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훌륭한 장수도 있었다니 놀랬어요

[살며 사랑하며] 최호(崔湖) 장군 ‘412주기 시민추모제’ 개최

조종안 | 기사입력 2009/05/16 [07:07]

이렇게 훌륭한 장수도 있었다니 놀랬어요

[살며 사랑하며] 최호(崔湖) 장군 ‘412주기 시민추모제’ 개최

조종안 | 입력 : 2009/05/16 [07:07]
▶내고장 알기 일환으로 역사탐방을 하고 있다는 학생들. 이색적인 모습의 참가자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 있다.  ⓒ 조종안 

 
 
임진왜란 때 칠천량(漆川粱) 해전에서 순국한 최호 장군의 '412주기 시민추모제'가 14일(목) 오전 10시30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있는 충의사 일원에서 관내 향교 유림과 경주 최씨 후손, 시민, 학생, 사회단체 등 1천여 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에 봉행됐다.    
 
최호 장군 시민추모제는 역사교사였던 김양균, 남정근 등 뜻있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1990년 9월4일(음 7월16일) 제1회를 시작으로 해마다 열리고 있다. 집례 봉제선언으로 시작된 이날 추모제는 제례에 이어 추모식과 기념공연이 펼쳐졌는데, 장군의 큰 뜻을 기리고 계승 발전하기 위한 행사로 치러졌다.
 
특히 올해는 최호 장군의 살신성인 보국 정신과 장군이 태어난 고장의 자긍심을 드높이고 기념하기 위해 본국무예단의 한국전통무예(조선시대)를 시연했으며, 군산지역 초중고 학생 글짓기 공모도 실시했다.
 
내 고장 바로 알기 하나로 역사탐방을 왔다는 군산 제일중학교 학생들은 선조 임금이 최호 장군에게 내린 40여 점의 교지와 교첩, 유서 등이 전시된 유물관을 둘러보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만 계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훌륭한 장군도 있었다니 놀랬어요!"라며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 최호장군 사당에 재배하는 초헌관들. 오른쪽부터 군산 부시장, 시의장, 옥구향교 전교  ⓒ 조종안   

추모제 및 기념행사

 
추모제 행사는 1,2,3부로 나눠서 진행됐는데, 1부 제례는 군산국악 관현악단의 종묘제례악 연주에 맞춰 참례자 전원의 재배에 이어 초헌관(군산시 부시장)의 전폐례, 초헌례, 축관의 독축, 아헌관(시 의장)의 아헌례, 종헌관(옥구향교 전교)의 종헌례, 초헌관의 음복례, 집례의 종제선언 순으로 올렸다. 
 
2부 추모식은 개식사와 국민의례에 이어 헌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준다는 진혼풀이(임귀성 예도원장), 35사단의 진혼곡 연주, 경과보고, 관계 기관장들의 인사 및 추모사, 발산초등학교 학생들의 추모가 합창에 이어 제전위원장과 후손의 인사가 있었다.
 
12시 점심에 이어 오후 1시부터 3부 행사가 이어졌다. 금강예술단의 풍물놀이와 추모가 합창, 살풀이춤, 한국전통무예(조선시대) 시연이 있었는데, 무예시연은 시간을 조선시대로 돌려놓은 듯했고, 태평소 소리는 화려하면서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최호 장군 제례는 군산시 관내에 있는 옥구 향교와 임피 향교가 해를 바꿔가며 모시고 있는데, 작년에는 임피 향교에서, 올해는 옥구 향교에서 집례했다.
 
김양규(84세) 군산향토문화연구회장은 최호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은 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이고 어머니가 장군을 잉태했을 때 넓은 호수에서 백마가 놀다가 집안으로 힘차게 달려오는 꿈을 꾸었기에 호수 호(湖)자로 따서 장군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문동신 군산 시장은 부시장이 대독한 추모사에서 "최호 장군의 호국정신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살아 숨쉬고, 후대를 살아가는 군산시민 모두의 정체성 확립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당이 있는 충의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감실(龕室)을 설치하여 사대 봉군 된 네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발산초등학교에 있는 석등, 석탑과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역사자료이며, 입구에 주차장이 있어 대형 버스 주차도 가능하다.

▶ 마상에서 활쏘기 시연을 하고 있는 한국전통무예 단원. 화살이 과녁에 명중할 때마다 박수가 쏟아졌다.  ⓒ 조종안   

 
최호(崔湖) 장군은 어떤 인물?
 
최호(崔湖) 장군은 중종 31년(1536년) 경주 최(崔)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 장군의 4남으로 선조 7년(1574년)에 무과 병과에 급제하였고, 선조 9년에는 무과 중시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무장이었다.
 
뛰어난 무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북방 및 국토의 중요한 곳을 다니는 기회를 얻게 된 장군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로에게 무장으로서의 수련을 받았다고 한다.
 
39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최호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여 근처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이 억울하게 투옥되기 전까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임진왜란(선조 25년) 때에는 15만 왜군의 공세에 선조의 의주 서천(西遷)한 위급한 전황에서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소수 병력으로 함경도 일대를 장악한 왜군 정예부대의 진격을 차단하고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왜군에 타격을 주어 의주를 지키는 국권 수호에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선조 30년) 때에는 원균 통제사가 이끄는 연합함대의 부산 해전의 선봉장으로 선전하였으며 칠전량(漆川粱) 해전에서는 대함대의 야습을 분석 적의 주력함대에 타격을 주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왜군의 집중포화를 받아 62세에 장렬히 순국했다.
 
최호 장군은 1604년(선조 37년) 공식 책록시 청난공신 이등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자헌대부, 병조판서, 의금부사로 추종 되었으며, 계성군으로 봉군 시호는 충원공이며 사당을 충의사로 명명하였다. 유물관에는 교첩, 교지, 유서 등 40여 점과 삼인 보검이 보관돼있다.(자료제공: 최호 장군 추모제전위원회)
 
일제강점기 시절 쌀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에 왜군과 맞서 싸운 최호 장군과 같은 훌륭한 무장이 있었다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으며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복웅 군산 문화원장은 "이 행사가 미래 세대들에게 살신보국하신 최호 장군의 큰 뜻을 기리고, 숭고한 호국충절의 뜻을 계승하고 아울러 우리 고장의 자긍심과 올바른 민족정신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호 장군이 칠전량 전투에서 전사하자 선조대왕은 손수 치제문을 내려 위로 하였는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선조대왕이 내린 치제문
 
 
오직 경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만 힘써왔고, 뛰어난 재주에 갑옷을 입고 일찍이 무술을 닦아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이 날로 더 했다. 왜적이 침범 하였을 때 하늘의 뜻을 지키는데 용감하여 동방을 놀라게 진동시킨 그 때 그 일···. 

장수로서 등단하여 계략을  다하여 지휘하고 온갖 힘을 다 내어 여러 번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를 떨치어 왜적이 깊숙이 들어와 온도(溫島) 그 섬에서 화살이 다 하도록 싸웠지만, 어찌할 수 없어 몸을 바쳐 의(義)를 택한 만고의 충절이 날로 더불어 빛나니 맹부(盟府)에서 수고와 공로에 대한 갚음을 주는 것은 내가 사사로이 경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정성스러운 그릇 이기에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되었도다.
 
공로를 생각하는 바가 여기에 있어 나의 가슴이 매우 슬퍼서 예관을 보내어 강신하니 나의 술잔을 박하게 여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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