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향수 자극하는 군산 원도심권 '꼴라쥬'

박성신 군산대 사회환경 디자인공학부 교수에게 듣는 '기억지도' 이야기

조종안 | 기사입력 2017/03/02 [17:45]

옛 향수 자극하는 군산 원도심권 '꼴라쥬'

박성신 군산대 사회환경 디자인공학부 교수에게 듣는 '기억지도' 이야기

조종안 | 입력 : 2017/03/02 [17:45]

 


[신문고뉴스] 조종안 기자 = 군산대학교는 시민과 함께하는 군산시 도시재생대학(2016년 8월~2017년 1월)을 진행하였다. 수개월에 걸친 운영 성과물을 모아 <시민과 함께 나누는 도시재생 展>(사업 총괄: 박성신 군산대학교 사회환경 디자인공학부 교수)이란 타이틀로 영화동 이당미술관에서 전시회(2월 16일~26일)도 가졌다. 
 

▲ 도시재생 展이 열리는 이당미술관     © 박성신
▲ 전시회에 대해 설명하는 박성신 교수     © 조종안

 


지난 26일 오전 이당미술관에서 박성신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는 "그동안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감대를 형성했던 주민들이 바쁜 중에도 찾아와 따뜻한 시선을 보내줄 것이기에 미더웠다"며 "전시는 주민들이 고민한 도시재생사업 참여 계획, 직접 챙겨주신 먼지 덮인 생활용품들, 옛 문서, 초등학교 앨범사진 등 오랜 시간의 파편들을 모아 기억의 단층을 형성했다."고 소개한다.


박 교수는 "이번 전시회는 도시재생사업 결과를 여러분과 공유하는 자리로, 공감대 확장을 위해 지난 흔적들을 기록한 <옛 기억 속, 나의 살던 群山은>(과거), 원도심권 토박이 주민들의 생활 이야기를 담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은>(현재) 지역 주민들의 소망을 그대로 담아 전하는 <우리가 살고 싶은 GUN SAN>(미래) 등 3개 부문으로 나눠 꾸몄다."고 부연한다.


도시재생대학 성과물인 다큐멘터리 동영상 <군산의 기억:Memories of Gun san>(제작: 오원환 군산대학교 미디어문화학과 교수) 상영도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기억 지도와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 도시재생대학 성과물인 책자들     © 조종안

 


2016년 군산시 도시재생대학은 주민강좌, 금요강좌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결과물을 3권의 책으로 엮었다. 1권은 강사들 강의 모음집인 <군산금요강좌>, 2권은 원도심권 주민들이 생각하는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군산인>, 3권은 지역주민, 도시재생대학 수강생, 인터뷰 참여자들의 회고 및 신문기사, 사진 등을 수록한 <군산기억지도>이다.


그중 프롤로그(옛 군산, 記憶··), 영화동(永和洞), 월명동(月明洞), 개복동(開福洞), 그 너머(원도심권) 등 다섯 챕터(Chapters)로 구성된 <군산기억지도>가 눈길을 끈다.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 군산항역,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군산지방 항만청, 조선은행 군산지점, 남조선전기주식회사, 전매청, 법원·검찰청,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등이 다양한 사연과 함께 실렸다.


 

▲ 1930년대 군산항역     © 군산시

 


앞에 소개된 군산항역은 지금의 금동, 영화동, 월명동 지역 일본인들 편의를 위해 1931년 8월 1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역사(驛舍)는 장미동 군산세관 부근(한국전력 군산지점 뒤편)에 있었다. 이 역은 1930년대 군산선(군산-이리)과 군산-전주를 오가는 협궤열차(경전철) 시발역이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에서 유일한 부영(府營) 철도인 '서빈 철도'가 개통되어 더욱 활기를 띠었다.


군산항역은 개찰구만 있는 간이역이었다. 그럼에도 이용객은 물론 화물량도 예전 군산역보다 훨씬 많았다. 도선장(군산~장항)과 이웃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지와 가까웠으며, 부청(府廳)을 비롯해 관공서, 금융기관, 상가가 밀집된 도시의 심장부였기 때문이었다. 군산항역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는 1943년 12월 1일 모든 운송 기능을 부두 화물역에 남겨주고 문을 내린다.


 

▲ 광주민주항쟁을 배경으로 제작된 <화려한 휴가> 촬영 장면     © 화려한휴가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구영2길)는 1943년경 신축된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이다. 광복 후 외자청(부흥부장관 소속) 조달청 등이 입주하였고, 2014년까지 군산시청 제3청사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수탈의 역사를 입증해줄 증거물이기도 하다. 중일전쟁(1937) 후 일제가 식량 가격 및 유통량을 조절·통제하기 위해 조선식량영단을 특수법인으로 설립하고 군산출장소를 설치했던 것.


식량영단 건물은 서양의 고전적 경향에서 모더니즘 경향으로 변화하던 과도기적 시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2007) 촬영지이기도 하다. 도로에서는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장면을 촬영하였다. 건물은 <이주일 쇼> 공연 예고 간판이 내걸린 문화극장으로 등장한다. 이 건물은 2014년 9월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600호로 지정됐다.
 

▲ 카페로 탈바꿈하기 전 영화동 쌀 창고(2009년 촬영)     © 조종안


<군산기억지도>는 광복 후 베이스택시(미군전용 택시)를 비롯해 미군클럽, 양색시 쪽방촌, 초상화골목, 양복점골목, 양키골목, 선술집거리, 종합체육관, 애육원, 목재소, 건재상, 잡화점, 병원, 한의원, 사진관, 여인숙, 식당, 다방, 슈퍼, 서점, 약국, 양장점, 메리야스 공장, 모기향공장, 사이다공장, 연탄공장, 유리공장, 제약회사, 쌀 창고를 리모델링한 카페 등 170여개 업소와 공장, 추억의 명소 등을 소개하고 있어 옛 정취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중간마다 사진과 함께 소개되는 <군산의 옥·屋과 당·堂>, <군산의 가로·街路>, <군산의 극장>, <군산의 중국집> 등은 내용을 더욱 풍성하고 맛깔스럽게 하면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한다.


"역사가 오래된 음식점 상호에는 대부분 옥(屋)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상당수 음식점들은 음식점을 뜻하는 접미사로 옥(屋)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옥(屋)은 일본어로 야(や)라고 읽으며 옥(屋)으로 끝나는 음식점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줄임)


빵집 간판은 'ㅇㅇ당' 같은 일본식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제빵 기술자들이 일본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까닭이다. 일본어로 당(堂)자는 집이나 따로 지어진 사랑채와 같은 건물을 뜻하는 말로 '~하는 집', '~집'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빵집뿐 아니라 여러 상호명이나 건물명에도 사용될 수 있다."-<군산기억지도> 47쪽


"지금은 없어졌지만 빈해원 바로 옆에는 중국 음식을 주메뉴로 하면서 한식과 양식을 망라한 '만춘향'이 자리 잡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서도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양식(樣式)의 식당이 군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당시 군산 경제와 군산화교의 호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군산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의 맥은 지금도 국제반점, 신풍원, 제일반점, 영빈각, 영화원, 홍영장 등의 간판을 달고 면면히 이어지며 군산의 중화요리 업계를 주름잡고 있다." <군산기억지도> 81쪽/ 2016년 7월 5일 <NSP통신> 재인용
 

▲ 옛 만춘향 전경(2009년 촬영)     © 조종안


만춘향(萬春香)은 주인이 화교였음에도 한식, 일식, 중식, 양식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 백화점이었다. 만춘향 요리는 약간 느끼하면서 차이나 향이 찐하고 빈해원 요리는 순하고 담백하다는 게 70~80년대 군산 미식가들의 평가였다. 그처럼 빈해원과 쌍벽을 이루며 호황을 누렸던 업소가 언젠가 주차장으로 변해 예전 단골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는 추억의 장소가 됐다.


만춘향은 군산 화교소학교가 처음 둥지를 튼 곳이자. 한강 이남 화교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뜻있는 군산의 화교들이 1941년 10월 10일(쌍십절) 이곳에 있던 중화상회(화교협회) 건물 일부를 임대받아 서울, 인천 다음으로 중국 어문강습소를 개소했던 것. 제주, 목포, 순천, 광천, 홍성, 전주 등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 기숙사도 갖췄던 중국 어문강습소는 이듬해(1942) 군산 화교소학교로 정식 인가받고 격랑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른다.


기억지도는 도심의 단편을 추출해낸 '꼴라쥬'
 

▲ 여행객들에게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보라고 제안하는 박성신 교수     © 조종안


군산시는 근대역사 체험 공간과 탐방로 조성을 목표로 월명동, 영화동 내 업소 150여 개 간판 및 안내판 교체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아니면 60~70년대 건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박 교수는 "지역의 가치를 잘 알리기 위해 시행한다지만 각 매장의 특성을 살리기보다는 '1930년대'라는 획일화된 콘셉트로 비늘벽을 흉내 낸 간판들이 원도심이 지닌 시간의 깊이와 다양한 공간을 덮어버려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진다"며 아쉬움을 표시한다.


박 교수는 "군산은 광복 이후 항만 기능이 극도로 약화됐다. 1990년대에는 관공서(시청, 세무서, 법원, 검찰청 등) 이전, 고령 인구 증가 등으로 원도심권은 한동안 쇠퇴의 길을 걸었다. 몇 해 전 시작된 도시재생 사업은 원도심권 활성화에 기여함과 동시에 도시 변형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며 "이미 사라진, 곧 사라져버릴 군산을 기억하고자 도심의 단편을 사람들로부터 추출한 '꼴라쥬'가 바로 이 기억지도"라고 말한다.
 

▲ 도심에 홀로 남은 동인제약 굴뚝.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하다.(<군산기억지도> 42~43쪽)     © 조종안


"기억지도는 서툰 아카이브 작업일 수도 있습니다. 아카이브 작업은 2016년 도시재생대학 강좌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옛 군산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에서 출발했죠. 개인의 일상과 생활을 채록하고 정리하고, 실제 현장을 찾아다니며 여러 사람의 기억들을 퍼즐처럼 맞춰나가 공공의 기억을 지도로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세대를 만나면서 군산은 일제강점기 역사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켜가 겹겹이 쌓인 살아 있는 도시임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박 교수는 "기억지도는 길을 잃은 여행자들이 미로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며 "옛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골목과 모퉁이를 돌다 보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고, 또 군산이 지닌 시간의 적층을 들춰보고 상상하며 도시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박 교수는 서울 토박이다. 군산에는 2010년에 처음 내려왔다. 그러니 군산 나이로 치면 올해 일곱 살이 된다. 모두가 생소하고 두렵게 느껴졌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지도 작업을 마무리할 즈음엔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많아졌고, 갑작스레 내리는 눈비를 피해 불쑥 들어갈 수 있는 가게도 생겨났고, 추운데 먹으라며 건네주는 뜨끈한 호떡도 덥석 받아먹을 수 있게 됐단다.


그래서일까. 박 교수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군산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제안한다. 군산이 지닌 순간의 매력을 보고 지나치기보다는 시간 들여 천천히 걷고 머무르면서 진정한 도시의 산책자가 되어보라고, 또 나에게 익숙한 도시로 만들어 보라고.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