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제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미군 범죄 책임 추궁 위한 외교적 협상 위헌?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기사입력  2017/04/20 [08:49]

 

<동백꽃지다>는 강요배 화백의 4.3사건 화집(畫集) 이름이다. 나는 지난 주말에 제주 관덕정(觀德亭)에서 동백꽃 흩뿌리는 굿의 장면을 보았다. 관덕정은 제주목사가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곳에 세워진 정자로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제주도의 역사공간으로 제법 운치가 느껴진다.

 

그날 관덕정에서는 오전부터 해원굿이 펼쳐졌고 오후 세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해원굿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사망한 여섯 분의 혼령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분의 작은 아버지(당시 15세 소년이었다)도 그 때 사망하였다. 관덕정은 이래저래 이재수의 난부터 이덕구의 시신 전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한을 담고 있다.

 

▲동백꽃이 흩뿌려져 있는 제주4.3해원굿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 편집부

 

 

제주4.3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조성된 제주평화공원에는 제주4.3사건의 맥락을 촘촘하게 엮은 역사의 동굴이 있다. 그곳을 지나노라면 늘 감정의 혼란과 도발이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1948년 4월 3일에 공산주의자들의 무장봉기와 지서습격, 경찰살상이 사건의 발단이고 정부의 진압은 당연한 것이며 그 와중에 다수 민간인의 사망은 불상사였다는 식으로 강변해왔다.

 

그러나 2000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4.3위원회가 공식화한 4.3사건은 이와 달랐다. 사건의 발단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원의 무장봉기가 아니다. 이미 1년 전 1947년 3.1절 행사에서 군정청의 기마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단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민 수 만 명이 3월 10일 총파업에 동참하였으며, 이에 군정청은 예비검속을 단행하였고 육지에서 응원경찰대를 파견하였고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을 투입하여 1948년 4월 3일 전까지 도민 2천 500여명을 검거하였다.

 

그 사이에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민 3인을 고문치사케 하였으며 그중에는 중학생도 끼어있었다. 친일경찰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지속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가 노골화되는 시점에 이러한 만행에 화가 난 의혈청년들이 사태를 좌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붉은색이 진할수록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이다. 사진 출처 - 제주4.3위원회백서    

 

 

무장봉기 이후에는 서로간의 인명손실은 불가피하였고, 이에 국방경비대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장 간에 4월 28일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평화는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방화사건의 핵심인물은 대동청년단 소속 우익이었는데 군정청과 언론은 좌익이 방화와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5월 5일에 제주도에서 군정장관 딘 소장을 포함하여 ‘9인 최고수뇌회의’라는 일종의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조병옥과 김익렬의 유명한 육탄전이 벌어졌다. 5월 6일 온건파 김익렬은 연대장에서 해직되고 박진경 대령이 그 자리에 왔다. 미국은 이미 김익렬의 평화협상과 유화정책을 완전히 배격하고 강경진압을 기도하였다. 가을부터 해안선에서 5km떨어진 중간산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기획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한라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9인 최고수뇌회의에 참석한 인사들  사진 출처 - 구글    

 

 

미국은 당시 소련점령지역인 북한에서는 평화가 유지되는데, 미국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사회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소련당국의 비판에 자극받아 제주4.3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규정하고 강경진압을 단행한 것이다. 당시에 미군이 학살 작전에 직접 관여한 예를 찾기는 어렵다.

 

이미 미국의 충실한 하수인들(친일경찰, 서북청년단, 보수우익)이 존재했기 때문에 직접 손에 화약을 묻힐 필요가 없었다. 미군 장교들이 제주4.3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군사적 자문을 해준 사진들과 보고서들이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발견되었으며, 그중에는 북한과의 협력을 감시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봉쇄한 미구축함 크레이그호 사진도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 모든 정보들을 담고 있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볼 수 있다. 4.3사건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집중적으로 자행되던 48년 겨울부터 49년 봄 사이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사작전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4.3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한반도에서 현재까지 미군에게 군사작전권이 없는 시기는 1949년부터 1950년 7월 사이 1년 남짓한 기간뿐이다).

 

▲ 크레이그호의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뉘른베르크 재판과 극동군사재판을 통해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를 처벌하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에서 인도에 반한 범죄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4.3학살에 대한 미국의 국제법상 책임은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책임을 어떻게 추궁할 수 있을까?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악명 높은 미라이학살(1968년 민간인 370여명에서 500여명 정도가 학살당했다)에 대해서도, 한국전쟁중 충북 영동의 노근리학살(300여명 정도의 피난민 학살)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규약에 가입하였지만 미군의 국제형사재판소규약 위반범죄(침략범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제노사이드)의 기소에 대해서는 미국과 면제협정을 체결하였다. 미래에 자행될 미군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한국정부가 과거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다.

 

최근에 미국책임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판결이 하나 있다. 한국전쟁 중 미군이 포항해변의 피난민에게 포격을 가해 살상한 사건에 대한 2016년 국가배상소송에서 대법원은 미군의 행위이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책임이 없다는 아주 명쾌하지만 실로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

 

동맹국인 미국의 행위를 한국을 위한 행위라고 해석한다면 이는 한국정부의 책임으로 인정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위안부피해자 및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해 한국정부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외교적 협상을 펼치지 않은 것을 위헌이라고 결정한 201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시사 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논지를 그대로 활용하면 한국인에 대한 미군 범죄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외교적 협상을 개시하지 않는 한국정부의 부작위 및 면제협정도 똑같이 위헌적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다음 정권은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지 자못 궁금하다. 누구나 알 것이다. 지난 정권의 몰락의 10대 원인중 하나가 한일간의 그릇된 위안부 합의였다는 점을.

 

국제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미국을 상대로 어떻게 법의 세계로 인도할 것인지 기대와 걱정이 앞선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마찬가지로 제주도민들도 식민주의적 학살의 집단적 피해자였다. 제주4.3평화공원을 걷다가 국제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꾼다.

 

평화공원의 각명비와 위령비 옆에 미국이 4.3대학살을 지휘하고 관여한 데에 책임을 인정하는 진지한 미국의 사죄비가 4.3사건의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는 세워지기를 바란다. 소녀상을 세우듯이 우리는 학살이 자행된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학살의 주체들을 밝히는 비석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실린 글 입니다.

 

배너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7/04/20 [08:49]  최종편집: ⓒ 신문고뉴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배너
배너
주간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