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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성포, 언제부터 째보선창이라 했을까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째보선창 100년 (1)
 
조종안   기사입력  2017/07/04 [20:47]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상왕 장보고(?~846) 역사가 말해주듯 바다를 주름잡았을 때 나라도 융성했다. 임진왜란 역시 이순신 장군이 45전 전승의 신화를 창조하면서 바다를 지켰기에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특히 서해는 예로부터 어족자원의 보고로 알려진다. 서해안 중심부이자 금강 하구에 자리한 군산의 여러 포구 중 애환과 영욕이 서린 죽성포(째보선창) 100년의 자취를 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기자말 
 

▲ 군산 객주상회 단체사진(1907)     © 동국사

 


근해 어족자원이 풍부한 군산은 조선 시대부터 어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대표적인 포구로 죽성포(째보선창), 경포(설애장터), 궁포(구암포), 월포(달개나루), 서포(서시포), 나포(나리포) 등을 꼽는다. 이곳에 거주하는 객주들은 여각을 운영하며 어부들이 잡아 온 물고기를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였고, 보부상들은 각 지역의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군산은 조선 시대 전라도 7개 고을 세곡을 취급하는 군산창이 있어 객주도 많았다. 이곳 객주들은 군산포, 죽성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다수에 따라 시행하라'는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하자 객주 90여 명은 상권을 지키기 위해 순흥사(順興社), 영흥사(永興社), 창성사(昌盛社) 등 각종 상회사(商會社) 설립을 추진하였다.


순흥사는 군산이 개항하던 해(1899) 조직되고, 영흥사는 1900년 설립된다. 1903년 창립된 창성사에는 60여 명의 객주가 참여한다. 당시 <황성신문>은 군산지역 객주들의 활동으로 일본 상인들의 경제침투가 어려웠다고 보도하였다. 군산의 객주들은 을사늑약(1905) 이후 국채보상운동과 교육 사업을 지원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째보선창은 옥구군 죽성리에 속했던 죽성포의 별칭이다. 나지막한 석산(石山) 주위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일명 세느강)와 대밭이 성(城)처럼 마을을 감싼 모습이어서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라 불렸다 전한다. 이 지역은 봄 안개 자욱한 대나무숲 풍광이 그지없이 아름다워 '군산 팔경'에 들기도 하였다.


째보선창 유래도 사뭇 해학적이다. Y자로 살짝 째진 강안(江岸)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포구가 째보(언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또 하나는 이곳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부둣가에서 날품팔이나 노점을 차리려면 그에게 자릿세를 상납해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째보 객주가 사는 선창이라 하여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째보선창 부근에 있었던 사업체와 기관
 

▲ 금암동에 있었던 동부어시장(1935)     © 군산부사


죽성포는 1932년 10월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동빈정(東濱町)이라 하였다. 군산어업조합과 수산물 위판소(동부어시장)가 있어 '동빈'으로도 불렸다. 동빈정은 광복(1945) 후 왜식 동명 변경으로 금암동(錦岩洞)이 된다. 금암동 역시 바닷물이 드나드는 간석지였으나 매립공사로 육지가 됐다. 옥구군 경장리에 속했던 이 지역은 1932년 군산부로 편입되면서 일출정(日出町)이라 하였다. 일출정은 광복 후 일출동이 됐다가 금암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1930년대, 당시 동빈정(1~3정목)에 있었던 주요 사업체 및 기관은 군산어업조합을 비롯해 전북어업조합 판매소, 신탄시장(숯, 장작 등을 파는 시장), 전라북도 수산시험소, 임경상점(林兼商店·군산냉장고), 수호제염소(水戶製鹽所), 중도인길(中島寅吉) 선구상, 황목조선소, 전북조선철공소분공장, 정목조선철공소, 대척조선철공소. 해안순사파출소, 경마장(헌병, 경찰기마대 훈련장) 등이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해안순사파출소는 군산경찰서 직할로 1914년 설립됐다. 놀라운 것은 군산보다 개항이 2년 빠른 전남 목포경찰서 해안순사파출소와 같은 해 설립됐다는 것이다. 헌병과 경찰기마대 훈련장도 동빈정에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째보선창 일대가 일제 경찰의 요시찰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 째보선창 앞 민야암 등대     © 조종안


째보선창은 군산지역에서 객주가 가장 많은 포구였다. 여객선 선착장이 있었고, 지금의 싸전거리 부근에 객주거리도 조성됐다. 어부들의 길잡이인 등대도 일찌감치 설치됐다. 지금도 금강 파수꾼처럼 우뚝 서 있는 민야암 등대가 그것이다. 등대 점등일은 1933년 10월 1일. 이는 일제강점기 금강은 전라·충청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뱃길이자 수탈의 통로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조일통어장정(1889) 이후 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한 일제는 군산 개항(1899) 전부터 경포와 고군산군도 각 섬에 일본인촌을 조성하였다. 1900년에는 후쿠오카 어민 30호를 지금의 해망동에 이주시킨다. 째보선창에서 가까운 가등정미소 골목에도 일본인 부자촌이 조성된다. 그곳 일본인 선주들이 보유한 고깃배는 대부분 동력선이었고, 어구·어법이 우수해 어획량이 조선 어민들보다 항상 많았다.


동력선(木船) 보유율에서도 일본 어민과 조선 어민의 경제력, 기술력 차이가 느껴진다. 군산부청이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35년 4월 당시 군산부에 속한 동력선은 모두 73척(1천 톤 이하)이었다. 그중 조선총독부 소유 6척, 전라북도 소유 1척, 일본인 소유가 49척이었고, 조선인 소유는 14척에 불과했다. 동력선 전체의 80% 이상을 일본인들이 차지했던 것.


일제가 설립한 수산학교도 있었다. 1915년 군산공립농립학교 부설 간이실업학교로 개교했다가 1916년 째보선창 부근으로 옮기면서 '군산 간이수산학교'로 정식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전라북도 보조금으로 교실, 기숙사 등을 갖췄다. 교사는 단층 목조건물이었고, 소형 실습선도 3척 있었다. 교과 과목은 일본어, 조선어, 산술, 수신(修身), 그물 짜기, 기관 설비, 항해 등이었다. 조선인 학생도 다녔던 수산학교는 1923년 폐교된다.


1920년대 중반부터 '째보선창'이라 부르기 시작

 

▲ 군산 째보선창 최근 모습     © 조종안


군산 째보선창은 매립된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났음에도 관광객과 문학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소설을 비롯해 논문, 수필, 기행문, 수상록 등에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도 근대식 포구의 기본 시설인 물양장(物揚場)과 간만의 차를 극복할 수 있는 잔교설치 등의 공식기록은 볼 수 없었다.


모두가 궁금했던 기자는 째보선창 부근 갯벌 매축과 부두 시설물 설치시기 등을 확인하는데 단서가 되어줄 옛날신문 기사와 행정문서, 흑백사진, 지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중 죽성포가 표기된 지도(1898)와 동해안(째보선창) 매축공사 관련 신문기사(1926), 잔교 가설공사 서류(1929) 등을 소개한다.


1926년 11월 10일. 이날 군산 부청에서는 일본인 부윤이 주제하는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전북수산인회 토목출장소장, 군산상업회의소 회두 등. 주요 의제는 군산 어항 설치문제였다. 이어 12일 오후에는 부청 회의실에서 군산부 협의회원 최종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대정 15년도(1926) 추가경정예산 건을 이의 없이 가결하고, 차기 협의회에 인계할 주요과제 11건을 토의하였다.


토의 내용은 군산-제주도 직항로 개시, 군산 전기(電氣) 부영(府營) 실현, 제2기 하수구와 도로 개수. 조선인 공동묘지 확장, 전북-충남 도선(渡船) 잔교 신설 및 객선 대형화 추진, 군산공원 월명산까지 확장, 신사(神社) 이전, 어항(漁港) 설비 실현 촉진, 군산개항 30주년 기념 공진회 개최, 상수도 확장, 동해안 매축 상업회의소와 공동시행 등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동해안 매축공사 시작을 알리는 보도가 뒤따른다.
 

▲ 동해안 매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군산 항만 수축에 반(伴)하야 동해안에 약 3천 평을 매축하고 신탄시장(薪炭市場)급 염건어(鹽乾魚) 공장 등을 신설하기 위하야 군산부와 군산상업회의소와 타협한 결과 부급의소(府及議所)에서 공동 경영하기로 출원 중이라 하며 우(右) 사업이 실현되는 때에는 상업회의소에서는 약 3만 원의 재원을 득케 되야 차(此)를 군산항 30주년 기념 공진회 개최시 비용 일부에 충용(充用)하리라 하며 공사는 명년(1927) 9, 10월 출곡왕성기(出穀旺盛期)에 완성됨을 따라 미곡(米穀) 적재하기에도 다대한 편의를 여(與)하리라더라."


1926년 11월 24일 치 <동아일보> 기사이다. 기사에 나타나듯 당시 군산부는 조선총독부 재가를 받아 동해안(째보선창) 갯벌 3000평을 매축하고 강기슭에 콘크리트 축조물과 잔교를 설치하는 등 근대식 부두 조성작업에 착수한다.


1933년에는 운영권을 일본인이 거머쥔 군산어업조합(조합장 군산 부윤)이 출범한다. 그리고 일제는 째보선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 객주들의 해산물 위탁 판매권을 통제한다. 일찍이 설립됐던 객주조합도 문옥조합(問屋組合)으로 바뀐다. 따라서 1930년대 군산에는 곡물 문옥조합과 해물 문옥조합이 존재하였다. 이 모두가 조선 어민들의 어업권과 객주들 상권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경술국치(1910) 이후 일제는 지금의 해망동에 서부어시장을, 금암동에 동부어시장을 개설한다. 당시 해망동은 군산의 중심지로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고, 금암동은 외곽지역이었다. 그런데도 서부어시장 거래 규모가 동부어시장보다 현저히 작았다. 이는 개량된 선박과 근대화된 어구를 갖춘 일본 어민 대부분이 동부어시장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 1929년 군산 부청이 조선총독부로 보낸 잔교 평면도(오른쪽)와 서류(왼쪽)     © 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자료(조선총독부)에 따르면 1918년 서부어시장, 1923년 동부어시장(군산 부영수산 동빈시장)이 들어선다. 그리고 1928년에는 동해안(째보선창)~항만, 항만~도선장까지 수면매립 공사가 완공된다. 이어 1929년 동해안에 잔교(길이 49m, 폭 4m)가 설치되면서 어항으로서 제반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된다. 째보선창은 이처럼 일제의 필요에 의해 일제의 주도로 탄생하였다.


따라서 째보선창이란 지명은 동부어시장이 건립되는 1923년에서 매축공사가 끝나고 포구에 근대식 어항 시설이 갖춰지는 1929년 사이, 즉 192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 <탁류> 주인공 정주사가 강 건너 용댕이(서천)에서 식솔들을 데리고 째보선창 부두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도 그때쯤이어서 흥미를 더한다. (계속)
 
참고문헌: <군산시사> <군산수협70년사> <한국학중앙연구원> <군산역사이야기> <군산상공회의소 100년사> 등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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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04 [20:47]  최종편집: ⓒ 신문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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