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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기사입력  2017/09/17 [06:03]

벌써 20년 전 무렵의 일입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지역의 통일 운동 단체에서 3년 넘게 활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시작할 때는 특별히 통일 운동에 대해 거창한 사명의식 같은 건 없었고, 학교를 그만둔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배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시작한 이른바 첫 사회생활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윤이상 선생은 고향 통영 출신의 음악가로 고등학교 교가의 작곡가란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선생이 현대음악계의 거장으로서 ‘동백림 사건’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당시의 나를 적잖이 흥분시켰습니다.

 

비교대상은 될 수 없었지만 같은 고향이란 점과 통일 운동의 끈으로 윤이상 선생님과 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역의 보잘것없는 활동가였던 저에게는 큰 위안이었고 자랑거리였습니다.

 

올해는 윤이상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선생은 생전 유럽 음악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의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훌륭한 현대 음악가였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그의 출신지 통영의 분위기는 조금 어색합니다. 물론 100주년을 맞는 9월에는 선생을 기리는 합창, 프린지, 다큐멘터리 상영 등의 다양한 행사가 통영에서 개최된다고 합니다.

 

윤이상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2010년 선생의 생가터 옆인 통영시 도천동에 지어진 기념관의 이름은 여전히 ‘도천테마파크’입니다. 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에 당사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경우는 아마 세계 최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영시는 해외에 나가서는 윤이상 선생의 고향이란 점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활용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이어진 보수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선생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 현 통영시의 비열한 꼼수가 바로 ‘윤이상’이 보이지 않는 윤이상기념관 ‘도천테마파크’인 것입니다.

 

이제는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면서 한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윤이상 선생의 생가터도 통영시가 도로를 새로 개설한다면서 아예 없애려고 했습니다. 사실상 같은 터인 생가터 바로 옆 공방의 소반장 인간문화재 추용호 선생의 천막농성과 강제윤 시인을 비롯한 많은 시민의 반대가 없었더라면 선생의 생가터는 흔적도 찾지 못 할 뻔 한 것입니다. 추용호 소반장의 아버지는 고모부인 윤이상 선생 부친에게서 소반 제작기술을 배워 인간문화재까지 됐고 그 기술을 아들인 추 소반장에게 전승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 바로 윤이상 선생의 생가터입니다.

 

이러한 공간을 없애버리고 70년대 초에 작성한 도시계획에 근거해 도로를 개설하려고 한 통영시의 행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생가터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도 통영시는 공방을 이전하고 도로를 개설하면서 바로 옆의 윤 선생 생가터는 보존하겠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통영시의회는 9월 11일 임시회에서 ‘도천테마파크' 명칭을 '윤이상 기념공원'으로 바꾸는 조례안을 심의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시의원 13명 중 8명이 윤이상 선생에게 부정적인 이념 논쟁을 주도한 자유한국당 소속이어서 과연 조례가 가결될 것인지 걱정스럽습니다.

 

1967년 독일에서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강제입국 당하고 2년간의 복역과 추방 이후 다시는 대한민국과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운명하신 지도 20년이 넘었습니다. 선생은 살아생전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올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습니다. 1994년, 그가 동백림사건으로 강제추방 된 지 25년 만에 서울, 광주, 부산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리고 윤이상 선생도 김영삼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고 입국을 허가해 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선생에게 과거에 대한 반성과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명예회복 차원에서 고국 입국을 준비했던 윤이상 선생은 당연히 각서를 거부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일 년 후인 95년 11월 4일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란 비통한 말씀을 남기고, 고향 통영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 영원히 잠드시고 맙니다.

 

선생이 이 땅에 오신지 100년이 되는 올해 당신의 유골이나마 고향 땅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선생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고향의 푸른 바다와 당신 음악의 원천이라고 했던 밤배 선원들의 노동요를 무덤에서나마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한반도에서 당신의 노력으로 음악을 통한 평화적 남북 교류 사업이 이루어진다면 고국의 흙에 입 맞추며 조용히 하고자 한 말씀을 우리가 상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권연대] 발자국통신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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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17 [06:03]  최종편집: ⓒ 신문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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