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6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아원그룹
호남제분 설립자 이용구 회장, 그의 발자취

조종안 | 기사입력 2017/01/31 [21:41]

창업 6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아원그룹
호남제분 설립자 이용구 회장, 그의 발자취

조종안 | 입력 : 2017/01/31 [21:41]


 

▲ 호남제분 주식회사 전경(1950년대)     © 동국사

 


"25일 사조그룹은 동아원그룹을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줄임) 동아원그룹의 경영권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사조그룹에 지분을 넘긴 이희상 회장은 쓸쓸한 퇴장을 하게 됐다. 동아원그룹은 창업주인 운산 이용구 회장이 1956년 창업한 호남제분이 모태다. 밀가루 제조 판매를 비롯해 사료, 와인, 식품까지 다양한 업종에 진출해 한때 계열사가 30개가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래 줄임)"- 2016년 2월 25일 EBN 뉴스에서
 
이희상 회장은 이용구 전 운산그룹 회장의 차남이다. 그는 1993년 봄 부친이 별세하자 경영일선에 뛰어들어 본사를 서울로 옮기고 2000년 '동아제분'을 인수하는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 2010년 9월 현재 밀가루 분야 매출 비중은 58.66%, 사료 분야는 41.34%를 차지하였다. 2012년에는 그룹명을 '동아원'으로 개명한다. 그러나 급격한 사세 확장에 따른 차입금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2016년 2월 경영권을 사조그룹에 넘겨주게 된다.
 
'동아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 기업으로 세간에 더욱 알려졌다. 1995년 이희상 회장 장녀(이윤혜)와 전 전 대통령 셋째아들(전재만)의 결혼으로 사돈 관계가 맺어진 것. 따라서 이 회장은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일가 은닉재산과 비자금을 파헤칠 때마다 도마 위에 올랐다. 이렇듯 전직 대통령과 사돈지간이 되면서 여론은 금융기관들이 거래를 꺼려 불이익을 당했을 것이란 의견과 덕을 봤을 것이란 의견 등으로 나뉜다.
 
오늘은 이용구 회장이 1956년 전북 군산시 장미동(내항 부근)에 설립한 호남제분 역사와 이 회장이 1993년 고인이 되기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 호남제분 창고건물 10년 전 모습(이 지역은 1970년대까지 정미소 거리로 불리었다.)     © 조종안


위 사진은 호남제분 공장과 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군산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 170여 개 중 유일한 일본식 창고이다. 1934년 제작된 군산부 지도에는 페인트, 철물, 선구(船具) 등을 취급하는 중본상점(中本商店)이라 표기되어 있다. 건물 소유주는 중본상점 주인 중본삼길랑(中本三吉郞). 주소는 군산부 혼마치(本町) 2정목. 지금의 '해망로 196'으로 근현대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창고가 지어진 1930년대 초 군산항에는 부잔교(뜬다리) 3기와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상옥창고 세 동이 들어선다. 1934년에는 쌀 반출이 200만 석을 넘어선다. 내항 철도 주변에는 1만석 이상 생산하는 정미소 14개와 크고 작은 창고 100여 개가 들어선다. 5만석 이상 생산하는 대형정미소도 여섯 개(가등, 조일, 조선, 화강, 낙합, 육석 등)나 됐다. 이 지역은 광복 후에도 '정미소 거리'로 불리었다.
 
고무신장수 21년 만에 호남제분 설립

 

▲ 호남제분 창고 최근 모습, 오는 5월 근현대사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 조종안


특이한 형태의 창고 건물은 광복 후 정부가 적산으로 몰수하여 관리하다가 1956년 창고 주변 3000여 평에 제분회사를 설립한 이용구(李龍九) 회장 소유가 된다. 이 회장은 만월(滿月)표 고무신으로 유명한 군산 경성고무 전무로 재직하다가 그해 9월 미국에서 원조 식량으로 들어온 소맥을 재료로 밀가루를 생산하는 호남제분을 설립했다.


이 회장은 스무 살 때(1935) 경성고무 대리점을 개업하면서 경영자(CEO)의 길로 들어선다. 근면·성실했던 그는 논산-군산 왕복 250리(약 100km)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사업에 몰두한다. 이만수 경성고무 사장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은 그는 1951년 경성고무 전무로 스카우트된다. 아래는 1957년 경성고무 상무로 경영에 참여, 1964년 사장에 취임했던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전언이다.


"이용구는 충남 논산 사람이야. 일제시대에 논산에다 경성고무 대리점을 열어 돈을 많이 벌었지. 6·25동란 전까지는 군소재지에 5일마다 장이 섰잖아. 군산에서 신발(고무신, 운동화 등)을 사다가 장마다 다니면서 팔았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도매상 규모가 커지니까 신발을 더 많이 가져가게 됐단 말이야. 그리고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내 아버지(이만수 사장)에게 신임도 얻었지.


그러던 중 6·25동란이 터졌단 말이야. 그때 아버님은 노령하시고, 큰형은 고려대 교수 생활하다가 어디로 가버렸고(월북), 작은형님은 경찰 간부였잖아. 나는 군대에 있었고 나이도 어렸으니 회사를 맡아서 할 사람이 없었다구. 그때 아버님이 논산에 있는 이용구를 불러 '네가 좀 맡아서 해보라'고 했지. 그래서 1951년 전무로 온 거야. 이용구가 호남제분을 만들고 경성고무를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군산으로 내려간 거지. 그때가 아마 1957년인가···."


이용구 회장은 1956년 공식적으로 전무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경성고무와의 인연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이용구 회장은 1970년대 초에도 경성고무 전무 자격으로 해외 출장을 몇 차례 다녀온다.


1972년, 당시 미국은 한국에서 수입하는 신발류에 상쇄관세를 부과하기로 정한다. 이에 한국 정부는 상쇄관세 저지를 위한 민관 교섭단체(차관급 1명, 민간기업 대표 6명)를 구성하여 미국에 파견한다. 이때 이용구 회장은 경성고무 전무 자격으로 진양화학, 삼화고무, 태화고무 등 다른 기업 대표들과 미국으로 향한다. 그는 1974년 2월과 3월에도 경성고무 전무 자격으로 업무 협의차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였다.


전국 주요 도시에 점포망 구축

 

▲ 등대표 밀가루포대, ‘간첩침략을 분쇄하자’는 문구가 시대를 반영한다.     © 조종안


한국전쟁(1950~1953) 이후 한국은 원조경제 시대로 진입한다. 미국에서 구호품으로 들어온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 4개와 두 사람이 굳게 악수하는 그림, 그리고 '미국 국민이 기증한 것. 팔거나 바꾸지 말 것'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포대의 그림은 우정과 신뢰를 상징해서 '악수표 밀가루'란 이름으로 시중에 나돌았다.
 
미국이 국내 농산물 가격 유지와 저개발국 식량부족 완화를 위해 보내준 악수표 밀가루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암거래가 성행하였다. 배급소와 종교단체 등에는 밀가루를 배급받으려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지금이야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가 별식이지만 당시에는 절대적인 식량이었던 것. 김혁종(76) 전 동아원 그룹 이사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때는 미국에서 원조해준 '악수표 밀가루'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지. 6·25전쟁으로 대부분 생산 시절이 파괴되어 거리에는 노숙자와 실업자가 넘쳐났고.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가 완제품(밀가루)을 주지 말고 밀로 주든지 공장을 지어달라고 미국에 요청했던 거야. 일자리 창출과 경제 발전 등을 고려해서 그렇게 요구했던 것이지. 국가에서 보증만 서주면 외국 자금을 들여와 공장을 지을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보릿고개 시절(1950~1960년대).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 군산에 밀가루와 사료 대리점이 유달리 많았고, 짜장면·짬뽕 전문 중국음식점을 비롯해 국수공장, 과자공장, 제과점, 찐빵가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호남제분에서 생산되는 상품(밀가루, 사료 등)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호남제분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제분 회사였다. 1957년 하루 생산능력은 130톤. 1963년에는 공장을 증설한다. 1966년 당시 생산품은 밀가루, 정미(精米), 정맥(精麥) 등이었다. 그중 밀가루는 태양표(1등급) 등대표(2등급) 등을 하루에 6000포대(22kg) 생산하였다. 직원은 생산직 포함해서 700여 명. 기계시설도 우수했다. 점포망도 전국 주요 도시에 구축하고 있었다. 그 후 제일사료, 한국산업(정미소) 등을 잇달아 설립한다.
 
정부 요청으로 공장과 본사 목포로 이전

 

▲ 박정희 대통령의 목포 유세를 알리는 1967년 5월 26일치 ‘경향신문’ 1면     © 조종안


1967년, 그해 전라남도 목포는 제7대 총선의 최대 격전지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여당) 후보 첫 지원 유세를 목포에서 가질 정도였다. 유세에서 정국 안정을 역설했던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청와대로 불러 '여당 후보 10명이나 20명이 떨어져도 야당 후보 김대중을 절대 당선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관계 장관들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목포 개발'이라는 주제로 국무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다양한 장밋빛 공약을 쏟아낸다. 그 속에는 삼학도(국유지) 관리권 목포 이관과 함께 제분공장 설립도 들어있었다. 목포 시내에는 천문학적인 현금과 밀가루가 뿌려졌다. '막걸리로 홍수를 이루고 국수로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손꼽히는 향토기업으로 군산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던 호남제분은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1971년 공장을 목포로 이전하면서 밀가루 생산이 중단된다. 이때 회사는 이용구 회장, 이희섭 사장 체제가 된다. 이희섭 사장은 이 회장의 큰아들로 한국제분공업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 지금은 사라진 호남제분 건물, ‘제일산업’, ‘동아원’ 등이 보인다.(2007년 촬영)     © 조종안


1974년 4월에는 호남제분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본사를 목포로 이전한다. 그해 제일사료 공장도 대전으로 옮긴다. 따라서 군산에는 제일산업 사무실만 남는다. 그 배경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는 김혁종 전 동아원그룹 이사가 전하는 당시 상황이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이었지.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목포에 공항을 만들고, 항구를 정비하고, 조성되는 공업단지에 큰 공장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지. 그 속에 호남제분이 걸려들었던 거여. 기업은 정부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군산 사람들이 호남제분 목포 이전을 빼앗긴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
 
그리고 1968년 당시 이용일 경성고무 사장이 군산상고에 야구팀을 만들고, 1971년 전국체전과 1972년 황금사자기를 우승했잖아. 군산에 역전의 명수가 탄생하자 그에 고무되어 한국합판(사장 고판남)은 제일고 축구부를, 백화양조(사장 강정준)는 군산고 농구부를 육성하기로 하지. 호남제분은 군산여상 배구부를 지원하겠다며 배구팀도 만들었는데 본사가 목포로 떠나버린 것이지. 그래서 군산 시민들의 상실감이 더욱 컸을 거야."
 
공장과 본사를 목포로 옮긴 호남제분은 공장을 증설하여(1일 생산능력 1000톤) 국내 3대 제분업체(대한제분, 동아제분, 호남제분)의 하나로 꼽히는 등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1970년대 말에는 제일사료, 일양피혁, 한국농업, 대상, 유성물산, 전진산업, 제일피혁 등 7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으로 거듭난다.
 
잘 나가던 이용구 회장은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던 1980년 3월 증권거래법 위반 및 공갈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다. 호남제분 본사 경리 장부도 압수당한다. 사유는 증권거래소 밖에서 경쟁회사(대한제분과 그 계열회사인 대원제지) 주식을 비싼 값에 대량으로 사들여 경영권을 가로채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 회장이 취득한 주식을 매각하고, 그해 4월 대한제분 주주총회가 개최되면서 해결된다.
 
호남제분 역사, 60년 만에 막 내려
 
이용구 회장은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면서도 1979년 4월 자신의 호(芸山)를 딴 학교법인 운산학원(논산여자상업고등학교)을 고향에 설립하고, 1981년 1월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육영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90년 7월, 전국 시장 공략을 목표로 호남제분을 한국제분으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운산그룹을 출범시킨 이용구 회장은 1993년 4월 일본 게이오 대학 부속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한다. 당시 신문은 이 회장을 충남 논산 출신으로 전진양행, 호남제분, 제일사료 등의 회사를 설립하였고, 한국사료협회 회장을 역임한 신광학원(신광여고) 이사장이라 소개하였다.
 
운산그룹은 이 회장이 세상을 뜨고 그해 7월 막내아들(이희영)마저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로 숨지는 등 불상사가 겹쳐 일어난다. 그때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미국에 머물던 둘째 아들(이희상)이 경영권을 물려받는다. 이희상 회장은 동아제분을 인수하는 등 밀가루를 주력사업으로 사세를 더욱 확장한다.
 
부친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는 이희상 회장. 그는 2013년 검찰수사(전두환 일가 미납 추징금 특별환수팀)를 받고 환수금 일부를 환수당하기도 하였다. 2015년 초에는 유동성 위기에 직면, 주력 계열사 매각작업을 진행하였고, 2016년 2월 경영권이 사조그룹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1956년 군산 장미동에서 시작된 호남제분 역사는 60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덧붙임: 이용구 회장은 군산시 신흥동(구영 1길)에 위치한 히로쓰가옥(등록문화재 183호) 건물주이기도 했다. 호남제분을 설립한 후 히로쓰가옥을 사들여 관사로 사용했던 것.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룹 경영권이 넘어가기 전 계열사 사옥들을 매각하면서도 히로쓰가옥을 처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용구 회장 손녀(이나경)가 소유주인 것으로 전해진다.

 

▲ 이용구 회장이 50~60년대에 살았던 히로쓰 가옥(일본식가옥)     © 조종안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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