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생을 추악 하게 만들어서야!

[신문고발언대] 분명히 훔친자의 주변에는 아는자가 있다

청원 | 기사입력 2013/06/07 [07:44]

고귀한 생을 추악 하게 만들어서야!

[신문고발언대] 분명히 훔친자의 주변에는 아는자가 있다

청원 | 입력 : 2013/06/07 [07:44]
[편집부] 아이디 청원님은 70세에 가까운 만학도로서 당나라 중기 詩僧皎然禪師(시승교연선사)가 저술한『저산집』또는『晝上人集(주상인집)』十卷의 詩集으로 논문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문제는 청원님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논문관련 자료를 누군가가 훔쳐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와 관련 청원님의 주장을 신문고 발언대에 싣습니다.
 
 
지난 4월 20일 쓰촨성에서 7.0의 강진이 일어난 가운데 한 공안원이 나무판 밑에 깔린 판다를 구하고 자리를 뜨는 순간 겁먹은 판다가 다리를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외신에 소개된바 있다.  
                                                                                    
 CBS노컷뉴스 기사 이미지 캡쳐
생의 본능을 보여준 애처롭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판다곰의 몸부림을 담은 기사를 보고 찡함을 느낀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꾸밈없이 들어낸 살고 싶은 생의 모습일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준다.
 
아주 작은 벌레도 건드리면 굴러서 공처럼 모습을 만들고 가만히 죽은 체하다가 잠시 지나면 달아나는 모습을 주변에서 보게 된다. 식물은 잘라도 움이 오르기에 죽음에도 무감각인 것처럼 느끼는 반면에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움츠리고 두려워한다.
 
하나뿐인 생이기에 더더욱 그처럼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식물들은 건드리면 움츠리고 자르면 고통을 호소하듯 액체를 뿜어내면서 불만의 표시를 나타내는 식물들도 있다. 이처럼 주어진 생은 동식물이 살고자함은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지 아니한가. 작은 동물이 인간의 손때가 묻어 키워졌겠지만 지진에 놀란 두려움으로 공포에 떨면서 매달리는 모습이 한편 앙증맞으면서도 생의 초라한 모습으로도 느껴지게 한다.
 
소수이지만 저 모습이 인간들의 생에 집착하는 초라한 모습일 수도 있어서이다. 왜냐면 성공한 이들의 지나친 생의 집착이 자신을 몰락으로 인도하는 일이 종종 일어남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자신이 소낙비에 힘없이 쓸려가는 개미떼의 생인 줄을 모른다. 이처럼 고귀한 생이면서도 또한 한 푼어치도 안 되는 생에 비겁하고 더럽고 추악하게 살아가는 쥐새끼들이 사회 한구석에서 설쳐대고 있어서 안타깝다.   

바로 남의 지식이나 훔치고 담을 넘고 벽을 뚫는 소인배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 쥐새끼들이 이 사회에서 설치고 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자들이다. 다만 자신들의 알량한 탐욕만이 똥주머니에 꽉 차 있을 뿐이다.
 
고인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선에 다가가고 악을 멀리한다고 하였는데, 담을 넘고 벽을 뚫고 빈집에 들어가 지식을 훔치는 쥐새끼들은 인간이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쥐새끼의 탈을 뒤집어 쓴 교활한 자들이다.
 
더구나 지식을 닦아서 고상한 정신을 가지고자 하는 자들이 남의 지식이나 훔치는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본래 고귀한 생을 한 푼어치도 안 되는 생으로 추악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이들에게 도둑의 피해를 당한지가 3,4년의 세월이었다. 아주 상습적이다. 가만히 있으니 모르는 줄로 알고 들어와서 가져갔다. 이름 있는 방범을 시설해도 소용이 없었다. 방범을 시설해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유로이 쥐새끼들은 희죽거리며 가져갔다.
 
그리고 쥐새끼들은 주변에서 온갖 교활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한다. 불쌍하게도 자신의 일을 합리화하려는 불상한 짓거리들이다. 언젠가는 이 모두 들어 날 것이다. 이는 확신한다.

남이 준비한 자료들을 도둑질하는 파렴치한 쥐새끼들이 설사 지식으로 성공을 해도 결국은 도둑질하는 쥐새끼에 불과하다. 자료수집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과 비용과 노동의 대가에서 얻어진 자료들이다. 이처럼 힘들게 준비한 자료들을 쥐새끼들은  교활하게 훔쳐갔다.
 
이로 인해 잃어버린 자의 속마음은 타들어간다.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은 자료들이 잡히지 아니할 적에 오는 허탈과 아픔은 어떻게 말을 다 하는가. 심장을 유리조각으로 찢어 벌리는 고통이다. 이는 반복되는 일과에서 아픔은 되살아난다. 이 반복되는 아픔과 집을 비울 적마다 몰려오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이글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되도록이면 짧은 한 생을 살아가는데 초라하더라도 구차하지 말자, 비굴하지 말자 하면서도 사는 인생의 한 구석에 때로는 구차함을 느끼고 비굴함을 느끼는 것이 인생의 한 모퉁이 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도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강탈하고 살인하고 마치 빈집에 들어가 지식을 훔치는 쥐새끼들처럼 교활하게 도둑놈이 되어서 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지식을 닦는 그들이 성공을 하여 학계나 사회의 요직에서 가슴을 내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 이러한 꼬락서니를 보아야 합니까. 그리고 병든 자들로 하여금 병든 사회를 만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지식을 닦는 자들의 추악한 행동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답하다. 허공이 가슴을 짓누른다.   

지난달 기사사진 속에 지진의 참상을 보면서 작은 집들이 허물어지고 그 곁에서 망연자실하여 울고 있는 주인여자의 줄줄 흐르는 눈물이 한 줄기 강물이 되어 흐름을 보았다. 허물어진 초라한 벽돌들이 쌓인 저 멀리에 버티고 우뚝 서있는 힘 있는 큰 건물이 들어온다.
 
언제나 큰 슬픔은 생에 쪼들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쓸쓸한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지식을 훔치는 쥐새끼들도 버티고 서있는 건물은 들어가지 못한다. 오히려 훔쳐올 지식의 뭉치들이 많이 그것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련만 감히 생각도 못 낸다. 고인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은 정직과 염치가 생명이라고 하던데, 이러한 쥐새끼들이 학계에서 설쳐대고 있으니 반드시 색출하여 지식세계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한다.

분명히 훔친 자의 주변에는 아는 자가 있다. 그리고 혼자서가 아니고 행여 작은 이익에 망을 보고 훔치고 하였을 터. 아는 자가 여러 명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들 가운데는 때로 뭉클뭉클 정의의 마그마가 양심의 물을 만나 분출하고 싶은 시뻘건 용암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고요히 흐르는 시간흐름 속에서 꿈틀대는 마그마와 물이 만나 부글거리는 시뻘건 용암이 분명히 있다. 지난 5월 7일 필리핀 마욘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