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영화 ' 크로싱 '을 보고 생각해 본 문제들

[논객 발언대]'하나님은 남조선에만 있는 겁네까?'

유은선 | 기사입력 2008/06/30 [08:47]

탈북자 영화 ' 크로싱 '을 보고 생각해 본 문제들

[논객 발언대]'하나님은 남조선에만 있는 겁네까?'

유은선 | 입력 : 2008/06/30 [08:47]
영화 '크로싱'포스터   © 편집부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이 지난 26일 개봉되어 현재 상영중이다. 한편 필자는 이 영화를 이미 시사회때 본 바 있다.
 
탈북자 혹은 북한문제를 다룬 작품은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에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기도 하다.

개봉후 첫 주말이 지난 현재 크로싱의 흥행성적은 저조한 편이다. 보도에 의하면 주말 예매율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퍼센트로 따져보면 1-3위권의 영화와 엄청난 차이다.
 
애초에 흥행면에선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솔직히 그래도 한편으론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탈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기에 실망감도 조금은 있다.

한편 생각보다 보수진영에서 ' 크로싱 '을 적극적으로 국면전환용 아이템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점도 이채롭다면 이채로운 현상이다.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광우병 정국 국면전환용으로 적극 홍보에 나섰던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일 정도다. 뭐 어쨌든 솔직한 필자의 감정은 그건 다행이라고 본다.

탈북자 문제가 한창 이슈화 되던때, 한 보수 월간지에서 기사를 통해 이런 문제제기를 했던게 기억난다. '왜 한국 작가들은 북한인권문제엔 침묵하고 있느냐?'고. 어찌보면 보수진영에서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단골 레퍼터리인 '북한인권 침묵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주장이기도 하지만 모순적인 측면도 있다.

문학과 예술의 경계선상에...'창작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중요

실상 문학이나 예술에서의 순수-참여 논쟁은 진보진영에서 먼저 시작했던 것이다. 문학이 사회에 참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 혹은 역사적 아픔이나 시대상황같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옳은 태도인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러한 순수-참여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시기가 7,80년대임을 감안한다면 그런 논쟁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문학이든 예술이든 중요한 것은 '창작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지 순수-참여 논쟁은 문학의 가치를 논하는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쉽게 예를들어 '가을동화'나 ' 겨울연가'는 국내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도 한류붐을 일으키며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그러나 이들 드라마에서 어떤 시대나 역사의 상처나 아픔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진 않다. 이건 그저 남녀간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을동화나 겨울연가가 질낮은 작품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시대의 아픔이나 상처를 이야기 했다면 그런 작품은 또 그런 작품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혹 그런 영화에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치밀한 접근이 부족했다던가 혹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있다면 그런것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거나 지적될 수는 있어도 그 작품 자체가 잘못되거나 나쁜 작품은 아닌 것이다. 순수예술이든 참여예술이든 작품은 그 작품 자체로 평가받고 존중받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하는 남한 작가들의 문제점'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난은 분명 이율배반적이다. 가령 유신이나 5공시절 군사정권의 폭압적 부분이나 그 시절 핍박받는 민중의 아픔을 대변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작품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나 '겨울나그네'가 혹은 김수현의 '사랑과 진실'이 시대의 아픔을 외면했다고 해서 그 작품이나 작가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 편집부


마찬가지다. 만약 북한인권문제나 탈북자 문제를 소재로 작품을 쓰는 작가가 없다고 해서 그들 전체를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을동화'나 '겨울연가'의 작가가 탈북자 문제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를 써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순수예술을 다루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의 의미가 있는것이고 시대의 아픔과 함께 하는 작가는 또 그 작가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작가도 그 성향이나 취향에 따라 나름대로의 특성과 재능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멜로소설이나 연애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있는가하면 시대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잘 쓰는 작가도 있고, 공상과학이나 환타지물을 잘 쓰는 작가도 있고 에로물을 잘 쓰는 작가도 있는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의 취향이고 재능일뿐 순수니 참여니 하는 이중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보수 월간지에서 '남한 예술인들은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한다'는 문제제기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념공세고 정치공세일뿐이다. 순수-참여 논쟁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그와같은 주장은 분명 모순된 면이 있다.

'크로싱'  이야기로 돌아가서 근 며칠간 이 영화를 보았다는 인터넷의 블로거나 영화매니아들의 평을 쭉 검색해보았다. 이미 시사회때 이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올린 네티즌도 생각보다 많았다. 다행이 블로거들은 물론 영화팬들의 반응도 대체로 호평이었다.

물론 눈높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영화 매니아들 답게 '크로싱'이란 작품 자체의 구성이나 기교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이나 혹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블로거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크로싱은 탈북자 문제에 무관심했던 일반대중중 최소한 영화팬에 한해서는 일정부분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하긴 한 것 같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던 냉소적 반응을 보인 영화매니아들도 더러 있었다. 개중 인상깊었던 표현은 '말로만 듣던 아오지 관광하니 좋네?'냐는 말이었다. 말로만 듣던 아오지 탄광 관광? 영화에 잠시 등장하는 노동단련대 장면을 두고 한 말 같은데,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국 7,80년대 반공교육의 잔상이 남아있는 세대에서 나올법한 냉소적인 표현인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크로싱이 무슨 아오지탄광이나 정치범 수용소를 남한 영화팬들에게 관광(?)시켜주자고 만든 영화는 분명 아니다. '화려한 휴가'가 80년대 광주시내 풍경이나 요즘 청소년들에게 구경시켜주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듯이 말이다. - 물론 만약 화려한 휴가를 본 영화팬중 그런식의 소감을 블로그에 올린 사람이 있었다면 그후 상당기간 항의댓글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한마디는 분명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준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북한인권 관련 세미나를 열면 참석자들중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들을 적잖이 목격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 젊은층을 대상으로 그런 세미나나 강연을 열면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더란 말을 한적이 있는 북한인권단체 관계자를 알고 있다.
 
결국 왜 탈북자나 북한인권문제는 국내에서 이슈가 되지 않는가 ? 이 본질적인 문제에 앞에 잠시 언급한 냉소적인 영화매니아의 한마디는 북한인권문제에 무관심한 대중의 정서를 대변해주고 있다.

'크로싱'을 보고 생각보다 많은 영화팬들이 눈물을 흘린 듯 하다. 하지만 정작 탈북자들은 북한의 현실을 10분의 1도 반영하지 못했다고 불평이다. 김태균 감독도 가급적 정치나 이념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북한의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감독은 평범한 북한가정의 일상이라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에 남한주민은 충격이고 탈북자들은 북한현실을 10분의 1도 채 반영 못했다고 불만인 것이다.

하지만 설사 통일이 되어 아니 통일까진 아니라도 그 어떤 탈북자 출신이 작가나 영화감독이 되어 북한의 식량난이나 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한 영화나 소설을 만든다고 해도 남한의 일반대중에겐 '열배 업그레이드 된 아오지탄광 관광' 그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쉰들러 리스트'가 나찌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다시한번 경각심을 일깨우고, ' 킬링필드 '가 크메르 사태의 이면을 고발했고, 혹은 '말콤엑스'나 '킹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미국에서 실재(實在)했던 흑인차별의 실상을 고발한것과 같은 그런 사회적 반향을. 탈북자나 북한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나 소설 혹은 드라마 따위는 최소한 남한사회내에서 그러한 반향을 일으키긴 힘들것이란 그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 왜 남한의 일반대중은 탈북자나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탈북자들의 불평처럼 남한주민들이 이기적이어서도 아니고, 재향군인회 할아버지들의 말씀처럼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철이 없어서도 아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어떤 청년들인가.
 
심지어 머나먼 아프리카 오지에 까지 가서 그곳의 헐벗고 굶주린 난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그런 젊은이들이 지금도 줄 서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오늘이다. 중국이나 미얀마의 지진,수해 피해자를 돕자고 젊은 방송예술인들이 직접 팔걷어 부치고 나서는 것이 오늘의 남한사회다. 그럼 왜 대체 북한인권문제에만 이토록 무관심한 반응들을 보이는 것일까.

결국 두가지 측면에서의 분석이 나오게 된다. '똘이장군'류의 반공교육을 받은 3,40대에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진짜 정치범 수용소 출신 작가가 나와서 그곳의 참상을 고발하는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것은 솔제니친의 ' 수용소 군도 '가 되지 못한다.
 
소련작가로 정부를 비판하다 본인이 결국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고 훗날 미국으로 망명 자신의 체험담을 소설 '수용소 군도'를 쓴 솔제니친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요덕스토리'는 남한의 3,40대에겐 그저 열배 업그레이드 된 똘이장군이고 아오지 탄광으로 가슴에 와 닿을 뿐이다. 그것이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10대,20대는 북한 자체가 그들의 관심밖의 일임 또한 또 하나의 현실이다. 6.25가 어떤 전쟁인지 모르고 북한을 외국이라 생각하는 10대,20대가 대다수다. 이러한 우리사회 구조와 대중정서의 근본적인 이해없이 기존의 좌우 이념구도나 정치갈등 해석의 잣대로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무관심 경향을 분석하려면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 편집부

" 하나님은 남조선에만 있는겁네까 ? "

'크로싱'에서 남한에 오게된 주인공이 절규하듯 외치는 대사다. 이 대사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와 닿은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조선에만 있느냐?'는 영화속 대사에 대한 반응은 극과극이다. 작가가 어떤 생각에서 이 대사를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찬들은 그 대사를 신앙에 대한 그리고 절대자에 대한 절실함으로 받아들였지만, 불신자들에겐 역으로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더 큰 회의를 안겨다 주었다.

실제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나서 신앙을 버렸다는 한 북한인권 단체 관계자를 알고 있다. 그의 말을 간단하게 정리 요약하면 "하나님은 무책임하거나 무능한 것 같다"는 것이다.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알고도 외면한다면 그건 무책임한거고 모르고 있다면 그건 무능한 하나님 아닌가. 멀쩡히 지구상 어느곳에 존재하는 현실을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이 모른다면 말이 되는가.

사실 이 대사의 원조는 따로 있다. 탈북자 출신 작가가 직접 극본을 쓴 뮤지컬 '요덕스토리 '에 나오는 노래 한구절이다. 극중 수용소 수감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하나님, (만약 계시다면)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우리 요덕에도 좀 와 주세요'. 남한에 와서 어설프게 잠시 신앙생활을 한 순진한(?) 탈북자 작가다운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대사가 영화에선 아들을 북에 둔채 남한에 정착하게 된 주인공의 절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사가 '크로싱'을 본 비 기독교인 영화팬들에겐 신앙에 대한 그리고 절대자에 대한 더 깊은 냉소와 회의 그리고 외면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만약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남조선에만 있는겁니까?'란 대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요덕스토리'가 한창 공연중일 때, 그 영화를 보았다는 어떤 보수 기독교인의 감상문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게 기억난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 영화, 음악, 미술, 뮤지컬, 오페라등은 모두 거짓이라 안 보지만 요덕스토리는 진실을 말하고 있기에 보았다'는.

물론 근본적으로 르네상스가 신권중심이었던 중세유럽에서 인간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예술운동이었기 때문에, 그 보수 기독교인의 신앙적 해석은 틀린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를 가진 보수 기독교인을 굳이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실제 필자도 초신자 시절 한 기독교 문화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그분보다 더한 말씀을 하시는 교회 장로이신 소설가를 본적이 있다. 그분 왈 '르네상스 이래 모든 예술작품은 사탄의 음모'란 것이다. -.-;;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졌는데, 결과적으로 필자는 영화 '크로싱'을 통해 탈북자나 북한인권 문제가 일반대중이나 젊은 세대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회현상을 다시한번 분석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크로싱'을 본 영화팬중 상당수는 눈물을 흘린 듯 하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것처럼 '말로만 듯던 아오지 탄광 관광' 운운하는 냉소주의자들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현상이 존재하는한 앞으로 설사 이보다 더 리얼하게 북한의 참상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가 나온다 하더라도 결국 '열배 업그레이드 된 아오지 탄광'이 될뿐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같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진 못할것이란 이야기다.

아무튼 '크로싱' 덕분에 한국 예술계는 '북한인권문제를 외면한다'는 비난에서 짐을 조금 덜 수 있게 되었다. - 그러한 지적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 아울러 '하나님은 남조선에만 있느냐'는 영화속 대사에 대한 남한의 매우 보수적인 중년층 이상 기독교인의 답변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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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연 2016/07/14 [00:11] 수정 | 삭제
  • 요덕스토리는 참고로 극우탈북자로 낙인찍힌 정성산 감독이 제작한 뮤지컬이고 크로싱은 배우 차인표씨가 탈북자역할을 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인데 보수개신교도인 나로서 지금은 너무 우려를 할정도이니....!!!! ㅡㅡ;;;;;;
  • 계란맨 2008/07/01 [13:46] 수정 | 삭제
  • 교회에서 이 영화를 꼭 보도록 해서 한 번 봤는데 하도 슬퍼서 뒷골이 땡기네요.. 특히 기자님이 말했던 그 대사에서는 너무 아팠습니다. 여태까지 북한인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그들의 굶주림을 돌봐주지 않았던 내가.. 너무 아팠습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힘든 북조선을 위해 남한의 풍족함을 허락했을지도 모르는데 정작 그 명령을 이행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아픔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절규앞에 하나님이 저희를 보냈습니다. 하고 그들과 같이 울어주고 아파해줄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