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휘날리는 ‘3.1절’과 ‘가쓰라 테프트 밀약’ 단상.

조찬옥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 기사입력 2023/03/01 [22:26]

일장기 휘날리는 ‘3.1절’과 ‘가쓰라 테프트 밀약’ 단상.

조찬옥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 입력 : 2023/03/01 [22:26]

 

▲ 3.1절날 세종시 한 아파트에 일장기가 걸리면서 충격을 던졌다.   © 온라인 캡처 

 

외국 군대가 한반도에 주인인 양 틀어 앉고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지 141년이 되었다. 지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가 군대를 이끌고 용산에 자리를 잡아 외국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앉은 것이다.

 

그 이후 청일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 군대가 그 뒤를 이었고 심지어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식민지배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는 열강들의 힘에 의해 나라는 두 동강이 났다. 아직까지도 이들의 횡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운명은 우리 스스로가 자강불식(自强不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금년은 기미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918년 월슨 미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 러시아의 10월 혁명(볼셰비키)성공 후 레닌의 민족 자결 원칙. 만주에서 민족대표 39인의 대한독립 선언서. 이어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3.1일 민족지도자들은 종로 태화관에서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이후 만세 운동은 서울에서 대도시로 농촌으로 퍼져나갔으며 만주와 연해주를 비롯해 만세 시외가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3.1 만세 운동은 한일병합조약의 무효화,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으로 이 만세 운동은 약 3개월 가량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일본군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우리 민중들을 잡아들이고 학살했다.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는 잡혀 옥에 가두고 심지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옥사하기도 했다. 한편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4개월 후 일본주재 미 대사관 조선 영사에게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라는 훈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 일본 정부 당국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은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시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미국이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묵인한 이른바 가쓰라 테프트 밀약과 3.1 만세 운동과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 원인은 이 밀약이 맺어진 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 되었고 3.1 만세운동 당시 미국은 이 만세 운동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이다.

 

가쓰라 테프트 밀약이 맺어진 같은 해 11월 17일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미국의 묵인하에 식민정치를 본격화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키 위해 일본군은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중명전을 포위하여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매국노 5적들은 고종황제의 승인도 없이 체결에 합의를 해 주었다.

 

가쓰라 테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였던 미국 전쟁성장관 윌리엄 하워즈 테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가 일본 도쿄에서 은밀히 맺은 밀약을 말하고 있다. 러·일 전쟁 중이던 1905년 7월 27일 미국의 전쟁성장관 테프트는 필리핀을 방문하던 도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테프트는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비밀회의를 열어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주요 의제를 7월 29일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요 내용이 담긴 합의 각서를 작성하였다.

 

테프트는 이 합의 각서를 미 국무장관 엘리트 루트에게 전보로 알렸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7월 31일 그 내용을 승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 테프트 밀약이다. 이 밀약의 목적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배 한다는 밀약으로 양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상호밀약이다.

 

이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해줌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게 되었다. 특히 가쓰라는 당시 러·일 전쟁의 원인이 대한제국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대로 방치하면 앞으로도 대한제국이 문제를 일으켜 전쟁이 일어날 원인이 될 수 있고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일본의 지배는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 밀약으로 인해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미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던 일본은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를 보장받기 위해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인정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 미·일 동맹의 관계를 확보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가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은 서서히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고 결국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일제는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해간 후 언론 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행하였다.

 

이때부터 미국은 오늘날까지 한반도 문제에 있어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들어주었고 이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후에 벌어진 다른 사건을 통해서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이 가쓰라 테프트 밀약과 미국의 중재하에 성사된 러일 간의 포츠머스 조약 이후에도 미국과 일본은 채 1년이 안 되는 기간에 걸쳐 총 네 차례의 협정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몇 번씩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미국의 일본인 이민 제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체결한 신사협정에서도 미국은 일본의 조선 보호를 인정하였다. 신사협정으로부터 3개월 뒤에는 미일 중재 조약에서 조미 통상수호 조약상 미국의 중재 재판권을 포기하고 곧이어 미일 상표협약에서는 조선 내 미국인에 대한 사법권의 일부를 포기하고 일본에 내줬다.

 

뒤이어 루트-다카히라 협정에서는 조선의 영토주권 승인권 포기 조항까지 삽입하였다. 이러한 전개를 비추어 볼 때 미국은 한반도에서 향후 벌어질 상황에 신경을 쓰지 않기는 커녕 단순히 한반도의 운명을 일본에 맡기는 것을 넘어 그들이 우월권을 행사하는데 안정적인 토대를 앞장서 깔아 줬다고 볼 수 있다.

 

가쓰라 테프트 밀약에 관한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테일러 데넷(Tayilor Dennet)이 국회도서관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 관한 사적 비망록과 외교서류 등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가쓰라 다로 사이에 관한 비공식 회담에서 합의된 비망록을 발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록의 내용은 미·일 양국 모두가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1924년 데넷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 역사기록은 물론 한국과 관련하여 정치외교 역사 속에 통례적인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아직도 일본은 지난 22일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제정한 이른바 다케시마 날이다. 미·일은 훈련 이후 발표한 공식 보도자료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했다. 다케시마 날에 동해를 일본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대북 전쟁 훈련을 진행한 것은 일본이 한반도 재침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겠다며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더니 그것이 어려워지자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선언하고 방위비를 대대적으로 증액하고 군국주의 부활로 곧장 나아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위해 그동안 쓰고 있던 양의 탈마저 벗어 던지고 전범 국가 일본의 재무장을 옹호하며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미·일의 군사 행보는 우리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과거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겼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빼앗겨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 종전선언에도 당사국으로써 참여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미국 또한 일본 식민통치 못지않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3.1절에 성조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한숨만 나온다. 심지어 세종시 한 아파트에는 일장기가 걸리면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100년 전 3.1만세 운동 당시 독립을 외쳤던 우리 민중들이 바라던 나라가 현재의 대한민국이 맞는 것인지 그리고 현재의 대한민국은 외세로부터 온전히 독립된 나라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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