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27] 호구 조사령

강명준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4/08 [06:17]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27] 호구 조사령

강명준 변호사 | 입력 : 2018/04/08 [06:17]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1944. 6. 4.

 

나는 또 나자렛의 집, 마리아가 식사할 때에 있었던 작은 방을 본다. 지금 마리아는 흰 아마포 일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마리아가 등불을 밝히려고 일감을 내려놓는다. 날이 어두워져서 정원 쪽의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푸르스름한 빛은 충분치 못하다. 마리아가 창문을 닫는다.

 

배가 상당히 불렀으나 마리아는 여전히 매우 아름답다. 걸음걸이가 자연스럽고, 몸가짐이 우아하다. 곧 아기를 낳게 될 여자에게서 볼 수 있는 둔중함은 조금도 없다. 단지 그녀의 얼굴만이 변하였다. 이제는 한 여인이다. 맨 처음 영보 때는 침착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하고 순결한 어린이의 얼굴을 가진 어린 처녀였다. 그 후 엘리사벳의 집에서 세례자가 태어났을 때에는 마리아의 얼굴이 세련되어졌고, 그 아름다움이 원숙해졌다. 지금의 모습은 침착하지만 모성 안에서 완전에 이르는 여인의 다정하고 위엄 있는 얼굴이다.

 

▲  이미지 = 픽사베이

 

 

신부님, 그분은 더 이상 신부님이 좋아하시는 피렌체의 ‘성모영보’의 성모를 닮아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분이 소녀였을 때는 그 그림과 닮은 점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그분의 얼굴은 길고 갸름해졌으며, 두 눈은 생각에 깊게 잠기고 길어졌습니다. 요컨대 그 모습은 천국에 계시는 성모님의 얼굴과 비슷합니다. 그분의 얼굴과 나이는 구세주께서 태어나실 때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젊음은 죽음의 부패를 모를 뿐만 아니라 나이 들어가면서 시드는 것도 경험하시지 않은 영원한 젊음입니다.

 

시간은 우리의 여왕이시자 시간을 창조하신 주님의 어머니이신 분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수난 때의 고통으로―그 고통은 훨씬 오래 전에 시작되었는데, 적어도 예수님의 전도의 시작부터라고 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그분은 늙어 보였는데, 노화는 그분의 부패할 수 없는 인성을 덮은 베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순간부터 그분은 그러한 고통 이전의 신선하고 완전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상처들에 입 맞춤으로써 그분은 시간의 작용을 취소하고 고통의 작용까지도 취소하는 젊음의 향유를 마신 것 같습니다. 실은 8일 전 성령강림주일에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제가 보았을 때 마리아는 극히 아름다웠고, 과거에 제가 기록할 때보다 갑자기 더 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푸른 천사 같습니다. 천사들은 늙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아름다운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원한 젊음과 하느님의 영원한 선물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 천사 마리아의 천사 같은 젊음은 이제 완전해졌는데, 그것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방안에서나 단 한 명의 증인인 대천사의 참관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께서 모든 이가 보는 가운데 혼인 반지와 관으로 그분을 꾸미실 때 그분은 완전한 나이에 이르렀고, 그분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몸은 그 젊음을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지엽말단으로 흐른 것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제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원래의 묘사로 돌아가겠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실제로 위엄과 은총이 가득한 ‘여인’이 되어 있다. 그녀의 미소까지도 위엄 있는 상냥한 빛을 띤다. 마리아는 참으로 아름답다!

 

요셉이 들어온다. 작업장의 문이 아닌 바깥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마을에서 돌아오는 것 같다. 마리아가 얼굴을 들고 그에게 미소 짓는다. 요셉도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억지로 꾸민 것 같이 보이는데, 아마 어떤 걱정이 있는 것 같다. 마리아는 무슨 일인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를 살펴보다가 일어나서 요셉이 벗은 겉옷을 받아서 긴 의자 위에 놓는다.

 

요셉이 식탁 가까이에 앉는다. 식탁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머리를 한 손으로 괴고, 다른 손으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골몰해 있다.

 

“무슨 걱정이 있어서 괴로워하시는 거예요?”


마리아가 묻는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까요?”

“마리아, 당신은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지만, 이번에는 당신과 관련된 큰 문제가 생겼소.”

 

“저와 관련이 있다고요? 요셉, 무슨 일인데요?”

“회당 문에 포고령이 붙었소. 팔레스티나 전주민의 호구조사령이오. 조상들의 땅에 가서 등록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하오.”

 

“오!”


마리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요셉의 말을 가로막는다.

 

“충격적인 소식이지 않소?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도 아오.”

“아니에요, 요셉.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는… 저는 성경을 생각하고 있어요. 벤야민의 어머니이자 야곱의 아내이며, 그녀로부터 구세주라는 별이 나게 될 라헬을 생각하는 거예요. 베들레헴에 묻힌 라헬 말이에요. 베들레헴에 대해서는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너는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이다마는 너에게서 영도자가 나올 것이다’라고요. 다윗 가문에 언약된 영도자가 그곳에서 태어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은 때가 왔다고 믿는 거요? 아! 어떻게 한다?”

 

요셉은 연민의 시선으로 마리아를 쳐다본다. 마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미소 짓는다. 요셉에게보다 자기 자신에게 미소 짓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미소다. ‘요셉은 사람이다. 그는 의인이지만 사람이다. 그는 사물들을 인간으로서 보고 인간으로서 생각한다. 내 영혼아,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사물을 영으로 판단하도록 그를 이끌어 주어라.’

 

그러나 마리아는 친절함으로 요셉을 안심시킬 마음을 먹는다. 마리아는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요셉의 생각을 걱정으로부터 딴 데로 돌리려고 애쓴다.

 

“요셉, 저는 모르겠어요. 때는 가까웠지만 주님께서 당신의 걱정을 없애 주시려고 때를 늦추실 수 있지 않겠어요? 주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여행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누가 아오? 마땅한 숙소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돌아올 시간은 있을까? 그리고 만일, 만일 당신이 그곳에서 아기를 낳게 되면 어떻게 한단 말이오? 우리는 거기 집도 없고,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염려 마세요,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예요. 하느님께서는 새끼를 낳아야 하는 짐승에게 은신처를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런 분이 당신의 메시아를 위해서 은신처를 발견하도록 해 주시지 않겠어요? 하느님을 믿읍시다. 그렇지요?

 

항상 그분을 믿읍시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더 신뢰를 가져야 해요. 어린이처럼 아버지 같은 그분의 손에 우리 손을 맡깁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그분께 완전히 맡겨 드립시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셨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착한 아버지도 그만큼 배려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분의 아들이 되고 종이 되어 그분의 뜻을 따릅시다.

 

어떤 불행도 우리에게 닥쳐올 수 없어요. 이 포고마저도 하느님의 뜻이에요. 도대체 카이사르가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손에 들려 있는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사람을 용서해 주시기로 결정하신 때부터 그분은 당신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도록 미리 사건들을 결정해 놓으셨어요.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그 영광은 이미 예고되었어요. 그 영광은 나타나야 했어요.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말할 줄을 모르니까요. 만일 메시아가 다른 곳에서 태어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이 될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아주 먼 곳에 권력자가 일어났어요. 그가 우리를 정복했고 지금은 세상이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그는 자기 신민의 수를 알고 싶어 해요.

 

오! 요셉, 우리가 이 평화로운 순간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좀 피로한 것쯤이야 대수에요? 이걸 생각하세요. 세상에 증오가 없는 한 때! 그 빛은 신성하고(divine), 그 결과는 구속(redemption)인 ‘별’이 뜨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시간이 있을 수 있겠어요?

 

아아! 요셉,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일 길이 안전하지 못하고 군중 때문에 길을 가기가 어렵게 되면 천사들이 우리를 지키고 호위할 거예요. 우리를 호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왕을 호위하는 것일 거예요. 만일 우리가 은신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천사들이 그들의 날개로 우리를 보호해 줄 거예요. 우리는 아무런 불행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까요.”

 

요셉은 넋을 잃고 마리아를 쳐다보며 그 말을 듣는다. 그의 이마의 주름이 펴지고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걱정과 우울한 기분이 사라진다.

 

“당신은 복된 여인, 내 영혼의 태양이오! 복된 당신은 모든 것을 당신 안에 가득한 은총의 빛으로 볼 줄을 아는구려! 그럼 시간낭비하지 맙시다. 할 수 있는 한 빨리 떠나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와야 하오. 여기는 그… 그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우리 아들을 위해서지요, 요셉.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아버지께서는 그의 강생을 신비의 베일로 둘러싸셨어요. 그러니 우리는 그 베일을 들추면 안돼요. 예수, 그가 때가 되면 그 일을 할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 시선, 표정, 목소리의 아름다움은 필설로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황홀이다. 이 황홀로 환상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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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 말이 이미 하나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에 대해 아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사랑을 가지지 못한 여인들의 잘못으로 너무나 많은 결혼이 파경에 이른다. 남편에 대한 친절, 동정, 위로 그 밖의 모든 것인 그 사랑 말이다. 여자에게 무겁게 지워진 육체적인 고통의 짐이 남자에게는 지워져 있지 않지만, 그에게는 모든 정신적인(moral) 걱정이 지워져 있다. 일해야 할 필요, 해야 할 결정, 당국과 자기 가족에 대해 져야 하는 책임 따위…

 

아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남자를 무겁게 짓누르느냐! 그리고 그 역시 얼마나 위로받을 필요가 많이 있느냐! 그런데 여자들의 이기주의가 극도에 달하여 피로하고 낙담하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무익하고, 때로는 옳지 못한 불평의 짐을 보태 준다. 이 모든 것은 아내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관이나 물질적 필요에 대한 충족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오관과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안심하게 하는 것이며, 그가 바람과 평화의 하늘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있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주의를 끌기를 바라는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그것에 대하여 이미 말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다. 신뢰 안에는 그 안에 이미 향주덕이 다 들어 있다. 신뢰를 가진 사람이라는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다. 신뢰를 가졌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을 전제한다. 신뢰를 가졌다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바라고,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신뢰다. 그렇지 않으면 신뢰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뢰를 받으실 자격이 있다. 그 자격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신뢰하는데,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왜 신뢰하지 않겠느냐?

 

신뢰는 또한 겸손이기도 하다. 교만한 사람은 말한다.


‘나는 나 자신으로 만족한다. 내가 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람이 능력이 없고, 거짓말쟁이고, 주제넘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은 말한다.


‘나는 이 사람을 믿는다. 왜 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겠는가? 왜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그는 훨씬 더 옳게 말한다.


‘왜 내가 선하신 그분을 의심해야 하는가? 왜 내가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당신을 주시고, 교만한 사람에게서는 멀리 떠나신다.

 

신뢰는 또한 순종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순종을 사랑하신다. 순종은 우리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진짜 아버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의 참 아버지시고 완전한 아버지시다.

 

너희가 묵상하기를 내가 원하는 셋째 점도 역시 신뢰에 바탕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건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네가 권력자냐?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네가 신민이냐? 그것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력자야, 네 권력을 가지고 재난을 만들지 않도록 힘써라. 비록 처음에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재난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너의 재난’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 해도 모든 것을 허락하시지는 않기 때문에, 만일 네가 한계를 벗어난다면 하느님께서 너를 치시고 부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신민인 너는 네 처지로 하늘의 보호를 너에게 끌어 오는 자석을 만들도록 힘쓰고, 결코 남을 저주하지 마라. 저주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의 피조물을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일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그분이 하실 일이다. 평안히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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