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41]예수께서 성전에서 라삐들과 토론하시다

강명준 변호사 | 기사입력 2018/05/27 [09:38]

[발또르따의 예수 이야기-41]예수께서 성전에서 라삐들과 토론하시다

강명준 변호사 | 입력 : 2018/05/27 [09:38]

 [번역 강명준 변호사   편집 추광규 기자]

 

 

 

 

 

1944. 1. 28.

 

나는 소년 예수를 본다. 그는 흰 아마포로 생각되는 천으로 만든, 발까지 내려오는 튜닉을 입고, 그 위에 연한 빨간색 장방형 천을 걸치고 있다. 그는 귀의 절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에 모자는 쓰고 있지 않는데, 머리카락은 그가 더 어렸을 때보다 더 짙은 빛깔이다. 그는 나이에 비해 매우 키 큰, 건장한 소년이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다.

 

예수는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어른이 된 예수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친절하면서도 약간 근엄한 빛을 띤 미소다. 예수는 혼자 있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돌이 많은 작은 길 위에 있는 작은 담에 기대 서 있다. 그 길 가운데에는 비가 올 때에는 개울로 변하는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지금은 날씨가 화창하기 때문에 말라 있다.

 

나도 담 가까이 가서 예수처럼 주위와 아래를 보는 것 같다. 나는 불규칙하게 지어져 있는 일단의 집을 본다. 어떤 집들은 높고, 어떤 집들은 낮은데, 향이 제각각이다. 마치 우중충한 땅에 흰 조약돌 한 줌을 던져 놓은 것 같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꽤 들어맞는 비유다. 큰 길 작은 길들이 이 흰 색 사이로 정맥처럼 연결되어 있다. 여기저기 담 사이에는 나무들이 보는데, 꽃이 핀 나무도 많고, 새 잎으로 덮인 나무도 많다. 봄인가 보다.

 

내가 보기에 왼쪽에는 세 개의 질서 정연한 단으로 되어 있는 건물들의 큰 집단이 있고, 그 밖에도 탑들과 마당들과 회랑들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더 높고 장엄하고 매우 화려한 둥근 지붕들이 덮인 건물이 있다. 그 둥근 지붕들에 구리나 금과 같은 금속을 입혔는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이 전체를 마치 요새라도 되는 것처럼 꼭대기에 M자 모양의 총안이 설치된 성벽이 에워싸고 있다. 꽤 좁고 불쑥 내민 길에 걸쳐서 세워진 다른 탑들보다 더 높은 탑이 이 넓은 건물 집단 위에 우뚝 솟아 있는데, 마치 엄숙한 보초병 같다.

 

예수는 이곳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다시 등을 담에 기댄다. 그리고 건물들의 맞은편에 있는 작은 산을 바라본다. 그 산 밑까지는 집들이 있고 그 위는 민둥하다. 집들이 지어져 있는 거리가 거기에서 활 모양으로 되어 끝나고, 그 너머에는 네모난 돌을 불규칙적이고 고르지 못하게 깐 길 밖에 없다. 그 돌들은 집정관 시대의 로마의 도로에 깔았던 돌처럼 크지는 않고, 비아렛지오의 오래된 인도에 깔려 있는 전형적인 돌들과 비슷하다(그 돌들이 아직 비아렛지오에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돌들이 아귀가 맞게 깔리지 않아 아주 거친 길이다. 예수의 얼굴이 하도 심각해서 침울함의 원인을 작은 산 위에서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헐벗은 야산이다. 그뿐이다.

 

나는 예수를 잠깐 놓쳤다가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예수는 거기 있지 않았다. 나는 이 환상을 보다가 깜빡 잠들었었다.

 

이 환상의 기억을 간직한 채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주위 사람들이 자고 있기 때문에 기운과 평온을 약간 되찾은 다음 나는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 있게 되었다.

 

마당들과 샘들과 현관들과 집들이 있다. 집이라기보다는 정자들이다. 고대의 유다인 복장을 한 많은 군중이 있는데 몹시 시끄럽다.

 

주위를 둘러보니 예수가 바라보던 큰 건물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총안이 있는 성벽과 보초처럼 서 있는 탑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장엄한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에는 매우 아름답고 넓은 회랑들이 벽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는 많은 군중이 거기 있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있다. 펄럭이는 긴 옷을 입은 바리사이들과 아마포로 만든 옷을 입고 가슴 윗부분과 이마와 다른 부위 곳곳에 귀금속 판을 달고 있는 사제들이 보인다. 값비싼 띠로 허리를 졸라맨 매우 넓은 그들의 흰옷 여기저기서 그 금속판이 번쩍인다. 그보다 덜 요란스럽게 차린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 역시 사제 계급에 속한 사람들 같다. 그들은 더 젊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나는 그들이 율법학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이 모든 인물들 가운데서 배회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이유로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신학 토론이 막 시작된 라삐들의 집단에 다가가는데, 많은 무리도 그리로 다가온다.

 

‘라삐들’ 가운데에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토론할 때에 가말리엘을 지지하는, 거의 소경이 되다시피 한 다른 노인 한 사람이 이끄는 집단이 있다. 이 노인을 힐렐(Hillel)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이름 첫머리에 기식음(氣息音)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H자를 붙였다), 가말리엘이 힐렐에게 친밀감과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자기 선생이거나 친척인 것 같다.

 

가말리엘의 집단은 더 포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 더 수효가 많은 다른 집단은 삼마이라는 사람이 이끄는 집단인데, 그 집단은 보수적이고, 복음서가 잘 나타내는 분개와 불관용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가말리엘은 빽빽한 제자의 집단에 둘러싸여 메시아의 내림(來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에 의거하여 자기가 발견한 바를 설파하고 있는데, 그는 메시아가 틀림없이 이미 태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예언서가 알려준 바 있는 성전재건 칙령으로부터 예언된 70주가 약 10년 전에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마이는 성전이 재건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노예상태는 더 심해졌을 뿐이고, 예언자들이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는 메시아가 가져왔어야 할 평화가 세계에 없고, 특히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더욱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가말리엘의 말을 반박한다. 예루살렘이 적에게 압제당하고 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봉기를 검으로 진압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로마 군대가 꽉 들어찬 안토니아 탑이 성전 경내에까지 감히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말꼬리 잡기 식의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점철된 토론이 끝없이 계속된다. 모든 라삐들이 자신들의 학식을 자랑하는데, 그것은 반대자를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청중의 찬사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가까이 있는 신자들의 집단으로부터 한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가말리엘 라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군중과 라삐들의 무리가 술렁이며 방해자를 찾는데, 사실 찾을 필요도 없다. 예수는 숨지 않고 스스로 나타나 ‘라삐들’ 집단 쪽으로 다가간다. 나는 소년 예수를 알아본다. 예수의 눈은 총명함으로 반짝이며 자신만만하고 솔직하다.

 

“너는 누구냐?”


사람들이 묻는다.

 

“율법이 규정하는 바를 행하려고 온 이스라엘의 아들입니다.”

 

과감하고 자신 있는 대답으로 인해 예수는 호감을 얻고 찬성과 호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의 미소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이 이스라엘 소년에게 흥미를 느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나자렛의 예수입니다.”

 

삼마이의 집단에서는 호의가 줄어든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더 친절하게 힐렐과 함께 대화를 계속한다.

가말리엘이 노인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저 아이에게 뭘 좀 물어 보십시오.”

“네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냐?”


힐렐이 묻는다(나는 간결함과 명료함을 위해 대화 첫머리에 이름을 써 놓겠다).

 

예수: “시기에 대해서 틀릴 수 없는 예언과 예언이 실현될 때가 되었을 때 일어났던 표징들이 저의 근거   입니다. 카이사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70주가 지났을 때에 카이사르가 자기의 영토에 호구조사를 명령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와 팔레스티나가 평화로웠습니다. 제국에 전쟁이 있고 팔레스티나에 반란이 있었더라면 카이사르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70주가 마감된 것과 마찬가지로 성전의 완성으로부터 62주 더하기 1주라는 다른 기간도 끝나갔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파견된 것이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예언의 나머지 부분이 실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의심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동방의 현자들이 보았고, 유다의 베들레헴의 상공에 와서 머물렀던 별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야곱 이후 줄곧 예언들과 환상들이 베들레헴 출신인 다윗을 통하여 야곱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인 메시아가 탄생하기로 되어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발라암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야곱으로부터 태어난 별이 뜰 것이다(민수 24,17).’ 순결과 믿음으로 인해서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던 동방의 현자들은 그 별을 보고 ‘메시아’라는 그 별의 이름을 알아내고, 세상에 내려온 빛(the Light)에게 경배하려고 왔었습니다.”

 

삼마이, 예수를 노려보며: “너는 별이 나타났을 때 베들레헴 에프라타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냐?”

예수: “그렇습니다.”

 

삼마이: “그렇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얘야, 너는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바로 태어난 아이부터 생후 2년 된 아이까지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그렇게도 성서를 잘 아니 ‘라마에서 소리가 들렸다. 라헬이 제 아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이다’라는 말도 알겠구나(예레 31, 15, 마태 2, 18). 죽어가는 라헬의 울음을 거두어들인 베들레헴의 산과 골짜기는 그 울음소리로 가득했고, 어머니들이 학살된 자신들의 아이들을 애도하며 되풀이하였다. 그 어머니들 가운데에는 분명히 메시아의 어머니도 있었다.”

예수: “어르신, 틀리셨습니다. 라헬이 ‘고통의 아들’을 낳았던 그 곳에서 새로운 라헬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벤야민(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역주), 그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아들, 그의 왕권 아래 모든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장 무서운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기로 되어 있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라헬의 울음은 호산나로 변했습니다.”

 

삼마이: “그가 죽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겠느냐?”
예수: “라삐님은 엘리야에 관한 말씀을 읽지 않으셨습니까? 엘리야는 불수레에 실려 올라갔습니다(2열왕 2, 11). 그런데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임마누엘이 당신 백성의 메시아가 되도록 그를 구하실 수는 없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발을 적시지 않고 자기들의 땅을 향해 가도록 모세 앞에서 바다를 갈라놓으신 그분께서 당신의 아들, 당신의 그리스도를 잔인한 사람에게서 구해 주도록 당신 천사들을 보내실 수는 없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그리스도는 살아 있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때가 오면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가 밑줄 친 말을 할 때에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린다. 그의 눈은 한층 더 빛나고 명령과 약속의 몸짓으로 선서하듯이 손바닥을 편 채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은 다음 내린다. 그는 소년이지만, 어른처럼 엄숙하다.

 

힐렐: “얘야, 누가 그것을 너에게 가르쳐 주었느냐?”

예수: “하느님의 성령입니다. 저에게는 사람인 선생이 없습니다. 이것은 제 입술을 통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입니다.”

 

힐렐: “얘야, 내가 너를 잘 볼 수 있고, 네 믿음에 의해 내 희망이 살아나고, 네 빛으로 내 영혼이 비추어지도록 우리 가까이로 오너라.”

 

사람들이 예수를 가말리엘과 힐렐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의자에 앉히고, 읽고 해석하라고 두루마리들을 그에게 가져다준다. 이것은 적절한 시험이다. 군중이 몰려와서 듣는다.

예수는 앳된 목소리로 읽는다.


“‘내 백성아, 마음을 달래라. 예루살렘의 노예생활이 끝났으니, 그의 마음에 말하고 그를 위로하여라.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주의 길을 닦아라. 그러면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삼마이: “나자렛 아이야, 보아라! 여기서는 노예상태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과 같이 노예생활을 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선구자에 대해 말하는데, 선구자가 어디 있느냐? 너는 허튼 소리를 하고 있다.”

예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선구자가 경고는 다른 누구에게보다 더 라삐님께 말해져야 합니다. 라삐님과 라삐님 같은 사람들에게요. 그렇지 않으면 라삐님은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실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비열함과 교만과 오류가 라삐님을 보고 듣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마이: “네가 감히 라삐에게 그렇게 말한단 말이냐?”

예수: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죽기까지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제 이해관계 위에는 주님의 이해관계가 있고, 제가 진리의 아들이니만큼 저에게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삐님을 위해 제가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예언자가 말하고 저도 말하는 노예상태라는 것은 라삐님이 생각하시는 노예상태가 아니고, 충성(royalty)도 라삐님이 생각하시는 충성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메시아의 공로로 사람들은 자기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악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것이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에 복종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표가 찍힙니다.

 

오, 다윗 가문이여, 온 땅을 뒤덮고 하늘에까지 이르는 큰 나무가 된 너에게서 난 싹 앞에 모든 민족이 머리를 숙일 것이다. 하늘과 땅에서 모든 입이 그의 이름을 찬미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 평화의 왕, 지도자에게 무릎 꿇을 것이며, 낙담하고 굶주리는 모든 영혼들은 자기 자신을 주는 그, 하늘과 땅 사이에 동맹을 맺을 거룩한 자 앞에서 기쁨과 양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셨을 때, 여전히 그들을 종으로 취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맺으셨던 것과 같은 계약이 아니라, 구세주의 공로로 사람들의 영혼 안에 다시 한 번 주입된 은총과 더불어 천상의 부성(heavenly paternity)을 주입하시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통하여 모든 착한 사람이 주님을 알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이 다시는 무너지지도 파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삼마이: “야! 너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마라! 다니엘을 상기해 보아라. 다니엘은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 성전과 성도(聖都)가 먼 곳으로부터 올 백성과 두목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는 하느님의 성전이 다시는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구나! 예언서들을 존중해라!”

예수: “제가 라삐님께 엄숙히 말씀드립니다만, 예언자들보다 나은 사람이 있는데 라삐님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알지 못하시고 나중에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이 모두 진리라는 것을 라삐님께 말씀드립니다. 진짜 성전은 죽음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처럼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세상 마칠 때에는 하늘에서 살 것입니다.”

 

힐렐: “얘야. 하까이는 말한다. ‘뭇 민족이 바라는 이가 올 것이다.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그리고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다(하까 2, 5―9).’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마 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성전인 모양이구나?"

예수: “라삐님, 그렇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라삐님은 정직하시기 때문에 빛을 향해 가시게 될 것입니다. 라삐님께 말씀드리는데,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성되면 라삐님은 평화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라삐님은 악의가 없는 이스라엘의 자손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 “예수야, 예언자들이 말하는 평화 말이다. 만일 전쟁이 와서 이 백성을 파멸시킨다면 어떻게 그 평화를 바랄 수 있단 말이냐? 네 말로 나도 비추어 다오.”

예수: “라삐님은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날 밤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천사들의 무리가 노래했다는 말을요? 그런데 이 백성은 착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백성은 평화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백성은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권력을 지닌 왕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는 영혼의 왕이기 때문에, 그들은 의인이요 구세주인 그 왕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백성은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전차와 기병대를 갖춘 적을 무찌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창조된 사람들의 마음을 지옥에 가두기 위해 애쓰는 영혼의 원수들과 싸울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 기대하는 승리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아, 너의 왕은 ‘암나귀와 나귀새끼’를 타고 올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의인들과 이방인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나귀새끼가 그에게 더 충실해서 암나귀보다 앞서서 그를 따를 것이고, 진리와 생명의 길에서 커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악한 뜻으로 인해 평화를 잃을 것이고, 여러 세기 동안 고통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왕을 고통당하게 하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그를 고통의 왕으로 만들 것입니다.”

 

삼마이: “나자렛 애송이 녀석아, 네 입에서는 젖비린내와 함께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나온다. 대답해 보아라. 대관절 선구자가 어디 있단 말이냐? 언제 우리가 선구자를 가진단 말이냐?”

예수: “선구자는 존재합니다. 말라키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그러므로 선구자는 그리스도를 바로 앞서 옵니다.

 

선구자는 그리스도가 와 있는 것처럼 이미 와 있습니다. 만일 주의 길을 닦는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에 여러 해의 간격이 있다면, 모든 길이 다시 막히고 빗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기에, 선구자가 단지 한 시간만 주인보다 앞서 가도록 결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선구자를 보시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전도가 시작되고 있구나’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라삐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가 이 길로 오게 되면 그는 많은 눈을 뜨게 하고, 많은 귀를 듣게 할 것입니다만,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추종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를 죽일 테니까요. 그러나 구세주가 이 성전보다 더 크고, 지성소에 들어 있는 장막보다 더 높고, 케루빔들이 떠받치고 있는 영광보다 더 높은 자기 옥좌와 제단에 앉게 되면, 하느님을 죽인 자들에 대한 저주와 이방인들을 위한 생명이 수없이 많은 그의 상처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라삐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영적인 왕국의 왕이며, 그의 신민은 오직 자기들의 사랑을 통하여 자기들의 영으로 다시 태어날 줄을 알고, 요나와 같이 한번 태어난 다음 다른 나라에서(on other shores), 즉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날 줄을 알 그런 사람들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생명을 인류에게 줄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인 재탄생(spiritual regeneration)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사람들 말입니다.”

 

삼마이와 그의 추종자들: “이 나자렛 녀석은 사탄이다!”

힐렐과 그와 추종자들: “아니오. 이 아이는 하느님의 예언자요. 얘야, 나와 함께 있어라. 이 늙은이가 아는 것을 너에게 다 쏟아 부어 주겠다.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백성의 스승이 될 것이다.”

 

예수 : “제가 엄숙하게 말씀드립니다만, 라삐님 같은 분이 많이 있으면 구원이 이스라엘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늘로부터의 목소리가 저에게 말합니다. 저는 제 때가 오기까지 고독한 가운데에서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제 입술과 제 피로 예루살렘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제 운명은 예루살렘에 의해 돌을 맞고 살해당한 예언자들의 운명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제 생명 위에는 주 하느님이 계시는데, 저는 저 자신을 당신 영광의 발판을 삼으시도록 그분께 복종하면서, 그분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발판을 만드시기를 기다립니다.

 

제 때에 저를 기다리십시오. 이 돌들이 다시 제 목소리를 들을 것이고, 제 마지막 말을 듣고 떨 것입니다. 그 목소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으로 인해 그를 믿을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자기 왕국을 줄 터인데, 여러분의 이기심은 그 왕국이 순전히 인간적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상의 것(heavenly on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말합니다. ‘주님, 당신 종이 당신의 뜻을 행하려고 여기 왔습니다. 저는 주님의 뜻을 완수하기를 열망하오니, 그 뜻을 완전히 이루십시오.’”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란 박사들 가운데서 영적인 정열로 불타는 얼굴을 하늘을 향해 쳐들고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똑바로 서 있는 예수의 환상이 끝난다.

 

지금은 29일 새벽 3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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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 29.

 

저는 두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확실히 신부님께서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잠이 깨자마자 그 말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중에 쓰겠습니다. (중략)

 

제가 처음에 말씀드리려던 것을 여기에 쓰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힐렐, 가말리엘, 삼마이의 이름을 알 수 있었느냐고 신부님이 오늘 물으셨지요.

 

그것은 제가 ‘제 2의 목소리’라고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가 그런 것들을 저에게 말해 줍니다. 이것은 저에게 쓰라고 불러 주는 내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좀 작게 들리는 목소리입니다. 이미 말씀드렸고 되풀이해 말씀드리지만 이 목소리는 제 영적인 청각이 그것을 마치 인간의 목소리인 것처럼 지각하는 목소리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아주 가까이에서 저에게 말해 주기라도 하듯이, 다정하거나 분개한 목소리로, 유쾌하거나 슬픈 목소리로 저는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 ‘제2의 목소리’는 또한 제 영안에서 말하는 빛, 또는 직관 같은 것입니다. 제 영 ‘안에서(in)’라고 했지 제 영‘에게(to)’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암시가 됩니다.

 

어떤 노인 옆에서 몹시 열렬히 말하는 저명인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토론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에 가까이 갔을 때, 제 안에 있는 ‘제2의 목소리’가 ‘가말리엘, 힐렐’이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가말리엘의 이름을 말하고 다음에 힐렐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제가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내적 지도교사가 마침 가말리엘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에 기분 나쁜 그 제3의 인물을 저에게 가리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리사이처럼 보이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내적 지도교사(internal monitor)는 제가 세상 멸망 후의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환상을 볼 때에 이런 일이 매우 자주 있습니다. 이해가 필요하지만 저 혼자서는 깨닫지 못하는 어떤 세부사항들을 이 내적 지도교사가 깨닫게 해 줍니다. 잘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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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2. 22.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작은 요한아, 인내해라. 이것은 다른 이야기다. 네 지도신부를 기쁘게 하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이 다른 이야기를 다루자. 이 일은 재의 수요일인 내일로 미루기를 나는 원한다. 나는 네가 이 일을 끝내기를 원한다. 너도 나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뒤로, 한참 뒤로 돌아가자. 내가 열두 살 때 토론을 하던 성전으로 돌아가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서 성전으로 가는 길로 돌아가자. 너는 남자들의 집단과 여자들의 집단이 모였을 때 내가 요셉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을 본 마리아의 고통을 보아라.

 

마리아는 남편을 비난하지 않는다. 모든 여자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여자들은 그보다 훨씬 못한 일을 가지고도 남편이 가장이라는 것을 잊고 그를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에 나타나는 고통이 그 어떤 비난보다 더 요셉의 마음을 찌른다. 마리아는 한바탕 소란을 떨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못한 일을 가지고도 다른 여자들은 사람들의 주목과 동정을 끌려고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고통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몸을 떨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이 크게 떠지는데, 그것이 울고불고하는 것보다도 요셉의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마리아는 이제 피곤하지도 배고프지도 않다. 하루의 여정이 길었고, 그녀는 여러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제쳐 둔다. 준비하던 잠자리도, 차려진 음식도 다 버려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밤이라 어둡지만 상관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마리아는 대상들과 순례자들을 붙잡고 물어본다. 요셉이 마리아를 따라가며 도와준다. 하룻길을 반대방향으로 걷고 나서 성도를 돌아다니며 안타깝게 나를 찾는다.

 

예수가 어디에, 대관절 어디에 있을까? 하느님의 섭리는 오랜 시간 동안 마리아가 나를 어디에 가서 찾아야 할지 모르도록 허락하신다. 어린이를 성전에서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린이가 대관절 성전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고작 시내에서 길을 잃어 성전에까지, 그 안에까지 그 작은 발걸음으로 돌아왔다면, 그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엄마를 불러 어른들과 사제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고, 이들은 대문들에 게시판을 달아 부모를 찾을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게시판도 없었고, 시내에서는 아무도 그 어린이에 대해 아는 것이 도무지 없었다. 예쁘다고? 금발이라고? 체격이 건장하다고? 그런 어린이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 애를 보았습니다. 여기 있었습니다. 저기 있었습니다’ 하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게 하기에는 그런 것들은 너무나 부족한 정보였다.

 

그러다가 미래의 3일간의 고통의 상징인 사흘 후에 마리아는 기진맥진한 채 성전으로 들어가 마당들과 방들을 돌아다닌다. 없다. 어린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엾은 엄마는 달려가고 또 달려간다. 어린양들의 우는 소리까지도 자기가 찾는 아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는 울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는 한 무리의 사람 저쪽에서 들려오는 정다운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가 말한다. ‘이 돌들이 떨 것입니다.’ 마리아는 군중 사이로 길을 내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성공한다. 박사들 가운데 똑바로 서서 팔을 뻗치고 있는 아들이 있다.

 

마리아는 신중한 동정녀지만 이번에는 염려가 신중함을 이겼다. 염려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강풍이다. 마리아는 아들에게 달려가 의자에서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껴안는다. 그러면서 외친다. '오!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사흘 동안 우리는 너를 찾아 헤매고 있다. 얘야, 엄마는 걱정으로 죽을 뻔했다. 아버지도 지칠 대로 지치셨다. 예수야, 왜 그랬느냐?'

 

아는 자(He Who knows)에게는 ‘왜’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말이다.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느냐고 묻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혜이므로 알고 있었다. 나는 사명에 ‘부름 받았고’ 그 사명을 성취하고 있었다.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 위에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 그분의 이익은 우리 이익 위에 있고, 그분의 애정은 다른 모든 애정보다 앞선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나는 박사들의 모후인 마리아를 가르침으로써 박사들에 대한 내 가르침을 마쳤다. 마리아는 그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 겸손하게 순종하는 내 손을 잡을 때에 한 줄기 빛이 그분의 마음을 비추었다. 내 말은 그분의 가슴 깊이 뿌리내렸다. 내가 아직 세상에 있을 21년 동안 해가 빛나는 많은 날들과 구름 낀 많은 날들이 있을 것이다. 남은 21년 동안 그분의 마음에는 많은 기쁨과 많은 눈물이 교차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결코 다시 묻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아, 왜 우리에게 그렇게 했느냐?’

 

너희 무례한 인간들아, 이 교훈을 배워라.

 

작은 요한아, 나는 환상에 대해서 가르치고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네가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 말에 주의를 기울여라. 나는 이 책이 다음과 같이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첫째 고통: 성전에의 봉헌.
둘째 고통: 이집트에 머무름.
셋째 고통: 성전에서 잃은 예수.
넷째 고통: 성 요셉의 죽음.
다섯째 고통: 나자렛으로부터의 내 출발. 그 다음에 1944. 2. 10. 자 구술.
여섯째 고통: 2. 13. 자 환상의 묘사(4가지 요점: 회당, 나자렛의 집, 회당에서의 예수의 설교, 나자렛으로부터 피하신 후에 어머니와 나눈 대화).
일곱째 고통: 2. 14. 자 환상. 그 다음에 2. 16. 자 구술.
여덟째 고통: 파스카의 성만찬.
아홉째 고통: 수난, 1943. 2. 11. 자 환상과 거기에 2. 18. 자 환상을 연결시킴.
열째 고통: 예수를 장사지냄(2. 19.) 그 다음에 2. 21. 자 환상과 구술. 2. 22. 자 환상과 구술 중 장사와 관계되는 부분. 성전에서 예수를 찾는 것에 관한 구술은 셋째 슬픔 중 제 자리에 넣을 것.

 

첫째, 신부(the Father)는 그 자신과 너를 위한 책을 만들고, 너는 단 하나의 실수도 없도록 교정을 보아야 한다. 그 다음 다를 사람들을 위한 사본들을 그가 만들 것이다. 물론 각 환상에는 그에 해당하는 구술이 이어져야 한다. 신부는 모든 것을 부활에 맞추기를 원한다. 나 역시 그것을 부활의 준비로서 원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오늘 너에게 주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이미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 오후 4시 30분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 자녀들과 너는 축복받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마음과 믿음으로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축복받을 것이다. 신부가 오늘 원한 그 불은 그들 안에서 타오를 것이다. 세상의 잔인성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너무 부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을 느낄 것이고, 거룩해지려는 충동이 그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작은 요한아. 평안히 가거라. 너의 예수는 너에게 감사하고 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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