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만해 '한용운'을 얼마나 아는가!

우리 가까이 있는 '만해 기념관'...한용운 정신의 산실로 재도약

전보삼/만해기념관 관장 | 기사입력 2008/12/23 [05:16]

그대! 만해 '한용운'을 얼마나 아는가!

우리 가까이 있는 '만해 기념관'...한용운 정신의 산실로 재도약

전보삼/만해기념관 관장 | 입력 : 2008/12/23 [05:16]
1. 만해기념관 태동기(1963-1980)
 
1) 만해를 만나다

만해기념관의 출발은 긴 태동기(1963-1980)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만해기념관 설립(1981-현재)과 운영 또한 긴 여정이었음을 먼저 밝혀두고자 합니다.
 
만해기념관 태동기는 필자의 고향 이야기로 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강원도 영동의 중심도시 강릉이 필자의 고향입니다. 60년대 초만 하여도 전국의 교통망이 발달되지 않아 강릉 또한 교통의 오지로 남아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의 충격이 없는 잠자는 도시였습니다. 그 곳은 첩첩 산중 백두대간의 준령으로 쌓여 있는 도시로 어린 나에게도 답답하게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강릉시 금학동 소재 ‘관음사’라는 사찰은 나에게는 호기심 천국이었습니다. 당시만하여도 강릉을 기점으로 하여 오대산이나 설악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강릉은 영동지방의 교통 요충지요 많은 객승들이 머무는 장소였습니다.
 
그러한 객승들은 나에게 새로운 바깥소식을 전하여 주는 파랑새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객승들로부터 듣는 바깥세상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호기심 천국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중에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만해 한용운 선사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사이 님의 침묵의 시를 줄줄 외우고, 만해 기일(6월29일)에 열반제 올리며 만해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고교 2학년생이던 1962년 3월 첫 국어 시간에 문득 만난 근대시초 1.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수업은 충격의 시간이었습니다. 만해를 잘 모르던 친구들은 필자의 만해 한용운 사랑을 조롱하듯이 놀렸는데 그 주인공이 교과서에 등장하리라는 사실은 필자도 친구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만해 한용운의 시가 현실이 되어 고등하교 2학년 국어 첫 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친구들은 국어 선생님에게 필자를 추천하였고, 선생님은 반신반의하면서 필자를 교탁으로 불러냈고 국어 선생님을 대신하여 1시간 수업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즉흥 연설과 강의를 대신하여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므로 만해 한용운에 대한 운명의 끈을 단단히 동여매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만해 관련 자료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하였으며 오늘의 만해기념관을 만들어 내는 단초를 제공받은 시기였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나에게 하나의 철학이요, 신앙과도 같은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2) 대불연 시대

나는 대학생활 중 한양대학교 불교학생회를 만들어 창립 초대회장을 하였고, 만해 한용운의 시화전을 개최하면서 선지식들이란 모임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한국 대학생 불교연합회(약칭 대불연)의 간부가 되었고 대학생활과 대불연 활동에도 열성이었습니다.

 
▲ 대불연 활동때의 만해 사상 강연회 장면.     © 박물관뉴스

그 중심에 만해 한용운이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주최한 전국대학생 학술논문발표회에서 “한용운의 민족주의 사상연구”를 발표하여 최고상의 명예를 않으면서 학술적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만해 한용운 선사 그 웅지를 영원의 지표를 삼자”라는 책자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1772년 [한용운전집]이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되는 과정에 자료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한용운 연보의 작성에 관여하게 되는 행운도 함께한 시기였습니다.
 
1973년 [한용운전집] 보급의 실무까지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한용운전집] 보급 운동에 대학생활의 청춘을 다 바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때 경봉스님, 석주스님, 효당 최범술, 해오 김관호 선생을 만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행운도 함께한 시기였습니다.
 
3) 청진동 시대

1977년부터 만해사상연구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한 시기입니다. 중심무대가 한용운 전집을 발행한 신구문화사의 한 모퉁이 방에서 청진동 시대를 열었습니다. 낮에는 대장부의 뜻대로 만해를 연구하며 한용운 전집보급운동을 하였고, 저녁에는 직장인으로 돌아가는 고달픈 삶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재미있고 자신만만하고 패기와 열정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특히 1979년은 만해탄생 100주기가 되던 해였습니다. 만해탄생 100주기 추모 학술강연회와 [한용운전집] 전6권을 수정 보완하여 증보판을 보급한 일을 가장 특징적인 일로 들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한용운사상연구] 발행(1979), [정본 님의 침묵](1979) [조선불교유신론](1980)을 차례로 발행하면서 출판을 통하여 만해정신을 널리 선양하였습니다.
 
특히 “만해 한용운 관계문헌 연구”를 통하여 만해 연구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고, 본격적으로 만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시기였습니다. 일련의 작업으로 만해기념관(1981)의 문을 열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습니다. 1981년에 비로소 만해 한용운의 우거였던 성북동 심우장으로 옮겨 본격적인 만해기념관 개관을 준비하였습니다.
 
2. 만해기념관 설립(1981-현재)과 운영
 
1) 심우장 시대


1981년 10월 31일 드디어 성북동 심우장을 임대하여 본격적인 만해기념관을 열고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심우장은 만해선생을 따르던 안국동 선학원의 벽산 김적음 스님께서 초당을 지으려고 마련하였던 북장골 송림 중의 52평을 내어 드린 것이 발전하여 심우장을 짓게 된 것입니다.

 
▲ 81년 10월 31일 심우장시대 만해기념관 개관.     © 박물관뉴스

후학 동지들도 나중에 협찬을 하여 후일 52평의 땅이 더 매수 하여 지금의 100여 평의 땅에 20여 평의 심우장을 짓게 되었습니다.
 
총독부 청사를 마주보기 싫어 북향집이 되었다는 일화를 간직한 곳입니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강토가 왜놈들에 짓밟히는 뼈아픈 역사 속에서도 민족의 혼을 간직한 유일한 조국의 땅 심우장 이었습니다.
 
여기 심우란 뜻은 무상 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란 뜻으로 만해의 일생이 그러한 것처럼 늘 공부하는 집이란 뜻입니다. 만해의 심우장에는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구루가 만해의 기상을 닮아 늘 푸르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 80년대 초 만해기념관.     © 박물관뉴스

심우장에서 만해는 유마경 원고를 번역하였고, 신문, 소설 잡지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고,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갖고 대하였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는 순환함이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일세,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 것일세." 하면서 자상하게 타이르시던 삶의 체취가 풍기던 심우장입니다.
 
심우장 만해기념관에서 [한용운사상연구 제2집] 발행(1983), [석전시초] 발행(1983),[석전문초] 발행(1984),[한용운시론집] 발행(1984)등을 통하여 만해 사상 보급 운동을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만해기념관의 운영을 개인이 책임진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영의 어려움을 않고 고심하다가 이전을 결심하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다 호국정신의 성지인 남한산성으로 옮기기로 마음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성북동 심우장의 만해기념관 시절은 영광과 좌절을 함께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이후 심우장은 서울시 사적 제7호로 지정되어 문화유적지가 되었고 국가에서 특별 관리하는 성북동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2) 호국의 성지 남한산성에 웅지를 펴다

1990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내의 만해기념관을 개관하면서 본격적인 만해기념관 시대를 열었습니다. 특히 남한산성의 만해기념관은 필자가 사재를 들여 정성껏 설계하여 문을 연 사립박물관입니다. 이제 이 터전에서 본격적인 만해 사상을 선양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만해와 더불어 미래를 개척자 정신으로 살아 갈 수 있는 터전인 것입니다. 민족자존의 역사가 숨 쉬고 호국 정신의 성지인 남한산성 안에 만해기념관을 꾸민 이유는 만해의 나라사랑의 정신이 남한산성의 주제와 잘 부합하면서 관람객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  만해기념관 내부 전시관  ©박물관뉴스

"많은 국민이 만해기념관에서 님, 침묵, 사랑의 시혼을 불태웠던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일제 강점기 동안 한평생을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삶의 자취를 접할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남한산성에 만해 기념관을 세운 것은 산성 축성에 조선 8도 승려들이 참여하는 등 호국 정신이 서린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을 계승하고 받들어야 함은 국민의 도리입니다."라는 신념이 남한산성 내에 만해기념관을 세우게 된 큰 뜻입니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912-1번지 만해기념관은 대지 520평, 연건평 120평( 지상 2층) 규모로 기획 전시실(60평) 교육관(40평) 자료실(20평)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 만해기념관 전경.     © 박물관뉴스

기념관은 전통 한옥의 건축 양식을 현대에 조화시킨 건물입니다. 만해에 관한 한 모든 자료가 잘 정리된 만해기념관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라사랑의 독립 정신과 이성와 감성의 조화를 추구하였던 만해의 님, 사랑, 그리고 침묵의 혼을 접하면서 만해의 정신과 삶의 자취를 우리들의 가슴에 세기고, 느끼게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 만해기념관에 있는 만해 한용운 흉상.     © 박물관뉴스

만해 한용운은 “좋은 일에 자료가 되는 역경에 싸여 있는 조선의 청년들아 우리는 득의의 행운아일는지 모른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보다도,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먼저 분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정신의 산실,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뜰을 나서면서 마음의 어떤 충동의 불길이 솟구침은 우리와 만해가 이미 하나가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 만해기념관 찾아 오시는 길.     © 박물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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