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 차좁쌀로 빚은 오메기술

[내고향 제주 더듬기] "저 망할넘의 웬수...아비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잡놈시키."

굴렁쇠 | 기사입력 2008/02/09 [19:21]

그립다.... 차좁쌀로 빚은 오메기술

[내고향 제주 더듬기] "저 망할넘의 웬수...아비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잡놈시키."

굴렁쇠 | 입력 : 2008/02/09 [19:21]
▲   그 옛날 오메기술은 집집마다 빚어왔다. 사진은 오메기떡을 만드는 김을정 할머니와 그의 딸 강정순(51) 오메기술 기능전수자.  ⓒ오마이뉴스 정희종

코흘리개 시절 이야기다. 우리 집의 겨울도 술 익는 냄새로 시작되었다. 마을 주당들이 볼 일도 없으면서 자주 문안 인사에 맛들이는 것도 이맘 때다. 정신 사나운 녀석은 외양간 소와 통시의 똥돼지였다.
 
나도 같은 축에 속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언제면 술이 익어 통사발로 한 잔 가득 부어 마시냐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구들방에는 탁주인 오메기술이 되거나 고소리술을 꿈꾸며 술항아리가 세상 모르게 잠을 자고 있었다. 어른들이란 참, 그게 뭐 대단한거라고 술 익기도 전에 안절부절이지? 아니다. 나에게도 이 오메기술 때문에 참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술을 빚기 위해 차좁쌀로 오메기떡을 만들었을 때다. 정말이지 쫄깃하고 고소한 이 녀석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오메기떡을 접수하기 위한 신경전은 언제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술도둑이나 다름 없었다. 술 담그기 전 내가 훔친 횟수는 측정이 불능. 아마도 100개가 넘는 떡이 나의 뱃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묵인하다가 하루만에 범죄횟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당신의 눈빛이 달라지셨다.
 
"저 망할넘의 웬수...아비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잡놈시키."
 
어머니는 웃고만 있었다. 아마도 아이는 오메기떡, 어른은 오메기술을 차지할 수 있다면 공평한 분배로 여긴 것일까. 술의 재료가 줄어들면서 아버지의 시름은 늘어갔다. 대놓고 말은 못하고 난간마루에 주저앉아 죄없는 줄담배만 피워댔다.
 
▲   오메기떡을 만들기 위해 제주 전통 민속주 기능보유자 김을정 할머니(84)가 차좁쌀을 맷돌에 갈고 있다. ⓒ서귀포시청 윤대균 


사태 수습이라 해봤자 오메기떡 차롱(대바구니)이 있는 구들방을 지키는게 고작이셨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대여섯개를 훔치는 건 아주 쉬웠다. 그렇게 아버지에게는 시련을, 나에게는 아쉬움을 주었던 오메기떡이 벼룩의 간만큼만 남기고 모두 술의 재료로 항아리에 갇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의 유년을 들뜨게 했던 그 오메기떡으로 오메기술을 만든다. 그리고 오메기술로 고소리술(그 옛날 안동, 개성소주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소주의 하나였다)을 만든다. 내 고향 어음리 남정네들을 기절시킬 정도로 어머니는 술을 잘 담그셨다.
 
참, 초등시절 어른들 몰래 두어 사발 퍼 먹고 취해 해롱대는 동생을 누이들은 재미있다고 놀려댔었지. 떡을 빚고 술을 담그며 손놀림이 분주하셨던 어머니, 오늘은 유난히 그립다.
 
화산섬 제주는 보리와 조가 대표 식량이었다. 화산밭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쌀이 매우 귀했다. 명절날과 제삿날, 잔칫날을 빼면 곤밥(쌀밥)을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섬에서 쌀로 술을 빚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잡곡을 이용했다. 제주좁쌀은 훌륭한 술의 원료였다.
 
술은 언제라도 빚을 수 있지만 상강이 지난 뒤 햇좁쌀로 빚어야 좋다. 섬의 술꾼들을 애태웠던 오메기술, 어떻게 빚는지 보자. 술이 되려면 차좁쌀을 갈아 오메기떡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좁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반죽해 도넛 크기로 뭉친다.
 
가운데 구멍을 내기도 하고 그냥 작은 호떡처럼 둥그렇게 빚기도 한다. '오메기'는 가운데를 오목하게 눌러준다는 말에서 나온 것 같지만, 분명치 않다. 이것을 끓는 물에 넣어 익힌 뒤 건져내면 오메기떡이 된다. 떡으로 잡수려면 팥고물이나 콩고물을 입혀야 제맛이 난다.

오메기떡은 오메기술의 피와 살이다. 그런데 항아리에서 술이 익으려면 오메기떡과 물만으로는 안된다. 누룩이 있어야 한다. 돌래떡(메밀가루나 좁쌀가루로 빚은 둥그런 떡을 가리키며, 장지에서 상도꾼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대접하거나 무속의례에 사용)을 닮은 접시 크기의 누룩은 술의 생명이다.

▲  오메기떡으로 오메기술을 빚는다. 사진은 조와 좁쌀가루, 그리고 누룩. ⓒ서귀포시청 윤대균  

 
누룩은 보리쌀에다 밀가루를 섞어 만든 곰팡이떡이다. 보름정도 지나 노란곰팡이와 붉은곰팡이가 골고루 핀 누룩이 술맛을 제대로 돋운다. 가을에 만드는 누룩이 제일 좋다.
 
오메기떡을 조근조근 으깬 다음, 여기에 누룩가루를 넣어 골고루 섞이도록 물을 붓고 휘저어준다. 항아리에 옮겨 담을 때도 물을 적당히 붓는다. 발효 과정에서 하루에 너댓번을 골고루 저어주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정성이 모자라면 술은 그대로 반응한다.
 
술의 생명이 사람 몇을 때려 눕힐 정도로 팔팔하려면 발효 과정에서 온도조절이 필요하고, 발효상태와 숙성속도 등을 세심히 관찰하며 물을 붓거나 누룩가루를 더 넣어줘야 한다. 술의 기운이 떨어져 누룩을 더 공급해 주는 것을 제주에서는 '술을 일으켜 세운다'라고 말한다.
 
거품이 올라올 때면 비로소 술은 생명을 얻고 숨쉬기를 시작한다. 일주일쯤 지나면서 항아리 위에는 맑고 노르스름한 '웃국'(윗쪽 국물)이 뜨는데, 이것을 따로 모아놓으면 고급술인 청주(淸酒)가 된다. 항아리 밑에는 탁한 찌꺼기가 내려 앉는데, 이 '알국'(아랫쪽 국물)을 걸러내 만든 것이 오메기술이다. 겨울철에는 이불도 덮어주며 보름 정도 씨름하면 충분히 숙성된다.

  오메기떡과 오메기술 ⓒ오마이뉴스 정희종(왼쪽) ⓒ오디콤(오른쪽) 
 
이런 극진한 정성을 쏟은 다음에야 오메기술은 텁텁하고 알싸한 맛과 향을 품고 알코올 농도 18도 남짓 탁주가 되어 세상에 나온다. 술독을 열었을 때 입에 침이 고이고, 마시지 않더라도 뱃속이 뜨끈하면 술빚기는 일단 성공이다. 술이 잘 익은 것이다.

 어디 술만 익었으랴. 가족보다는 마을공동체가 강한 제주섬의 훈훈한 인정도 더불어 익는다. 어머니가 빚은 오메기술은 꽤 유명했다.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겠지만, 소문 듣고 한걸음에 달려오는 동네 주당들이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모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와 한 잔 두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노동의 고달픔을 술로 달랬다. 섬에 갇혔지만 술로 해방되었던 세월. 오메기술에는 제주 섬사람들의 고단했던 삶이 녹아 있다. 희망일 수도 있겠다.
 
술이 바닥나기 전에 누룩가루와 오메기떡을 다시 항아리에 넣어 발효시켜 왔듯이(이를 '술 살린다' 또는 '술 깨운다'라고 한다) 섬의 희망은 언제나 순환되었다. 집집마다 술이 익고, 울담 너머 인정이 오갔던 시절,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도 견딜만 했다. /굴렁쇠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