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녁상은 옛날에 누님이 꼬집은 대가여!”

[살며 사랑하며] 집에서 치룬 결혼 50주년 금혼식

조종안 | 기사입력 2009/11/17 [05:16]

“이 저녁상은 옛날에 누님이 꼬집은 대가여!”

[살며 사랑하며] 집에서 치룬 결혼 50주년 금혼식

조종안 | 입력 : 2009/11/17 [05:16]
어제(15일)는 늦은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가니까 햇볕은 따사했지만, 손이 시렸고, 차가운 바람은 목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런데 셋째 누님이 시집가던 50년 전 오늘은 날도 화창했고, 한참 걸어가면 이마에 땀이 나는 초여름 날씨였다.

 
▲ ▲ 전통혼례복 차림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셋째 누님과 매형.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림꾼으로 소문났지요. 누님 넷 중에 음식 솜씨도 가장 뛰어났고. ⓒ 조종안     © 조종안
 
셋째 누님은 엄청난 '사라호 태풍' 피해와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1960년) 준비로 민심이 흉흉하던 1959년 (음) 9월29일 우리 집 앞마당에서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누님은 꽃다운 열아홉 나이로 중매결혼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다.
 
그래서 셋째 누님에게 11월15일은 결혼 50주년이 되는 날로 자식들과 형제들에게 축하인사를 받으며 금혼식을 올리는 날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혈압으로 쓰러진 매형(남편)이 요양병원에 요양 중이어서 환자를 돌보러 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 되고 말았다.
 
매형은 9개월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복지관에 다녔는데 지난 2월23일 갑자기 쓰러져 말도 못하고 침대생활을 하게 되자, 셋째 누님이 뒤치다꺼리를 해왔다. 그런데 누님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2개월 전 요양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니 누님 마음이 괴롭고 아플 수밖에. 해서 간자장이라도 한 그릇 사주려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늘이 누님 결혼 50주년 되는 날이지? 금혼식 축하는 내가 대신해줄 태니까 오늘 하루만이라도 병원에 계시는 매형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누님이 제일 좋아하는 간자장 사줄 테니까 저녁밥 먹지 말고 기다려···."
"하이고 고맙네!. 그러잖여도 큰집(사돈댁)에서 점심때 집들이 헌다고 오라고 혀서 거기 들렀다가, 오랜만에 너 한티나 가볼까 혔는디, 잘 됐다. 간자장은 며칠 전에 먹었으니까, 돼지 머리 고기나 좀 사가지고 갈게···."
 
"그럼 안나 엄마가 밤늦게 출근하니까 부탁해서 돼지고기도 삶아놓고, 술도 준비해놓을 테니까 누님은 아무것도 사오지 마. 그리고 요즘은 해가 일찍 지니까 되도록 저녁 5시까지 와야 된다고···."
"그럼 나는 네가 좋아허는 찰밥을 조금 쪄서 가지고 가면 되겠다. 너 찰밥 좋아 허잖여. 저녁에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허자!"

 
결혼기념일은 한 쌍의 남녀가 결혼하고 나서 특별히 정해진 해에 부부가 함께 건재하고 있음을 축하하는 날이다. 특히 은혼식(25년)이나 금혼식(50년) 때는 성장한 자식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지켜주고 가르쳐주신 부모에게 감사하는 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동생이 누님 결혼기념일을 챙겨준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비칠지도 모르겠으나, 매형이 입원해있는 셋째 누님 같은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된다. 해서 비록 자장면이지만, 외식할 돈으로 돼지고기랑 술이랑 준비하고 형님과 동생 내외도 오라고 해서 함께 저녁이나 먹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광어를 먹을까? 우럭을 먹을까?  


 ▲ 해망동 수산시장에 나온 광어. 아무리 겨울이라도 회를 먹을 때는 살아 숨 쉬는 생물이 좋지요. ⓒ 조종안    


결혼 50주년을 상징하는 금혼식 때 고급 뷔페나 한정식집에서 성대하게 식을 올리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형편에 따라서는 가족과 형제들이 자장면 한 그릇씩이라도 먹으면서 지난날을 추억하고 정을 돈독히 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정육점으로 달려가 돼지고기 목살 네 근하고 두부 두 모를 사왔는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 근무 들어가는 시간을 묻기에 밤 8시쯤이라고 하니까 잘 됐다면서 함께 저녁이나 하자고 했다. 해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저녁에 형수님과 집으로 오라고 했다.
 
동생에게도 전화해서 사연을 말하고,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저녁에 제수씨와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까 돼지고기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해서 생선회를 조금 준비하려고 아내와 함께 해망동에 나갔다.
 
온갖 해산물이 백열등 아래서 주인을 기다리는 수산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중국집에 가면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망설여지듯 갈등이 생기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광어를 먹으면 우럭이 서운하고, 우럭을 먹으면 광어가 서운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데 결국 광어회 2kg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잘 먹고 잘살자!"로 시작한 금혼식 잔치  
 


 

▲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셋째 매형(가운데)이 참석했던 1년 전 가족 모임. 이때만 해도 나들이를 할 정도로 좋았는데, 늙으면 자신이 관리하는 건강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 조종안    


집에 돌아와 조금 있으니까 서로 연락이 되었는지, 셋째 누님과 형님 내외가 술을 못하는 동생 차를 타고 도착했다. 이어 곧바로 상이 차려지고 잔치가 시작되었다. "잘 먹고 잘살자!"는 형님의 선창에 '위하여!' 합창으로 건배를 하고 술잔이 한 바퀴 돌아갔을 즈음에 셋째 누님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하이고 동상, 그라녀도 잘 먹고 있다고 전화 헐라고 혔는디 먼저 혔네. 저번 날 얘기 혔잖여. 그날(금혼식) 형부한티 들렀다가 돼지고기 두어 근 허고 소주나 한 병 사가지고 일로 올라고 혔는디, 간짜장 사줄팅게 집이가 꼭 있으라는 전화가 먼저 오더라고, 미안혀서 내가 갈 팅게 오지 말라고 혔지, 근디 저녁 때 집으로 오라고 허대. 그려서 깜냥에 나 혼자인 줄 알고 오는디 동상들이 쭈욱 따러 들어오더라고. 다 초대혔던개벼. 지금 너무 행복혀서 입이 찢어질라고 허네. 잘 허믄 눈물 나오겄어. 지금이 두 잔째거든 전화 혀줘서 고맙네. 하하하···"
 
금혼식을 축하한다는 막내 누님의 전화였다. 5분 가까이 이어진 통화는 분위기를 더욱 화기애애하고 진하게 했다. 필자가 셋째 누님에게 "이 저녁상은 옛날에 누님이 나를 찬장 밑으로 몰아넣고 꼬집은 대가여!"라고 하자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가 나왔는데, 한국전쟁 때 외갓집으로 피난 가서 먹었던 보리밥 얘기에서부터 어렸을 때 돌아가신 큰형님 얘기까지 나왔다. 셋째 누님은 대화 도중에도 아내와 제수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차례 건넸다. 
 
소주가 몇 잔 돌아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니까, 셋째 누님은 병원 침대에 혼자 외롭게 누워있을 매형이 생각나는 모양인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낮에 찾아가 둘이 나누었던 얘기를 해주었다.
 
"야야, 오늘 말이다. 영화동 큰집에 들렀다가 병원에 갔는디 침대에 누워있던 매형이 굉장히 반가워 허드라고. 한 달 전인가도 갑자기 결혼헌 지 얼마나 되느냐며 날짜를 물어봤거든. 그려서 오늘이 금혼식이라고 허면서 악수도 허고 '여기(볼)다 뽀뽀한 번 혀줄텨?'라고 혔드니 '에이!'라고 험서 웃기만 허드라고···"(웃음)  

 
어머니에게 된통 혼나고, 부엌에서 밥을 할 때도 유행가를 몇 곡씩 신나게 뽑을 정도로 셋째 누님은 성격이 낙천적이었다. 그래서 "저것은 뭣이 그렇게 좋아서 혼나고도 노래를 부른다냐!" 하는 말을 듣기도 했던 누님이었다. 그래서인지 매형 얘기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금혼식 잔치는 2시간 넘게 이어졌고, 셋째 누님은 끝날 때까지 표정이 밝았는데 속마음까지 밝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촐한 자리가 누님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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