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모르는 '박근혜' 마키아벨리스트?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 기사입력 2017/03/30 [07:13]

부끄러움 모르는 '박근혜' 마키아벨리스트?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 입력 : 2017/03/30 [07:13]

고전에 대한 대개의 해석이 그러하듯,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평가도 긍정과 부정의 양 극단으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부도덕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악마의 서(書)라 낙인을 찍고, 다른 쪽에서는 비정한 현실세계의 실상을 폭로한 고전이라고 상찬한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사악한 버전(version)으로 한 권, 숭고한 버전으로 한 권해서 따로따로 두 권의 『군주론』을 쓴 건 아니다. 똑같은 내용으로 된 『군주론』을 읽고서 정반대의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주론』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적 흥미를 자아낸다.

 

 

▲ 삼성동 박근혜 자택 인근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공개적으로 군대반란을 요구하고 있다.     ©임두만

 

 

마키아벨리는 왜 『군주론』을 썼고, 거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걸까?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전언(傳言)은 무엇이고, 또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불타오르게 한 전언은 뭐였을까? 그런 상반된 관점을 ‘지금 여기’에서는 또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서 이런 문제들을 상론할 생각은 없다. 그저 서생의 입장에서 『군주론』에 기대어 지난 세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인물들이 보여준 행태를 잠시 생각해 보려 한다. 

 

제목 때문에 『군주론』은 마치 한 개인으로서의 군주를 다루고 있는 듯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군주를 ‘사적 개인’이 아니라 ‘공적 인격체’로 바라본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즘의 이해에 중요하다. 『군주론』이 마치 ‘어떻게 독재를 할 것이며 그런 폭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지침서인양 착각하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공을 들여도 착각으로는 결코 사실의 탑이 될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와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익 일치를 의심하지 않지만, 이런 그의 가정을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군주론』 집필이후 500년이 더 지난 역사 자체가 <인격체로서의 군주>와 <‘국민’국가>는 별개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즉 봉건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공화제 하에서는 대통령이라 불리건 수상이라 불리건 정권(정부)이 곧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군주(현대의 대통령)=국가>라고 믿는 몰지각한 일부가 없진 않다. “궁궐에서 쫓겨나~”, “사약”, “마마” 따위의 표현은 그들의 시대착오적 망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힘주어 말하려했던 것은 군주란 자기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폭군이나 권력자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추구하는 정치적 행위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전제조건이 지켜질 때에만 군주의 행위는 사적으로 비윤리적 행위라도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존립이라는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의 장이 정치이므로, 거기에서는 ‘윤리적 선’이 자동적으로 ‘공적인 덕’으로 전환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기의 선함이 결과의 선함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즉 개인적으로 선한 의도가 반드시 훌륭한 공적 성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이 빚어졌다.

 

우리가 『군주론』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공공의 이익(마키아벨리 당대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통일된 국가의 건설과 유지)을 위해 정치라는 공적 영역 내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즘이란 국가의 공적-보편적 목적이 아니라 군주 개인의 사적 이익이나 특정 파당의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나쁜 수단을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권력자가 자신의 사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작태는, (김욱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사이비마키아벨리즘”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사적 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주의주장도 아니다.

 

마키아벨리즘은 한 마디로, 나쁜 수단을 써서라도 좋은 목적을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인간은 구원을 바라는 경견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존재가 아니라 세속적 업적을 중시하면서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존재였다. 군주의 정치행위도 이런 이해 타산적 인간들의 세속적 현실세계에서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군주란 그런 상황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은, 좋은 수단을 써서 좋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쁜 수단을 쓰는 것은 나쁘다고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수단을 통해서나마 좋은 목적을 이루었느냐를 따지는 게 더 합리적”(고명섭)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악한 수단을 써야할 경우조차 그것을 잘 계산해서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악하고 잔인한 짓을 남발한다면 군주는 두려움의 대상에서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므로, 즉 조롱꺼리가 될 것이므로 국민의 명예와 재산을 함부로 침탈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마키아벨리즘을 이렇게 이해하면, 박근혜는 마키아벨리스트가 아니다. 그와 그의 수하이길 자처한 자들이 보여준 일련의 행위들에서는 대한민국의 공공이익과 주권재민의 원리를 수호한다는 목적의 정당성도 찾아볼 수가 없고, 잔인한 조치조차도 초래할 결과를 합리적으로 타산해서 써야한다는 계산합리성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박근혜와 그의 일당들은 한낱 사이비마키아벨리스트였을 뿐이다.

 

 그나저나 박근혜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어보긴 했을까? 아마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여느 대통령들이 으레 공개했던 휴가 독서목록조차 공개한 적이 없었다. 독서 목록이 알려지면 해당 출판사 특혜 시비가 있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다른 출판사가 소외받을 수 있어서라고 했지만, 책을 읽지 않아서 발표할 게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서재에는 제대로 된 책이 없었다”는 증언은 과장이 아니며 그가 책읽기를 기피하고 드라마를 즐겨 봤다는 얘기는 낭설이 아니었다.

 

물론, 박근혜가 『군주론』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는 없다. 소설가 이외수의 말처럼 “인간을 제외한 지상의 어떤 동물도 책을 읽지 않는다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고전을 읽지 않았다고 꼭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고전은 누구나 칭송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비틀어 말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국정을 담당했을 당시, 헌법을 도외시하고 주권재민의 원리를 몰랐던 (척하는) 것은 결코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다. 공인(公人)에게 그것은 비난과 처벌을 받아 마땅한 죄이다. 사인(私人)이 된 그에게 이제 곧 주어질 긴 영어(囹圄)의 시간에 고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헌법은 읽어보았으면 싶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전직(前職)놀음은 고사하고 인간노릇 하기도 어렵고 무망(無望)할 것이므로!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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