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박정희에게 받은 첫 선물..'전학통지서'

날벼락 같은 '학구제개편'으로 교실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조종안 | 기사입력 2009/03/13 [07:54]

대통령 박정희에게 받은 첫 선물..'전학통지서'

날벼락 같은 '학구제개편'으로 교실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조종안 | 입력 : 2009/03/13 [07:54]
 
▶ 앨범 사진이라서 희미한데요. 1961년 5·16 쿠데타 후에는 국경일이나 기념일마다 학생들을 동원한 행사가 열렸는데요. 당시 걸렸던 혁명구호 현수막입니다.  ⓒ 조종안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은 바이올린과 음악에 조회가 깊은 김영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때는 바이올린을 켜셨고, 고요하고 아늑하게 느껴지는 노래도 알려주셨으며, 수업이 끝나면 예쁜 여학생이 개인교습을 받으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심부름은 4학년 담임보다 더 시켰습니다. 두 시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선생님 댁으로 따뜻한 도시락을 가지러 가야 했으니까요. 하루는 같은 반 친구 '덕근'이가 함께 다니고 싶다고 해서 선생님 허락을 받아 함께 다녔는데, 심부름을 갈 때마다 호주머니에서 콩엿과 깨엿을 꺼내주며 웃던 해맑은 얼굴이 아련한 추억들을 떠오르게 하네요.    
 
도시락 심부름을 함께 가던 첫날, 새장에서 해방된 새가 창공을 날 듯, 뛸 듯이 기뻐하던 모습도 눈앞에 그려지는데요. 공부는 별로였어도 순진하고 착했던 덕근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만나고 싶은 교우입니다. 
 
얼굴이 곱상하고 예쁜 여선생님에게 전하는 편지 심부름도 다녔습니다. 미혼이었고, 성이 저와 같은 조 씨였는데요. 호기심이 발동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쪽지를 펴보고 다시 접는 방법을 몰라 얼마나 진땀을 뺐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하루는 선생님이 돈을 주며 과자를 사다 드리라고 하시기에 제과점에서 비스킷을 사 들고 가니까, 내의 차림으로 나오며 반겨주셨습니다. 선생님을 따라 방에 들어갔더니 몸이 아프셨던 모양인데 과자 그릇을 내놓으며 아랫목으로 내려와 앉으라던 조 선생님의 야윈 모습도 잊을 수 없습니다.
 
▶ 중앙초등학교 신관건물. 아래층 맨 끝이 5학년 때 교실입니다. 전학 갈 때까지 울고 웃던 아련한 추억들을 담고 있지요.  ⓒ 조종안   

불우하고 불운했던 세대
 
한국전쟁을 전후해 태어난 제 또래는 불우하고 불운한 세대인 것 같습니다. 평생교육의 절반 이상이 초등교육에 달렸다는 말도 있듯, 삶의 기초가 다져지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좋은 모습을 못 보고 다녔으니까요. 그렇다고 가정환경이 나쁘거나 교우관계가 나빠서도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아침마다 북한 아이들처럼 교실에 걸린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보고 절을 했고, 4학년 때는 3인조, 5인조 선거로 유명한 3·15 부정선거와,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신, 4·19 민주혁명 현장도 신문을 통해 보았습니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나는 모습도 보았지요.
 
5학년 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요. 선생님들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리긴 했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허허·· 요놈들(군인)이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었네 그려··"하시던 아버지의 한탄과 동네 어른들 대화에서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공서와 길가 담벼락에 붙은 담화문 상단 좌측에는 장도영중장, 우측에는 박정희소장이 사무를 보는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요. 군복 좌·우측 깃에 달린 계급장이 하늘처럼 높아 보였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육군중장 장도영' 멘트가 꼭 따라다녔는데요. 평소 군인을 훌륭하게 봐왔고, 병정놀이를 즐겼던 저라서 무서울 정도로 위엄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후 반혁명 사건으로 장도영이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떠났을 때도 박정희를 마음이 후한 훌륭한 사람으로 우러러봤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100% 믿었던 순진한 학생이 계획된 음모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구국의 결단이라는 혁명을 반대한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고 미국으로 보내니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요.

▶  집에서 구암초등학교 가는 길. 쭉 뻗은 길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물문다리(경포교)와 꺼먹다리가 나오고 논과 밭이 펼쳐졌습니다. 논두렁은 즐거운 등굣길이 되기도 했지요.  ⓒ 조종안  
 
5·16쿠데타의 첫 선물은 '전학통지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가 저에게 가장 먼저 했던 선물은 즐겁기만 했던 등굣길을 멀고 한적한 시골길로 옮기라는 통지였습니다. 당시 용어로는 '학구제개편'이었는데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생활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통치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종례를 마친 선생님이 집에 가기 전에 교무실에 들르라고 하더군요. 평소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가 불안하게 했는데요. 교무실에 들어서자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학구제가 개편되어서 구암국민학교로 전학을 가야 허겄다."라며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전학이라니!'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지요.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친구 집으로의 위장전입 등 며칠을 사방팔방으로 알아보며 방법을 모색해보았으나 계엄 시국에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꺼먹다리와 경포천이 있어서 오가는 길이 위험하다며 "너를 구암학교로 전학을 안 보낼라믄 식구들이 이사를 가야 허는디···."라며 한숨을 내리 쉬었습니다.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중앙초등학교보다 훨씬 멀고, 오가는 길도 위험한 학교로 전학 가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시해도 아무 말도 못하던 선생님이 참으로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스승을 하늘처럼 알았던 저는, 부당한 지시쯤은 선생님이 지키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선생님은 제가 전학을 가면 학업에도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적응하기도 어려울 것을 알면서도 교육청 지시이니 어쩔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나무를 잘해오는 머슴이 팔려가도 서운하다고 하는데, 심부름꾼 제자가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됐으니 아쉬웠을 거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어쩔 수 없이 7월 초쯤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요. 5·16쿠데타 세력이 개혁이랍시고 강행한 학구제개편은 순진한 어린이들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울고 웃으며 정이 들 대로 든 교우들이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헤어져야 했으니까요.
 
전학 날짜가 정해지자 저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요. 한 반에 10-20명이 헤어지는 바람에 교실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고, 추운 겨울에 매서운 바람이 부는 물문다리(경포교) 위를 지나다닐 것을 걱정하는 어머니와 5년을 같은 반으로 가장 친했던 조카, 정든 교우들 모습이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나일론'으로 된 청색 하복을 언제 준비해놨는지 전학하는 날 아침에 입고 가라고 내놓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일론'은 여간해서 입기 어려운 고급 옷감에 속했거든요. 설날에 새 옷을 입으면 창피해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입고 가려니까 쑥스럽더라고요.
 
말로만 듣던 구암초등학교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학교였습니다. 담벼락도 측백나무로 되어 있고 운동장이 넓고 나무와 잔디가 많아 분위기가 고즈넉했는데요. 사람들이 들끓는 상가와 시끄러운 시장골목으로만 다니다, 송아지 울음소리와 무릎까지 자란 벼들이 파도처럼 너울대는 들녘을 구경하며 학교에 가니까 한편 새롭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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