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5)-1. 유치장 풍경.

레지나 | 기사입력 2007/01/21 [09:11]

겨울 이야기 (5)-1. 유치장 풍경.

레지나 | 입력 : 2007/01/21 [09:11]
i.
12월초의 차가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나는 신당동 시장 골목길을 들어선다. 밤 9시쯤 되었으려나... 떡볶이 냄새와 온갖 맛있는 먹거리들의 향연이 배고픈 배를 더더욱 미안하게 만들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한 끼 밖에 먹지를 못했다. 그것도 선배 만나서 간신히, 수배자로 도바리 생활을 한지가 어느새 3개월째 접어든다.

9월 교내 개헌투쟁을 마지막으로 주도한 이후 수배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한 달 전부터는 고향친구인 선이네 자취방에  얹혀살고 있다.

선이도 남동생인 준이와 방을 같이 쓰고 있었던지라 염치없었지만 다행히 그 집이 선이네 이모 집이어서 내가 그 집에 들어간 이후로는 준이는 이모와 같이 잠을 잔다.

선이역시 *대 사대 학생장으로 활동하다보니 나의 처지를 너무도 잘 이해해주었기에 이런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그 집은 시장 통을 한참 지나서 들어가다가 과일가게를 거쳐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오늘도 백열등에 더욱더 맛스럽게 보이는 귤 상자가 쌓여있는 통로를 지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아버지의 모습이 비친다.

“어~~어~~, 왠 ~ 일...?”
“옥아~~~”

갑작스레 구석에서 짭새같이 생긴, 아니 짭새인 두 남자가 나타나서 나를 양쪽에서 잡는다.

“ ***, 맞지?”
“예에에... 그런데~~요?”

“마포경찰서 정보과에서 나왔다. 같이 좀 가자”

“옥아, 아부지가 형사님들에게 잘 얘기했으니까 걱정 말고 따라가. 자수한 걸로 해주시겠다고 했으니까...이 추운데 언제까지 도망다닐래? 이 형사 분들이 아부지를 찾아와서 너 잘 되게 해주신다고 하길래 내가 여기까지 모시고 왔어. 니가 여기 있는 것은 니 친구 윤이통해서 알았구. 어쨌든 걱정 말고 이제 맘 편히 여기 형사분들 따라가. 아부지도 같이 따라가 줄께”
“.....................”

말문이 막혔다. 아, 이렇게도 잡혀가는구나.........내일 모임은 어떻게 하지.......
검은 지프차에 두 형사는 나와 아부지를 뒷좌석에 나란히 태우고는 출발했다.

아부지는 가는 동안 내내 옆에서 거의 줄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한 손은 내 손을 꼭 쥐시고... 이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마포경찰서...근데 왜 마포서일까? 내 담당은 동부서인데...

경찰서에 도착하니 시끌 법석 난리다. 술에 취해 고꾸라져있는 주정꾼에, 여기저기서 조서를 받느라고 형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피의자들에...
전국적인 학생운동관련 수배자명단을 보여주며 내 이름을 보여준다.

“자, 여기 **대학교 여학생회장 ***, 맞지? 지장 찍어” 인주를 건네준다. 말없이 시키는 대로 인주를 뻘겋게 찍은 다음 내 이름 옆에 살며시 갖다 댄다.

두 형사는 마치 한 건 했다는 듯 흐믓한 표정으로 담배 한 대를 꺼내며 울아부지에게 권한다. 이어서 자기들도 담배를 피워 문다.

“아버님, 수고하셨어요. 딸내미 보시니까 좋지요? 우선 시장하실 테니 따님이랑 식사부터 하시고 늦었으니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내려가세요”

마치 선심이라도 베풀듯이 깍듯하게 울아버지에게 예우를 한다. 자신들의 한 건에 공을 세우게 도와준 우리 아부지에게...

설렁탕 두 그릇이 쟁반에 담겨 왔다. 배가 무지 고팠지만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머릿속이 하애져서 뭐부터 생각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간다. 억지로 아부지를 생각해서 대충 식사를 마쳤다.

“***, 너는 이쪽으로 와서 앉아있어. 아버님은 저기서 잠깐 쉬고 계세요. 따님과 잠깐 얘기좀 하구요. 일찍 주무시게 해 드릴께요.”

내 담당 형사가 나에게 의례적인 질문 몇 가지를 하고는 어차피 내 담당관할은 동부서니까 내일 아침이면 동부서로 넘어 갈 거란다. 그러니 오늘 밤은 저기 유치장에서 아버지랑 잠을자게 배려를 해준단다.

“내일 동부서에 가서 조사받을 때 잘해 내가 시키는 대로... 너 자취방에서 나온 자료들 중에 위험한 것은 내가 너네 아버지를 봐서 빼 줄테니까 걱정 말고...아부지가 네 자랑이 끝이 없던데...공부나 열심히 하지 그 좋은 머리를 왜 쓸데없는데다 쏟냐, 이놈아!!!”

아뿔싸!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써 벌어진 것이었다. 내가 그 선이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먼저 와서 자취방을 수색하여 내 자료들을 모두 압수해서 차에 실어놨던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 자료들이 생각났다. 내가 썼던 유인물들과 자료집, 그리고 금서들...

그날 밤 나는 울아부지와 함께 유치장 찬 바닥에서 군용담요를 덮고 새우잠을 자야했다. ‘아부지 죄송해요. 이런 험한 꼴 보여드려서...이런 험한 경험 시켜드려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면서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울아부지의 마음이 어땠을꼬....... 

ii.

그 다음날 동부서로 이송되어 일주일을 꼬박 조사를 받아야했다. 다행히도 내 담당 허형사의 배려로(?) 조금은 수월했다. 주요인물에 대해서는 일 거수 일 투족을 감시하고 때로는 적절한 타협(?)도 하는 각 경찰서에서 나온  담당형사가 있게 마련이다.

 소위 짭새라는 이름의... 열흘정도 동부서 유치장에 갇혀있으면서 수시로 불려나가 조사받고 난리(?)치고......누런 갱지에 써내려간 진술서만도 몇 백 장에 이르렀다.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즉 의식화 과정부터 그동안 주도했던 모든 시위의 내막에 이르기까지...기억력이 좋아야만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형사들이 자료를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흔히들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은 ‘기억이 잘 안 납니다’라고 얼버무리거나 버티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정보과에서 4박5일의 조사를 마친 후에 수사과로 넘겨졌다.

허형사가 나를 수사과로 데려가서는 말한다. “살살 다뤄주쇼, 얘는 그렇게 독기가 있는 애가 아니니까...”

여기서는 주로 폭력시위 가담여부를 조사받게 된다. 시위현장에서 찍은 비디오를 통해서 폭력시위의 가담 정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주로 일반 폭력사범들을 다루는 곳이다 보니 정보과와는 무척이나 분위기부터 다르고 험하게(?) 다루었다.

조사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이던 어느 날, 허형사가 다시 나를 데리러 유치장으로 왔다.

“특별 면회야, 니네 아부지가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특별히 배려해  정보과 사무실에서 만나게 해준다. 수갑도 안 채운다, 알았지?”

그날 그렇게 아부지랑 헤어지고 나서 일주일만인가? 아부지랑 오빠가 오셨다. 엄마가 싸준 맛있는 도시락을 가지고서.......엄마는 일부러 안모시고 왔단다 아부지의 말씀이...너무 맘 아파할 것 같아서...애써서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며 밝게 웃음지어 보였다. 음식도 맛있게 먹었다.

구치소로 넘어가면 다시 면회 온다고 하시며 건강하고 잘 버티라는 아부지와 오빠의 말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시 유치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 미안한 마음.......그러나 어쩌랴.......
 
부모님이 얼마나 나에게 배신감을 느꼈을꼬... 장학생으로 대학 들어갔으니 어련히 공부 잘하고 아르바이트해서 생활비도 벌어 쓴다고 하니 기특하다고 온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을텐데...4년 동안 감쪽같이 속고계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계속해서 형사들이 찾아와 딸의 행방을 다그쳐 물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하셨을꼬........그저 막내딸이 안쓰러워 못 견디시는 마음 그것 뿐이셨을까?

당시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홍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어느 날 면회를 왔다. 원래 학생운동 관련인 들은 직계가족이나 배우자 외에는 면회가 제한되어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실제 애인이 없는 경우에는 후배들이나 동료들이 가짜로 약혼자서류를 만들어 옥바라지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지라 역시 그 사람 학생운동시절에  담당이던 허형사의 배려로 유치장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나마 얼굴을 대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속옷이 필요할거란 생각에 속옷을 사가지고 깨알 같은 글씨로 사랑을 담은 편지를 몰래 접어 넣어 슬며시 전해주었다. 허형사를 통해서.....아, 그리운 사람이여..........
iii.
이제는 유치장이야기를 해 볼까한다.

첫날 유치장에는 밤 늦게가 되어서야 들어가게 되었다. 여경으로부터 몸수색을 당하고 나서야 개인 소지품을 모두 뺏긴 채로 창살안의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원형모양으로 된 공간에는 모두 아홉 개의 방이 번호가 매겨져있었다. 내가 들어간 방은 1번방이었다. 첫날은 그저 얼떨결에 들어가 딱딱한 마룻바닥에 군용담요 한 장을 덮고 자야했다.

이미 세 명의 여자들이 자고 있었다.  우선은 아무 생각 없이 자야했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이렇게 얇은 담요하나로 어떻게 자란 말인가........

다음 날 아침 6시, 의경의 ‘기상’ 소리에 잠을 깼다. 어차피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그저 마음이라도 편히 있자하고 마음먹은 탓인지 몸은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았지만 그래도 잠은 잘 잤다.

자세히 보니 유치장 방안에는 냄새나는 변기하나만이 있었다. 문은 반쯤의 높이로만 가려진채로.....냄새는 고약하고...

1번부터 9번까지 번호가 매겨진 방 앞에는 작은 칠판에 죄명과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절도, 강도, 강간, 살인, 소매치기, 간통, 사기, 특가법, 집시법, 국보법........ 9번방은 구류자들을 위한 방이다.

구류자들은 단기간에 이곳 유치장에서 있다가 나갈 사람들이니 간수들로부터 요즘말로 빡쎄게 수난을 당한다. 수시로 ‘퍽’ ‘탁’소리에 그야말로 하루 종일 시끄럽다.

이 시기에 이곳 유치장에 나 이외에 유난히 집시법, 국보법 위반학생들이 많았던 이유가 있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건국대사태’가 바로 그 원인이었다.

1986년 10월 28일부터 4일간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건국 대학교에서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결성식을 한 이후 농성에 들어가 3,0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1,525명을 연행하고 이중 1,289명을 구속 송치했었다.

그러다 보니 구속 수감할 유치장이 모자라 서울 시내 곳곳에 분산 수감하여 조사를 하고 검찰로 송치한 직후였다. 나와 같이 수배되어 잡혀와 뒤늦게 조사를 받는 동지들인 셈이었다.

어느 날 성균관대 총학생장이란 학생이 검찰로 송치되는 날이었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그 학우에게 “힘내세요. 끝까지 투쟁합시다”라고 내깐에는 격려한다고 한 소리 했다가 간수의 곤봉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하나 둘씩 검찰로 송치되고 또 새로 들어오고........

간수들이 시간제로 교대 근무를 한다. 가끔씩 무료한 시간이면 의경인 간수들은 유치장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논다(?). 각 방별로 장기자랑도 시켜가면서 말이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끼들이 나오는지 잠시나마 그 시간은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모두 잊곤 한다. 이때, 대학생들에 대해서는 예외다. 의경들 역시 대학 다니다가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 조금은 배려의 차원으로 건드리지 않는다.

구류자중에 기억에 남는 노인이 한분 계셨다. 간수 왈, “ 이 노인네 또 들어왔네. 추워서 오갈 데 없으면 들어오니 아예 여기가 노인네 안방이야 안방. 아예 이번에 재판 받을 때는 판사에게 부탁해보시지 그래. 징역 1년 정도 살게 해달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좀 좋아!!!”

이런 사람도 있었다. 밤늦게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엄청 두들겨 맞았다. 알고 보니 술먹고 싸우다가 폭행치상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그 사람이 다음 날 결혼식을 앞둔 새 신랑이라는 것!.
 
다음날 정신을 차려 간수에게 사정사정한다. 제발 결혼식에만 참석하고 다시 오게 해달라고, 그게 어디 통할 소리나 되는가...

전과 9범의 강도 강간 살인범!!! 말로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이 중죄인은 그 당시에 아차산 근처에서 일어난 10여건의 강도강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란다. 간수들도 아예 건드리지도 않고 그도 조용하다.

유치장에서의 식사는 그야말로 누런 양은 도시락에 나오는 깡 보리밥에 말라비틀어진 단무지가 전부다. 거기다가 보호자들의 배려로 주어지는 사식이란 것도 있다. 보호자들이 구내식당에 돈을 내면 알아서 사식이 들어온다. 깡보리밥에 비하면 엄청나게 맛있는 밥과 반찬이다.

첫날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두고 혼자 가시면서 이미 나의 사식을 신청해 놓고 가셔서 나는 처음부터 사식을 먹게 되었다. 물론 같은 방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흔히들 감방갔다 오면 콩밥 먹었다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단 한 번도 콩밥은 없었다.

내가 있던 방에는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아줌마들은 주로 간통이나 사기죄로 들어오고 어린 여자애들은 소매치기 등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그 안에서는 그래도 착해 보이던데...모두들 사연들이 많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갑자기 옆방에서 간수가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부른다.

“형, 형~~, 저예요. 정량이~~”
“어~~? 너 왠일이야?”

같은 과이면서 가끔 총학 일을 도와주던  후배였다. 나를 형이라고 불렀었다.

“시위하다가 잡힌거야?”
“아니요, 저 ...절......도로요.”
“어쩌다가???”
“오토바이를.......”

사연인즉 이랬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장남인 정량이가 생활비가 없어서 남의 오토바이를 훔쳐서 팔려다가 잡힌 것이었다. 에구 어쩌다가 쯧쯧쯧...........
마음이 아팠다.
 
절도죄란 죄명이 평생 따라 다닐텐데.....그런 처지로 나를 아는 척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그 이후로는 내게 들어온 사식을 그 후배에게 넘겨주었다.

그 안에서 내가 그 후배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

다음은 검찰로 송치되어 구치소로 넘어가서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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