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봉침 고치는 거 봉게 우리 아들도 다 컸네!”

형님댁에서 만난 손재봉틀...옛 친구처럼 반가워

조종안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9/01/21 [06:04]

“자봉침 고치는 거 봉게 우리 아들도 다 컸네!”

형님댁에서 만난 손재봉틀...옛 친구처럼 반가워

조종안 논설위원 | 입력 : 2009/01/21 [06:04]
며칠 전 형님댁에 들렀다가 어머니와 누님들의 손때가 묻은 재봉틀이 거실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재봉질을 할 때 옷감을 잡아주고 실톳에 북실을 감아주던 시절이 생각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 재봉틀1 형님댁에 있는 50년도 더 된 재봉틀. 동네에서 솜씨가 있다고 소문난 아주머니들은 한 번씩 만져봤던 재봉틀이기도 합니다. 집에 큰일이 있을 때는 서로 빌려서 사용했으니까요.  ⓒ 조종안

반짇고리와 실톳, 기름통도 색만 변했지 그대로 있고요. 저와도 사연이 많은 재봉틀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저곳에 나있는 작은 흠집도 어머니와 누님들의 손때로 보였는데요. 닳고 닳아 반밖에 남지 않은 손잡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재봉틀에 기름을 치고 깨끗이 닦아놓으니까 "자봉침 고치는 거 봉게 우리 아들도 인자 다 컸네!”라며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밝은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칭찬에 굶주리고, 다 컸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던 철부지가 벌써 이순(耳順)이라니 헛웃음만 나오네요. 
 
제가 소개하는 재봉틀은 50년도 더 되었고, '싱가미싱' 혹은 '인장표 미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중매결혼을 했던 그 시절 여성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가장 갖고 싶은 물건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반짝이던 돌림바퀴가 검게 녹슬고 손잡이의 반이 없는 재봉틀에서 칠순을 바라보는 셋째 누님과 막내 누님,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살림을 도와주던 숙모님, '난순네 엄니' 그리고 쌀가게를 하시느라 자주 사용은 못 했지만, 어머니의 체취가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수님은 지금까지 고장 한 번 나지 않았다고 자랑하며 어쩌다 필요하면 꺼내서 사용한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갔기 때문에 더욱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957년에 4만 환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화폐개혁 전이니까 지금 돈으로 4천 원이 되겠습니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외숙모가 머리에 재봉틀을 이고 골목 어귀로 들어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 후 재봉틀은 셋째 누님이 2년쯤 사용하다 시집을 가니까 막내 누님이 주인이다 싶을 정도로 사용했는데요. 옷감 자투리로 밥상보를 만들고 제가 입을 바지통을 줄여주기도 했습니다.
 
두루마기에서부터 저고리 잠방이 조끼 등을 손으로 만들어 입던 50년대만 해도 재봉틀 보기가 지금의 고급 승용차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그런 시절에 재봉틀 등장은 바늘에 실을 꿰어 한 땀 한 땀 박아 손질해서 옷을 만들던 사람들에게 경이롭게 느껴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재봉틀은 1960년 초 공업용이 들어오고 마을과 직장단위로 계를 해서 사들이는 사람들이 늘면서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고, 예비신부가 꼭 챙기는 혼수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이디알 미싱’, ‘부라더 미싱’, ‘드레스 미싱’ 등의 상표 이름이 기억에 남네요.
 
70년대까지만 해도 '삯바느질'이라고 적힌 간판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타고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는 어머니들이 많았다는 얘기지요. 남편도 없이 사는 홀어머니의 피나는 땀의 대가이기도 하겠지만, 삯바느질로 대여섯 되는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정도로 재봉틀 한 대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막내누님과 재봉틀
 
누님들이 바느질하려고 재봉틀을 내놓으면 옆에 앉아 구경했는데요. 손잡이를 돌리면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는 앞면의 실걸이가 저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는 것 같아 재미있었고, 바늘이 들어갔다 나오면서 밑실을 걸고 나오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 재봉틀2 재봉틀 앞면(좌)과 손잡이(우) 부분. 앞면과 돌림바퀴 모두 하얗게 반짝이는 은빛이었는데 녹이 슬었더군요. 제 몸도 저렇게 녹슬고 손잡이처럼 망가진 것 같아 잠시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 조종안   
  
  
바느질감 자리를 정한 다음 노루발을 내리고 손잡이를 돌리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면서 미끄럼판 위의 톱니가 앞뒤로 오갔는데요. '돌돌' 거리며 연하게 돌아가는 모습은 기계라기보다는 장단에 맞춰 소리 내는 전통악기 같았습니다.
 
북실을 감아주고 뒤에서 옷감을 잡아주고 막내 누님에게 용돈을 얻어 쓰기도 했는데요. 실톳을 북집에 끼우고 북실을 감는 법, 바지 줄이는 법, 간단한 조작과 닦는 법 등을 막내 누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익힌 기술이 훗날 용돈을 정당하게 버는 에너지가 되더라고요.     
 
실을 감을 때 실타래를 양손에 꿰는 것에서부터 실이 감긴 실톳을 북집에 넣어 밑실로 사용하는 방법 등 하나씩 보고 배우다 보니 제가 직접 명찰을 달기도 하고 바지를 줄여 입기도 했는데요.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해군에 입대한 형님이 휴가를 나오면서 헌 작업복 바지 하나를 가지고 왔을 때 얘기입니다. 당시만 해도 미제 청바지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는데요. 좋아라 하며 막내 누님에게 바지통을 줄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더라고요. 해서 제가 줄여서 입으려고 재봉틀 앞에 앉았습니다.
 
맘보바지가 유행이었던 당시에는 발목이 6인치밖에 되지 않는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하면 안 되는 게 더 많았던 군사독재 시절이라서 바지통은 물론 모자(교모) 디자인까지 학교에서 검사했는데요. 혼날 땐 혼나더라도 줄여서 입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공휴일이나 일요일에 입고 뽐낼 바지였으니까요.
 
바지통을 줄이려면 바지 양쪽을 뜯어 재단은 못해도 눈대중이라도 맞춰야 하는데, 좁히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재봉틀로 안쪽을 줄여서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바지가 왜 그 모양이냐고 묻더라고요. 해서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제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바지통이 틀어져 꼴불견이 됐더라고요. 결국, 누님이 바로잡아주기는 했지만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재봉틀에 관련된 사연들도 아련한 추억들이 켜켜이 쌓인 추억의 일기장을 장식하고 있는데요. 실에 침을 발라 바늘귀에 몇 번씩 찌르며 “눈이 침침한 게 나도 인자 늙었는개비다.”라고 하시던 어머니와, 극장구경 시켜줄 테니까 옷감 좀 잡아달라고 부르던 막내 누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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