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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책임 미루기...”
[사북사태 광부 ‘박노연’-下] 계엄군, 공동체 파괴하고 공권력 불신 초래
 
김아름내 심경호 추광규 이명수 기자   기사입력  2017/11/14 [09:40]

[특별취재팀] 서울의소리=이명수 심경호 기자, 우먼컨슈머=김아름내 기자, 신문고뉴스=추광규 기자

 

스스로를 ‘막장인생’ ‘한센인 다음에 광부’라며 체념적이고 자조적인 의식에 빠져 있던 광부들이 파출소를 습격했다. 흥분한 광부들은 진압경찰에 맞서 싸우면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80년 사북사태라고 부르는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계엄사령부는 관련 인물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하였다. 79년 박정희 시해로 찾아온 80년 서울의 봄을 싸늘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부터 누적되어온 탄광촌의 문제가 분출된 이 사건은 불과 한 달 후 광주에서 벌어질 참극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37년 전 발생했던 사북사태가 현재의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37년 전 사북사태의 한복판에 있었던 늙은 광부들의 입을 통해 당시로 돌아가 보겠다.

    

당시 상황에 대한 보충자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2008년 4월 8일 결정문 등을 인용했다. 기사는 상-중-하로 나누어 총 3회에 걸쳐 게재한다.(기자 주)

 

 

 

▲ 동원광업소에서의 시위     © 사북항쟁동지회

 

    

사태 후 숨죽인 사북 주민들...13일간의 침묵 끝에 

    

부녀자들이 정선경찰서 강당에 마련된 임시 조사실 등에서 성고문을 당하고 있던 그 시간 남성 광부들은 더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검거 과정에서부터 가혹한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합동수사단의 1차 검거작전은 1980년 5월 6일 오후 7시경부터 시작됐다. 수습대책위 회의를 개최한다면서 이원갑 등 광부 10명을 사북읍사무소로 오게 한 뒤 이들을 곧바로 정선경찰서 합동수사단 임시 조사실로 연행했다. 

    

윤병천은 2006년 8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1980년 5월 8일 저녁 7시경 집에 있는데 군복을 입은 사람 둘이 와서 이름을 부르기에 문을 열고 나가니까 양쪽 어깨 팔을 잡고 수갑을 채우더라구요. 그리고는 집 옆에 세워놓은 지프차에 태우면서 군화발로 얼굴을 걷어차 이빨이 5개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 지서앞 집회     © 사북항쟁동지회

 

 

동원탄좌 선산부로 일했던 박노연(78)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강원도지사와 강원도 경찰국장이 이원갑하고 중재해서 해결하면서 ‘걱정하지 말라, 책임은 묻지 않겠다’고 했다. 종업원들은 작업재개가 되면서 현장에 출퇴근했다. 그런데 13일 만에 상황이 깨졌다. 이원갑, 천만성 이 사람들은 5월 6일 붙들려 갔다. 우리들은 5월 7일 연행됐다. 새벽 1시쯤 집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데 난데없이 앞뒤에서 문 두들기고 해서 나가니 합동 수사본부라는 사람들이 무릎 꿇고 앉으라 했다. 군화발로 밟고 등이고 머리고 주먹이 날아왔다. 숨도 크게 못 쉬고 버스에 쳐 박혀 있었다. 새벽 4시쯤 정선경찰서에 도착했다. 권투장 저리가라였다”

    

연행된 광부와 부녀자들은 정선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후 강당 건물 내부에 합판으로 임시 칸막이를 쳐놓고 각 칸에서 조사를 받았다.

    

최홍선은 2006년 8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고춧가루 탄 물을 큰 주전자에 담아 코로 들이부었습니다. 또 무릎 뒤에 각목을 끼우고 꿇어 앉힌 자세에서 허벅지를 군화발로 밟았습니다. 둥근 나무 몽둥이로 전신을 수도 없이 맞았습니다. 정신을 잃으면 고춧가루 물을 먹이고 다시 매를 맞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박대성은 2006년 11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폐군복으로 갈아입고 구타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릎 꿇고 허벅지를 밟았고(생략)...길이 1m 직경 2cm 정도의 고무호스로 등짝을 내려치고 물을 끼얹기도 하였습니다. 노란 주전자에 고춧가루 물을 담아 목을 뒤로 제끼고 얼굴에 부었고 나중에 고문하면서 받은 진술을 틀어주며 그대로 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박노연 씨의 증언이다.

    

“내 기억으로는 한 500명이 경찰서에 다녀갔다. 광부, 직원 등 대질하느라고, 고문에 못 이겨서 누구누구 안다고 말하면 끌어가고 이랬다. 저는 5월 7일 가자마자 무혐의로 풀려 나올 건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새마을부녀회 김부년이 몇 대 얻어맞았는지 쭈그려 있다가 나를 보고 ‘저 아저씨 맞네요’라고 했다.

 

합수단 수사관들에게 ‘얻어맞아도 좋은데 이유를 알고 얻어맞읍시다’고 말했다. 그러자 ‘월남 갔다 온 놈이라 다르네’라고 말하면서 ‘새마을 사택에서 종업원 다 나오라고 방송한 걸 인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했더니 고문이 시작됐다. 옛날 시골에서 돼지 잡을 때처럼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부로끄를 놓고 그 위에 나를 거꾸로 매달았다. 얼굴에 수건을 덮어 씌워놓고 주전자에 고춧가루 탄 물을 코, 입에 부었다. 수입 고춧가루 물이라서 더 독합디다. 킁킁킁 하면서 예예예 했다. 아닌 것도 맞다고 했다.

    

나중에 김부년 한테 ‘아지매, 난 아지매 본 일이 없다. 내가 방송실 자물쇠 열라고 했다는데 자세히 봐라 나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부년이 자세히 보드만 ‘저 아저씨 아니네요’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수사관들은 이제는 김부년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풀려났으면 끝이 났을 텐데 엉뚱한 사람이 나를 가담자로 또다시 지목했다. 종업원들이 죽으면 시체를 처리하는 오 아무개가 있다. 그 사람이 ‘박노연 저 사람이 하나씩 붙들어놓고 줘 팼다’면서 나를 있는 말, 없는 말 하면서 말아 감았다”

    

정선경찰서 강당에 마련된 취조실에 대한 박노연씨의 증언이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취조실이었다. 그곳에 들어갔다 하면 30분~1시간 정도였다. 하루에 5번 들어갔다가 나왔다. 칸칸이 막아놔서 2평씩이나 될까. 그곳에서 고문을 받다가 견디다 못해 수사관에게 차라리 죽을 테니 허리에 차고 있는 대검을 제발 달라고 사정을 하기도 했다”

    

조사과정에서의 고문도 심각했지만, 정선경찰서 유치장에서의 가혹행위도 심각했다.

    

“유치장 간수 정*식 순경이 ‘너희들 중 물건이 큰 놈에게 담배를 한 대 주겠다’며 남자들 하의를 벗게 하고 60cm 정도 나무 회초리로 철창 밖으로 나온 성기를 때리며 ‘이놈은 왜 이렇게 작아’라는 등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습니다.”(박대성, 2006. 11.30 진실화해위 청취)

    

“유치장에서는 거꾸로 세워 놓고는 1m 정도 되는 고무호스 곡괭이 자루 각목으로 닥치는 대로 때렸습니다. 또 유치장 경찰 정*식이가 남자들에게 성기를 내놓게 하고 가느다란 작대기로 성기를 때리고 ‘제일 물건이 큰 놈에게 담배 한 모금 준다’, ‘이 새끼는 되게 크네’, ‘이 새끼는 되게 작네’그러면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정인교, 2006. 11. 29 진실화해위 청취) 

    

박노연 씨의 증언이다.

    

“20일 정도 정선경찰서에 있었는데 2주간 조사하고 윤곽이 드러나자 일주일간은 안티푸라민 하나씩 던져주면서 부은 데 바르라고 했다. 28일 날 원주 1군 사령부 헌병대 영창으로 갔다. 여자들 넷은 원주교도소로 갔다. 남자 24명, 여자가 4명 송치됐다. 그래서 여자 한 명과 남자 여섯 명이 실형을 받고 나머지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 사건을 주도한 이원갑씨     © 사북항쟁동지회

 

 

사람이 죽고 다치고 징역살이 80년 4월 사북이 남긴 교훈은 

    

나흘간의 사북사태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을 당했다.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재산피해도 상당했다. 동력자원부는 사북사건 전체 기간 동안 전체 물적 피해액은 15억 6,400만 원이라고 밝혔다. 31명이 구속당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총 81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더 큰 비극은 지역사회의 붕괴였다.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던 사북사건 주동자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은 피의자에게 제 3자의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을 강요했으며, 수백 명의 관련자들은 가혹행위에 못 이겨 서로 무고한 이웃을 허위로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 그 결과 사북 주민들의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관련자들은 현재까지 서로의 책임을 묻고 있는 실정이다”(진실화해위 보고서 中)

    

또한 사북사건 관련자들은 출소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부는 복직이 이루어졌지만, 블랙리스트로 인해 부당한 취업제한을 당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자진해서 사퇴하는 등 그 상처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면 이토록 큰 상처를 남긴 1980년 4월의 사북사태가 우리시대에 던지는 교훈은 어떤 것일까? 2008년 4월 사북사태와 관련해 진상조사를 마친 진실화해위의 권고내용이다.

    

-국가는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하여 피해자들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가혹행위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회복하고 피해자들과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는 사북사건 이후 연행 구금 되었던 사건 관련자와 그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국가는 김순이와 그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고 관련자들 사이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부상당한 경찰관을 문병하는 도지사     © 사북항쟁동지회

 

    

이 같은 권고는 제대로 이행이 되었을까? 박노연 씨는 사북사태와 관련 바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여러 대의를 생각해서도 아니고 그 순간의 불만을 털어놓기 위해 했던 것은 우리도 40% 정도는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 쪽에서 60% 잘못 된 건데 김순이 같은 사람들은 계엄사 전두환 등이 다 보상해줬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뭘 해줬느냐는 거다.

    

미친개 마냥 날뛰다가 신나게 줘터지고 골병 들면서도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안 쫓겨나려고 기를 쓰면서 탄을 캐고 탄가루 먹고 병들었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등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생활안정자금’이라고 해서 1인당 480만 원 정도 실행했고 그다음에 60만원 인가 한 번 더 줬다. 광주는 특권을 줬다는데 우리는 숫자가 적다보니 냉대시 하고 일언반구도 없다. 조금 서운하다”

    

사북 민주화 항쟁 동지회 이원갑 회장(80)은 “민주화 공로가 인정되면서 실형을 살았던 게 무죄가 됐다. 그러자 형사 보상금이라고 징역 하루당 4만 원인가 보상 받았다. 그런데 그 돈을 받으면 국가와 화해 한거로 보면서 사북사태로는 그 어떤 보상도 추가로 받아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사북사태가 발생한지 37년이 지났다. 당시 사북에서 현장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지역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사북사태의 그 모질게 아픈 경험은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남은 자들 또한 남은 생애는 그리 많이 남지 않을 것이다. 실제 박노연 씨의 경우 지난 10월 중순 원발성 폐암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인터뷰를 마치면서 국가가 사북사태를 다시 평가해 남은 유가족에게라도 금전으로라도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기는 마지막 유언인 셈이다.

 

▲ 사건후 사북지서 청소     © 사북항쟁동지회

 

    

“이해충돌과정이 민주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 해야”

    

문재인 정부 들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하이디스 해고 노동자들은 문재인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지난 11월 2일부터 청와대 앞 노숙농성에 돌입해 있다.

    

썬코어노동조합(위원장 김주훈)은 지난 11월 8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집회를 하고 산업은행의 썬코어 채권매각 중단과 경영정상화를 강하게 촉구했다.

    

이들뿐 아니다. 민주노총 특수고용 대책회의 이영철 의장, 정양욱 건설노조 광주전남건설기계지부장 등 두 사람은 건설근로자법 개정 등을 외치면서 11일(토) 23시경 여의도 국회 인근 영등포방향 여의2교 광고탑에서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박준호 두 사람 또한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면서 지난 12일 새벽 목동에 있는 서울에너지공사 목동열병합발전소 내에 있는 75m 높이의 굴뚝에 올랐다.

    

이들 노동자를 지켜보면서 우리 정부가 취해야 할 길은 자명하다. 진실화해위가 2년여의 조사 끝에 2008년 4월 8일 장문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남긴 권고는 2017년 11월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 25주년 사북항쟁 기념식2005.3.24     © 사북항쟁동지회

 

    

“국가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신뢰를 보호하고 증진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북사건 당시 계엄당국은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였다. 사북사건의 교훈을 통해 국가는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고 사회 집단들의 이해충돌과정이 민주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 될 수 있도록 적극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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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14 [09:40]  최종편집: ⓒ 신문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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