 인간의 위대한 공력 앞에, 그 공력이 이루어 놓은 자연적 인공의 구조물 앞에 자연의 신비함과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예의를 표하고 싶었고, 보고, 듣고, 말하고 싶어 늘상 안타까운 바깥세상과의 잠시나마 단절을 통해 인간의 위대한 창조적 노동의 흔적을 무색무취로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왜 이갑용처사는 이 돌들을 쌓았을까? 설명이 적혀있는 간판에는 도를 닦고 억조창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쌓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갑용처사가 살았던 시기를 보면 1860년에서 1957년까지 98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동안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바야흐로 서양 열강의 침공 앞에 갈팡대던 이씨조선 말기, 운양호 사건으로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여 일본에게 문을 열어야 했던 시기, 삼남에 농민세상을 염원하며 반봉건반외세 깃발을 높이 들었던 갑오농민전쟁(1894).
 
일본 낭인들의 민비시해(1896), 임금이란 자가 러시아 대사관에 피신해 들어갔던 아관파천(1896)... 망국의 을사보호조약(1905)... 일본의 식민지배... 해방 후 분단(1945), 미군정, 김구암살(1948),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1948), 한국전쟁(1950), 4.19혁명(1960), 5.16군사구테타(1961)...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그는 어떤 것을 기원하며 돌을 쌓았을까? 역사에서 한발 비켜서서 도통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개인 수양? 아니다 그랬을 리 없다. 민족이 유린되는 역사적 순간에 그 치열한 민족사의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적인 도(道)를 닦아 본 들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면 그것이 무슨 도이겠는가?
 
형이상학적인 관념 놀음으로 이렇게 탑을 정성스럽게 쌓았을 리가 없다. 돌 하나하나 옮겨오면서 짙은 땀방울이 돌에 배이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를 바로 쌓아 올리기 위해 수백번 바꾸어보고 또 올리고 했었을 텐데.. 이갑용 처사는 진정 무엇을 위해 이 돌들을 쌓았는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돌들에게 신심을 만들어 주었는가의 문제였다. 집요하게 의문이 들어 결국 스님께 문제를 여쭈어 보기로 하였다.

스님 왈 “마이산에 손님들 많이 오라고 쌓았는가 보다”며 넉살좋게 웃으시더니만 몇 가지 설(說)을 이야기 해 주었다. 첫째는 종교적 신념이라는 설, 둘째는 이씨왕조의 회복 기원설,
셋째는 풍수지리설 등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스님은 돌들이 자꾸 무너진다고 이야기하신다. 관광객들이 손을 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것은 새로운 정보였다. 탑을 쌓을 당시 120여개의 탑이 있었는데, 현재는 60여개의 탑만이
남아있다 한다. 이 탑들은 강풍에 쓰러지지 않는 탑이 아니라 쓰러지는 탑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형이 암마이산, 숫마이산, 그리고 앞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려있어 큰 바람은 막고 있어
보였다. 하지만 풍상이 반복하는 세월의 흐름은 막아낼 수 없던 모양이다. 향후 100여년이 지나면 다시 반절로 줄어 들 것이고, 또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영상 속에서나 남게
될 무너지는 탑들...
 
무너지지 않는다는 이 마이산 탑들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변하는 세월의 영고성쇠(榮枯盛衰)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이려니... 무얼 그리 잘났다고..
무얼 그리 못났다고.. 한층 더 숙연해지는 반성의 삶과 만나게 한다.

7. 운수사와 화엄굴

탑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 보니 암마이산과 숫마이산을 넘어가는 중간 지점에 운수사란 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운수사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과 무량광전(無量光殿)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로 삼신각이 있었다.
 
삼신각 옆에는 조선의 3대(代)임금인 태종이 한번 내려 와 하늘에 제사를 모셨다는 곳으로 대리석으로 꾸려진 현대식 산제단(山祭壇)이 있어 군민의 날 행사에서 한번씩 사용하고 있다지만, 마이산의 웅장함에 비해 잘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이 오히려 조잡하게만 보여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아래 똘배 나무 한 그루가 제법 "청실 배나무"란 명칭까지 가지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수령이 얼마 되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로 꺽이고 또 꺽인 흔적들은 옹이가 되었는지, 가지마다에 옹이투성이 이었고, 그 밑으로 새 가지들이 쭉쭉 뻗어 나와 똘배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나무 밑둥에는 추위에 갈라터진 때낀 손등 마냥 나무껍질이 종횡으로 어지럽게 갈라져서 두터운 각질을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새파란 이끼까지 차고 들어온 것으로 보아 숱한 세월을 그 자리에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속셈을 웃으며 말없이 지켜보면서, 고즈녁한 산사의 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하였을 거란 생각을 하였다.

대적광전 아래편에는 6자반짜리 커다란 법고와 목어가 걸려 있는 제각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돈을 얼마씩 내고 법고를 치고 있었다. 아마 소원을 비는 것이리라. 그런데 법고가 커서인지 아무리 세게 때려도 법고는 은은한 소리 밖에 나지 않았다.
 
똘배나무 밑에 앉아서 사람들이 치는 법고를 보며 마이산 골짜기로 잔잔하게 퍼져 가는 둥둥 북소리에 잔뜩 취해 보았다. 깍아지른 듯한 암마이산 숫마이산의 기가 막힌 천연의 공명장치 때문인지 법고 소리는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적셔 왔다.
 
아마 이 소리는 창생의 나른함을 깨우는 소리였으리라. 벌떡 앉은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량광전 세존불께 합장을 하고 마음을 쾌청하게 한 뒤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가니 숫마이산 쪽으로 굴(窟)이 하나 있었다. 화엄굴이라는 이 굴은 숫마이산 허리에 있는 굴로써 굴 안에 약수까지 간직하고 있는 신비스런 곳이었다. 춘분과 추분 때만 이 굴 안으로 깊숙이 해가 들어와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고 한다. 총총히 올라가서 굴 속에 흐르고 있는 시원한 약수를 한 컵 마셨다.
 
굴을 나와 그 앞에 표지 말을 보니 마이산이 전국에서 기(氣)가 가장 쌔서 이 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다. 또 이 약수를 마시고 출세한 판서이름도 적혀 있었다. 이 표지판은 몇 가지 추론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조선조 유교 사회에서는 아들을 낳는 것이 대(代)를 있는 것으로 여겼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인은 시댁에서 내쫓을 수 있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간주하는 사회였으니, 옛적에도 아녀자들이 여기를 뻔질나게 찾아다녔겠구나. 그리고 대체 마이산 기(氣)가 얼마나 쌔기에 곳곳에서 기(氣)가 쌘 산이라고 적혀 있지?


8. 암마이산을 에돌아 거친 돌산을 오르며.

숫마이산은 등반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직각으로 솟아 있었기 때문에 암마이산을 에돌아 올랐다. 암마이산도 경사가 심했지만 못 오를 정도는 아니어서 군데군데 밧줄을 타고 오
를 수 있었다.
 
해발 673미터인 암마이봉 정상에 올라 멀리 산자락들을 둘러보았다. 남동쪽으로 저 멀리 덕유산이 푸른 하늘과 잇닿아 고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넉넉한 품 밑으로 크고 작은 봉우리들과 능선들이 가까이서 멀리서 하늘아래 그 앞 공간들을 수놓고 있었다. 북서쪽으로는 운장산이 높이 솟아 있었고, 남서쪽에는 만덕산이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전주와 가까운 오봉산 모악산도 한 켠에 솟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산이라는 말이 실감이 간다. 같이 올라온 등산객들은 야호 소리를 힘껏 지른다. 산 정상에서 느껴지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분출해 내고 싶었으리라.

암마이산 정상에서 내려와 산허리를 한바퀴 돌기로 마음을 먹고 기왕에 나있는 사잇길을 따라 암벽을 타다 걷다 하였다. 암마이산 전체가 진흙을 자갈과 함께 던져서 붙혀 놓은 듯 하기에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암벽 길 따라 내내 상존하였다.
 
또 밑은 자갈밭 길이었기 때문에 자주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을 탔다. 반 바퀴쯤 돌고는 그 옆으로 능선이 있기에 능선 쪽으로 나와 앉아 시원한 산바람을 쐬며 잠시 앉아 있었다.
 
5분이나 채 지났을까 땀에 젖은 육신이 쉽게도 소슬하니 떨려 오며 청량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등산로를 따라 갈까 아니면 이 쪽 능선을 따라갈까 망설이다가 능선을 타고 가기로 하였다.
 
맞은 편 산 아래에서 벅적대는 사람들 소리가 바람결에 희미하게 묻어오다 점점 사라지니 등산로가 아닌 이 길을 잘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혼자 있는 것을 즐겨 하는 탓인지.. 어차피 홀로 가는 인생길이란 생각에서
그랬는지..

9. 능선을 따라가다 길을 잃고

한참을 능선을 타고 가다가 낭떠러지를 만났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다른 능선을 타고 가다가 또 낭떠러지를 만났다. 하는 수 없이 북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왔다. 타고 내려온 계곡은
계곡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마른 계곡이었다.
 
지금까지 다녀 보았던 대부분의 산들을 보면 능선을 타고 가다 절벽이나 바위가 나오면 조금만 돌아가면 다시 원래 타던 능선을 잡을 수 있었다.
 
또 계곡에 가면 아래로 내려 갈수록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숲 속을 온통 제압하곤 했었다. 그러나 마이산 자락은 능선 곳곳에서 옥수수빵 떼어먹은 자리처럼 절벽으로 끊겨 있어 다시 능선을 잡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골짜기 계곡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스산한 나뭇잎 소리, 산새들의 울음소리밖엔 물소리가 전혀 없었다.
 
그 것 뿐인가? 마이산의 바위는 "역암"이라고 하는 특수한 암석이라고는 알았지만, 이처럼 시멘트 혼합물처럼 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실제로 암마이산 오르는 길 암벽에 밖아 놓은 철제빔 밑에는 콘크리트를 해 놓았는데, 바위인지 콘크리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바위들이 이렇게 생겼으니 떨어져 나오는 잔돌도 강가에 조약돌과 같아 길은 미끄러울 밖에..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겨우 조금 흐르는 물줄기가 있긴 했는데, 아니 이건 또 웬 도랑물? 산 속의 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붉으죽죽한 색깔의 바위들 사이로 탁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여튼 이산은 힘든 산이었다.

10. 풀어지고 또 맺어지는 의문들

마이산 자락 등반의 험준함을 생각하며 계곡을 따라 걷다가 문득, “아!~” 이제야 머리에 스쳐오는 것이 있었다. 그래. 이 산은 악산(惡山)이다. 사람을 붙여주지 않고 몰아내는 기(氣)가 쌘 이 악산을 옛 사람들은 어떻게 다스려야 했을까?
 
기(氣)? 돌탑? 그래... 탑사에서 스님이 들려준 이갑용 처사가 톨탑을 쌓은 이유 그 중에서 풍수지리설을 다시 반추해 보았다. ‘산이 원래 하나였는데 암마이산 숫마이산 갈라졌다. 산이 갈라지면 흉산(凶山)이라 하며, 이런 흉산이 있으면 흉산을 끼고 있는 마을들(진안, 마령)이 재난을 당한다.
 
그래서 이갑용 처사는 두 산의 갈라진 틈을 이어내려고 돌탑을 쌓았다는 설이 있다.’라고 스님을 말씀해 주었던 기억이 났다. 돌탑을 쌓은 이유에 대한 여러 가설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는 내용이 풍수지리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여러 가설들과 함께 들을 때는 그저 그런갑다 했는데, 이제야 돌탑이 기를 누르고 산을 이어내기 위한 것임이 어렴풋하게 짐작되기 시작했다.

풍수지리설! 현대에서는 이것을 객관성이 없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말지만, 오랫동안 동양인의 사고를 지배하고 또 실용되었던 것 아닌가? 기(氣)라는 것도... 우리의 옛
선조들이 자연의 일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사유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관념적 환상적 연관으로써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의 현상적 연관을 대체하며 상상을 통해 진실의 결함을 보충해 왔을 뿐이었지 않은가?
 
물론 당시에는 개화기였기 때문에 여러 신 문물들이 들어와 사람들의 사상의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민중들은 전통으로 사유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이성을 사용하여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며 생활의 편리들을 도모하듯이, 흉산의 기(氣)를 눌러 액을 막으려는 것은 그 당시 민중들에게 나름의 최대의 위안이자 보편화될 수 있던 문제 해결 방안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이 돌탑의 공력으로 나타나고... 그렇다면 돌탑 하나하나에 서려 있는 의지는 갈라진 산을 이어내려는 염원, 곧 애민(愛民)의 사상이 체화(體化) 아닌가? '왜 쌓았을까’ 하는 돌탑의 수수께끼가 나에게는 거친 돌산에서 헤매고 난 다음에야 더디게 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또 이어지는 의문들... 이갑용처사가 중·장년기였을 때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인데, 한인간의 신념이 아무리 절절하고 또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 하더라도 역사의 격변 속에서
고통하는 구체적 민중의 삶을 외면한 채로 추상적인 애민(愛民)의 돌쌓기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개화기에는 서구의 문물들이 들어와 상당히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 텐데, 이갑용처사는 이런 국내 외적 상황 변화에서부터 민중들의 실생활상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또 이처사는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돌을 쌓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경제적 담보를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 멸시
와 비난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또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적 욕구는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얽혀졌지만, 신비스런 돌탑들의 영상을 떠올리면 한 인간의 업적, 창조적 결과물 앞에 과정상의 의문은 쉽게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있었다.


11. 자연이 빚어낸 조형물, 광대봉과 삿갓봉

북서쪽 사면 아래 민가에까지 내려와서는 다시 산길을 올라 잡았다. 한층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이번에는 등산로로 탑사까지 다시 산행을 해보리라 마음을 먹고 광대봉으로 향했다.

이제 잘 닦여진 정식 등산로에 오르면서 광대봉을 바라보니 그 형상이 해괴하였다. 눈 코 입 분명 사람의 형상을 닮긴 하였는데, 눈은 사선으로 배치되어 바보처럼 한쪽 눈은 푹 꺼진 채였고 한쪽 눈은 길게 찢겨있었다.
 
입은 합죽이 마냥 삐틀어진 채로 코 왼쪽으로 동그랗게 벌리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그냥 웃음이 나오는 광대 탈을 연상시켰다. 광대야 항상 남에게 웃음을 주는 친근한 사람들이지. 슬픔은 제가 받고... 이런 생각으로 가까이 다가가 광대봉을 보았다.
 
역시 때 이르게 솟아난 역암과 자연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코와 입은 타포니(taffoni) 지형의 흔적이었고, 커다랗게 갈라진 흔적이 묘하게 그런 광대의 모습을 연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광대봉은 바위전체가 풍화작용으로 위태롭게 부서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삿갓봉으로 방향을 돌려 걸으면서 눈 앞에 나서는 것은 다섯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 딸린 애기 삿갓봉까지 모두 여섯 개가 신통하게도 산골마을에서 만들어 놓
은 토종벌집을 연상시켰다. 벌집위에 비 가리개로 만들어 놓은 삿갓 모양의 짚북대기 형상도 봉우리들이 모두 머리에 쓰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애기봉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키로 옆에 연이어 늘어선 모습조차 경이로웠다. 어찌 저런 형상으로 만들어 졌담? 바위가 비바람에 의해 타제(打製)된 흔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하늘이 의도적으로 빚은 창조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왜 일까? 마이산의 신비로움에 나도 흠뻑 젖고 만 까닭일까?

등산로를 따라 가니 길이 닦여 있어서 산행은 훨씬 수월하였다. 가는 방향이 서쪽에서 동쪽을 향한 것이었으니까 이 쪽에서 보면 암마이산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암마이산 주위에 크
고 작은 봉우리들을 유심히 볼 수가 있었다.
 
가까이 가 보면 시멘트 반죽 같은 모습에 큰 구멍들이 뻥뻥 뚫려 있어 흉측하게도 보이지만, 이렇게 등산로에서 멀리 보면 마이산 주위로 솟은 많은 봉우리들이 살오른 신체의 굴곡들 마냥 울퉁불퉁 탐스럽게 솟아 있었다. 강바닥 같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광대봉 삿갓봉을 거쳐 그 다음 지난 곳은 해발 540미터인 봉두봉이었다. 마이산 자락 전체를 통통한 황소로 비유해 본다면 여기는 뒤꼭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마이산은 뿔에 해당되고. 다른 봉들도 이와 비슷한 높이 였다. 마이산 암수 두봉만 조금 높을 뿐 삿갓봉이 532미터, 광대봉이 527미터였으니까.

12. 봉두봉 정상에서 이갑용처사의 묘를 보고

봉두봉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평평한 곳이 있어 호기심에 찾아 가 보았다. 등산로하고 상당히 떨어진 곳이어서 사람들의 출입 흔적은 없었다. 거기에는 일반 묘의 두세 배로 큰
규모의 무덤이 있었다. 조그마한 비석을 찾아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았더니... 이갑용처사의 무덤이었다.
 
비석은 아주 작아 “孝寧大君 十七世壬坐 全州李公處士甲龍之墓”라고 전면에 쓰여 있을 뿐 뒷면도 옆면도 글씨가 없었다. 무덤은 내 보폭으로 총 서른 두 발걸음을 하니 제자리로 돌아올 정도의 둘레였다. 이 곳이 이갑용처사의 무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즐거웠다.
 
산을 다니면서 이렇게 곳곳에 숨은 흔적들을 보는 묘미가 즐거움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또 차분해진 마음이.. 사뭇 한 인간의 신념과 노고 앞에 경건해질 수밖에 없었음에야. 그동안 처사에게 캐묻고 싶었던 수많은 의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비석 앞에 앉아 준비해 간 간식을 꺼내 놓고 먹었다. 때가 훨씬 지났지만 이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 졌는지 안온한 느낌 속에서 식사를 하였다.

암마이산이 지척에서 솟아있어 큰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산 정상에는 찬바람이 불기 마련인데 이곳은 신선함 뿐... 바람이 범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람 불지 않는 날씨
도 아니었다.
 
봉두봉 정상 주위 다른 쪽에는 바람이 갈참나무 가을 잎을 쌩쌩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남동쪽 이처사의 묘에는 이상하리만큼 바람이 잦아 있어 찾아간 객에게 잠시 머물고 싶은 여유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갈라져 나온 흉산(凶山)을 하나로 이어내려는 이갑용 처사의 고된 땀방울, 그 속에서 마침내 돌과 하나되어 연단된 넉넉한 가슴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간식을 먹고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마이산도 보다가 하늘도 보다가... 묘 앞에서 나오는 길에 이갑용처사에게 한마디만 묻고 싶었다.

“바람 부는 이 시대에 어디로 가야 할지, 무슨 돌을 쌓아 올려야 할지요?”

이처사가 웃으면서 바람결로 대답하는 듯 하였다.

‘갈라진 세상 하나로 이어내면 모든 길(道)이 되는 것을...’

13. 세상 속으로

탑사로 하산하여 돌탑들의 신비로움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천지탑 오방탑 뒤편에 서서 갈라진 민족 하나되는 간절한 염원을 이어 보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분단시대... 분단이 우리의 삶을 가르고 왜곡하고 있는 것만큼 우리가 얻은 지식이나 집단적 노력 모두가 하나된 내나라 통일의 꿈을 열어 가는데 단단한 초석(礎石)으로 바쳐져야 하겠지... 가장 힘든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 만들어내기 위해선 조금더 땀을 흘려야 하겠지...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마이산 산행. 해질 녘 즈음에서야 금당지(金堂池)를 거쳐 금당사(金堂寺)로 내려 왔다. 금당지 주변에서 현대인들이 새로 쌓은 돌탑들을 보았지만 자연미도 인공
미도 둘 다 없었다.
 
더구나 탑사의 돌탑들에서 보는 신비스러움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것이 무슨 차이일까? 이미 답은 내 안에서 자신 있게 맴돌고 있었다. 흉내를 낼 수는 있겠
지만 영혼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금당사 아래는 바로 남부 주차장이므로 금당사 경내를 한바퀴 돌아보았고, 나오는 길 하늘에 떠있는 하얀 구름에게 환한 얼굴 넌지시 비쳐 보고는 관광버스 즐비한 주차장으로 향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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