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1원'으로는 무엇을 살 수 있었을까?

두번의 화폐개혁과 횡재...'오십환이나 오백만원이나 생각하기 나름'

조종안 | 기사입력 2009/03/05 [05:36]

40년전 '1원'으로는 무엇을 살 수 있었을까?

두번의 화폐개혁과 횡재...'오십환이나 오백만원이나 생각하기 나름'

조종안 | 입력 : 2009/03/05 [05:36]
며칠 전 돈과 관련된 놀라운 통계를 보았습니다. 한국은행이 내놓은 '2008년 알기 쉬운 경제지표해설집'이었는데요. 쌀값이 65년 만에 671만 배가 넘게 상승했고, 1940년에 쌀 80kg 한 가마 가격을 2005년 원화로 고치면 0.02268원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숫자만큼이나 충격적이었지요.  
 
60년이 넘게 지났으니 물가도 오르고, 돈 가치도 떨어졌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특히 화폐개혁을 단행했던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물가관리를 잘못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62년 화폐개혁 이전까지 1달러에 1.300환이었던 높은 환율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70년대 물가상승이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한국은행이 내놓은 경제지표는 천민자본주의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아 여간 씁쓸한 게 아니었습니다. 권력자들의 부정부패는 물가 상승의 요인이 되었고, 정경유착은 경제구조를 절름발이로 만들어 결국 외환위기를 불러왔으니까요. 

 
 
두 번의 화폐개혁

 
제가 태어나고 두 번의 화폐개혁이 있었는데요. 100원(圓)이 1환으로 절하되었던 1953년 화폐개혁은 기억이 희미하고, 10환이 1원으로 절하됐던 1962년 화폐개혁은 직접 영향을 받아서인지 기억이 생생합니다. 10환씩 받던 용돈이 갑자기 1원으로 줄어든 것만도 큰 충격이었으니까요.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납니다. 화폐개혁이 되고 며칠 후 평소 입버릇처럼 어머니에게 10원만 달라고 했다가 된통 혼났던 일이지요. 100환 이상 화폐 유통과 은행예금 지급을 당분간 금지하고 한 세대에 1인당 500원씩만 바꿔준다는 소식 등으로 뒤숭숭하던 차에 10배로 늘려서 달라고 했으니, 어머니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결혼한 누나들이 집에 오면 용돈을 주었지만, 주 공급처는 어머니였는데요. 따라다니며 졸라야 겨우 1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도 2-3일에 한 번씩 받았습니다. 그때는 매일 1원씩 받아서 먹고 싶은 것 맘대로 사먹는 게 가장 큰 소원이었으니까요.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요즘 아이들이 1원 때문에 울었다면 불쌍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아침은 시래기죽으로 해결하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배를 곯으며 사셨던 분들이 호강한 소리 하고 있다고 질책하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요.
 
어쨌든, 코흘리개였던 저에게 50년대 10환과 62년 화폐개혁 후 1원의 가치는 대단했습니다. 1원을 가지고 만화방에 가면 새로 나온 신간은 두 권, 오래된 구간은 다섯 권까지 볼 수 있었으니까요. 둘이서 보는 것까지 허용됐으니, 1원은 친구에게 인심을 쓸 수 있는 금액이기도 했습니다.
 
1원을 가지고 저잣거리에 나가면, 아이스께끼는 두 개, 국화빵은 열 개, 어른 주먹 크기의 구운 고구마는 세 개였고, 추울 때 오뎅(어묵)을 사먹으면 뜨거운 국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습니다. '8자 띠기'를 해서 성공하면, 설탕으로 만든 온갖 동물 모양의 과자를 상품으로 주었는데, 실패해도 개 엿에 콩을 넣어 만든 과자를 몇 개 받았으니, 크게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허탈하고 황당했던 횡재 꿈
 
돈 얘기를 하다 보니까, 여덟 살 때 꿈에서 뭉칫돈을 주웠는데, 셋째 누님이 깨우는 바람에 10환도 써보지 못하고 눈을 떠 무척 속상해했던 추억이 시나브로 떠오릅니다. 자리에 지도까지 그리는 바람에 창피만 당했지요.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하는데요. 심부름 가려고 골목을 나서다 남대문이 그려진 10환짜리 다섯 장을 주웠습니다. 꿈이지만 대단한 횡재였지요. 돈을 어디에 쓸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대문 앞에서 셋째 누님이 빨리 오라고 부르더군요. 부르는 소리에 놀랐는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 고랑에 누고 달려가면서 꿈을 깼습니다.
 
비몽사몽이라고 하나요. 눈은 떴지만 꿈은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누님이 옆에 있었거든요. 잠은 깼지만, 10환짜리 다섯 장은 여전히 눈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주머니를 뒤져봤지요. 하지만, 아무리 더듬어도 종이 한 장 잡히지 않아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릅니다. 셋째 누님이 그때처럼 밉게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사타구니 사이가 이상하더라고요. 해서 슬그머니 손을 넣어봤더니 어이없게도 자리에 지도를 그려놨더라고요. 호주머니에 있던 50환은 날아가고, 아랫도리는 축축하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웃으로 소금을 얻으러 다니지 않았고, 그 지도가 마지막 작품이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10환도 못쓰고 깬 아쉬움이 커서 그런지 기억이 생생한데요. 얼마나 허탈했으면 육순이 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겠습니까. 언젠가 셋째 누님이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얘기를 했을 때 처음에는 창피했지만,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별것도 아니어서 함께 웃고 즐겼습니다.
 
50환과 5백만 원의 차이 
 

총각 때 경험담으로 얘기를 매듭질까 합니다. 저는, 20대 초에 가게를 개업하여 사장님 소리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듣기가 멋쩍어 다방 아가씨에게 이름을 불러달라며 알려주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데요. 젊은 호기였는지 기술도 없이 종업원만 믿고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술도 잘 못했지요. 그래서인지 푼푼이 모은 돈으로, 28살 나던 해에는 오백만 원을 주고 단독주택을 구입했고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덟 살 때 꿈에서 50환을 발견했을 때보다 덜 놀라고 만족감도 그만 못했다는 것입니다. 62년 화폐개혁으로 50환이 5원으로 절하되었으니 백 만 배가 넘는 액수임에도 욕망이 지나쳐 무덤덤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육순이 된 지금, 시골에서 전셋집에 살고 있어도 행복하거든요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