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 적대감정 상술에 이용한 대전표

<채수경 칼럼> 천박한 스포츠 쇼비니즘

채수경 | 기사입력 2009/03/26 [06:30]

한일간 적대감정 상술에 이용한 대전표

<채수경 칼럼> 천박한 스포츠 쇼비니즘

채수경 | 입력 : 2009/03/26 [06:30]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는 싸움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 대회 진행방식의 하나인 ‘토너먼트(tournament)’도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들 중의 하나다. ‘tournament’라는 말의 뿌리는 ‘말을 따고 싸우다’라는 의미의 고대 프랑스어 ‘torneier’, 거기서 ‘말을 타고 마주 달려 긴 창이나 칼로 상대방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시합’을 뜻하는 ‘tournoi’가 생겨났고, 통상 ‘tournoi’는 두 편으로 나뉜 참가자들이 1대1 맞대결을 벌여 낙마한 숫자로 승부를 결정지었는데, 그게 훗날 스포츠 대회 진행방식의 하나로 굳어졌다.
 
또 스포츠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으로서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한 것이었다. ‘sports’는 ‘즐기다’라는 의미의 ‘disport’의 줄임말이고, ‘disport’의 뿌리는 ‘-로부터’ ‘-과 분리하여’를 뜻하는 접두사 ‘dis-’와 ‘옮기다’라는 의미의 ‘porter’가 붙은 중세 프랑스어 ‘disporter’, 일로부터 분리하여 즐기는 것을 말한다.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는 전체주의 나라들일수록 스포츠에 열을 올린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스포츠를 통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려 했고, 냉전 시대 구소련과 동독은 굶어죽을지언정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많이 따 대외적으로는 체제우위를 선전하고 대내적으로는 인민의 결속을 도모하려고 애썼으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한국의 독재자들 또한 스포츠를 국민들의 불평불만을 달래는 데 이용해먹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한국인들이 국가간 경기에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응원한다든지 일본이나 북한과의 경기에 흥분하는 우스꽝스런 전통도 그 때 생겨난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가대표 야구선수들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 진출하게 한 힘은 ‘애국심’과 ‘명예’였다”고 말한 것도 이 대통령이 개발독재 시절의 우등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wbc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아쉽게도 ‘대한민국’이 ‘쪽바리 일본’에게 패배하여 자존심 상한 애국자(?)들이 많았으리라. 처절한 야구전쟁, 위대한 도전, 통한의 사인 미스, 석패, 눈물...별별 단어들을 총 동원하여 뒤풀이를 하고 있음에 메이저리그 휴지기에 부수입도 올리고 미 프로야구의 국제적인 영향력도 확대할 겸 wbc를 창설한 mlb 사무국 사람들이 깔깔거리게 생겼다.
 
실제로 mlb 사무국은 한일간 적대감정을 흥행에 이용하여 수입을 극대화하려고 한국팀과 일본팀이 최대 5번이나 맞붙도록 대진표를 짰고, 그게 적중하여 5차례의 한일전에만 총17만 3529명의 관중이 몰렸던 바, 기분은 제쳐놓고 실속으로만 따진다면 수많은 한인동포들이 야채과일 팔고 손발톱 다듬어서 번 돈을 메이저리그 발전기금으로 헌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막말로 말하자면 mlb 사무국은 한국팀과 일본팀이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생쇼를 벌이는 바람에 손 안 대고 코 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부분이 까발려지는 게 싫었는지 한국 언론들은 “전 세계 야구 챔피언을 자처하는 미국팀이 졸전 끝에 중도 탈락하여 개망신을 당했다”고 떠들어대지만 몸값이 수백억원에 달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은 부상을 우려하여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마지못해 참가한 선수들 또한 설렁설렁 시늉만 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에 피식 웃음이 절로 머금어진다.
 
야구 그 자체의 묘미를 즐기는 미국의 야구팬들은 이번 대회에 미국의 명예를 눈곱만큼도 걸지 않았다는 것은 wbc 소식을 한 번도 주요기사로 취급하지 않은 미국의 매스컴들이 더 잘 안다. 야구는 스포츠의 일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천박한 스포츠 쇼비니즘(chauvinism)을 경계해야 한다. 결승전에서 한국팀을 꺾은 소감을 말해보라고 하자 “야구는 누구든 이길 수 있고 질 수도 있으며 승패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한국과 wbc 결승전에서 경기하는 것은 자랑스럽다. 좋은 경쟁관계로,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겸손하게 웃어넘긴 다쓰노리 일본팀 감독에게서 한 수 더 배우기 바란다. 한때 나라까지 빼앗겼던 일본에게 야구게임에서는 백 번 천 번 져도 괜찮지만 품위와 교양에서까지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채수경 / 뉴욕거주 언론인>


원본 기사 보기:뉴민주.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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