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스포츠기사 제목은 '휘승청패', 무슨 뜻?

한국 야구 여명기, ‘황성 YMCA 야구단’ 탄생과 소멸

조종안 | 기사입력 2016/10/11 [05:47]

최초 스포츠기사 제목은 '휘승청패', 무슨 뜻?

한국 야구 여명기, ‘황성 YMCA 야구단’ 탄생과 소멸

조종안 | 입력 : 2016/10/11 [05:47]

 


[신문고뉴스] 조종안 기자 = 우리나라에 서구식 체육(야구, 축구, 농구, 배구, 체조 등)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고종(高宗) 임금이 '교육입국조서'를 공포하는 1895년 2월 2일 이후로 전해진다.


조선 정부는 교육입국 정신에 따라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세운다. 고종은 지(知), 덕(德), 체(體)를 3대 강령으로 삼고, 체육 활동으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여 무병장수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권장한다. 이에 따라 각 학교에서는 체조를 정규 과목에 포함시킨다.


 

▲ 일제강점기 소학교 여학생들의 체조 모습 ⓒ 동국사     

 


고종은 아관파천(1896) 때 영어학교 학생들이 체조하는 모습을 돌아본다. 당시 조련사는 영국 해군 관원이었고, 학생들은 군복차림이었다. 근대적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고종은 현역 무관을 관립학교 체조 교사로 보낸다. 체조 교사 가운데는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노백린(1875~1926)도 있었다.


한편, 서양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 교사들과 개화된 일부 지도층에 의해 화류회(운동회)가 열리고, 각종 구기 종목이 전수된다. 그중 '서양 공치기(서양 굿)', '서양식 격구' 등으로 불리었던 야구는 1904년 황성 기독교청년회(YMCA) 초대 총무 질레트(Gillett) 선교사가 회원들에게 경기방식을 가르친 것이 시초이다.


야구가 처음 보급된 해로 기록되는 1904년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그 해이자 을사늑약 1년 전으로 한반도는 세계열강들이 패권 다툼을 벌이는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일제 침략이 가시화되던 시기였다.


질레트는 '한국야구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우리나라에 농구, 스케이트, 복싱 등도 보급하였다. 개화기 체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는 1895년 배재학당 기독교계 학생회로 출발하여 사회단체로 발전한 협성회(協成會)가 YMCA 세계본부에 간사파견을 청원하여 1901년 한국에 온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식 이름 길예태(吉禮泰)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YMCA의 다른 이름은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기독교청년회 전신). 질레트가 대한제국 황실에서 하사한 지원금과 뜻있는 내외국인들 성금으로 1903년 10월 28일 지금의 서울 종로에 설립한 기독교단체였다. 설립 목적은 교육·계몽·선교였으며 연설회와 토론회 등을 운영하였다.


질레트는 체육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YMCA 회원들에게 틈틈이 야구 기초를 가르쳤다. 캐치볼을 하는 회원들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조선인들은 '서양 굿'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시설이 갖춰진 운동장 하나 없던 이 땅에 최초로 '황성 YMCA 야구단'이 창단되고, 각 학교와 애국 청년회마다 야구팀이 구성되면서 한반도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하는 통감정치 기간(1906~1910) 결성된 스포츠 단체는 10여 개. 스포츠 불모지나 다름없던 나라에서 이 같은 비약적인 발전은 당시 정치·사회적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 운동경기, 특히 야구는 서구 문명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했고, 항일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공포 후 한성(서울)에서는 미국, 영국 등 외국인들의 야구경기가 열렸다. 인천 등 항구도시에서는 캐치볼을 하는 외국인 선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야구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는 2002년 제작되어 야구팬들의 관심을 모았던 영화 에도 잘 묘사되고 있다.


질레트가 야구를 보급하기 8년 전인 1896년 4월 25일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 공터에서 한성에 거주하는 미국인팀-미 해병대팀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미 해병대팀이 1점 차로 승리하였다. 이는 미국인들이 조선에서 치른 최초 야구경기로 기록된다. 그해 5월 2일에는 훈련원에서 미국인팀-영국인팀 경기가 열려 영국인팀이 4점 차로 패하였다.


1896년 6월 23일 자 <독립신문> 영문판은 그달 25일(화) 오후 3시 훈련원에서 열리는 야구경기(미 해병대-미국인팀) 예고기사를 싣는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조선인 서재필 박사가 제이 손(Jai sohn)이라는 미국인 신분으로 미국인팀 6번 타자 겸 중견수로 출전한 사실이다. 서 박사가 미국 시민권자이긴 하나 기록에 나타난 최초 한국인 야구선수가 되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는 미 해병대팀이 23-16으로 승리하였다.


 

▲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가 1930년 4월 2일 치 신문에 조선 최초 야구경기로 소개한 사진. 1910년 2월 26일(음력) 훈련원에서 열린 한성학원-YMCA 경기 장면이다. 망건에 두루마기차림의 관객들 모습이 이채롭다.ⓒ 군산야구 100년사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끼리 펼쳐진 최초 야구경기는 1906년 3월 15일 훈련원(조선 시대 무과 시험장이자 군사훈련장)에서 개최된 황성 YMCA 야구단-덕어학교(독일어 학교)의 일전이었다. 경기 결과는 덕어학교가 3점 차로 승리. 이날 경기는 장비와 포지션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엉성했고, 선수들은 갓만 벗었을 뿐 무명고의적삼에 짚신 차림이었다.


경기장도 훈련원 넓은 마당에 선을 그어 다이아몬드를 만들었고, 게임도 지금처럼 9회까지 진행하지 않았다. 투수 플레이트(투수판)도 없었고, 루심이나 선심이 없이 심판관(주심) 한 사람이 경기를 진행하였다. 그라운드가 고르지 못해 선수들이 자주 상처를 입었으며 주자가 슬라이딩(도루)도 할 수 없었다.


총알 같은 안타를 치는 타자보다, 공을 높이 띄우는 선수가 강타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공을 높이 띄우면 수비수들이 영락없이 못 잡았으니 진루율이 100%에 가까웠다는 것. 또한, 객석이 없는 관계로 관중이 많을 때는 심판과 선수들이 경기장을 정리하면서 시합을 치르는 등 그야말로 '동네 야구' 수준이었다.


시합하다가 중간에 운동장을 정리하느라 경기 소요시간이 길어졌다. 배트와 포수용 미트는 한 개를 가지고 양 팀이 돌려가면서 사용하였다. 외야수는 좀처럼 글러브 맛을 보기 어려웠고, 맨손으로 공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파울볼에 맞아 다치는 사람이 늘면서 야구는 축구보다 위험한 운동이라는 의식이 확산된다.


 

▲ 훈련원에서 야구경기 개막식 모습(1919년)ⓒ 동국사   

 


1907년 휘문의숙(휘문고 전신) 야구팀이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팀에 연패를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한 번 이기자 당시 '황성신문'은 <휘승청패>(徽勝靑敗:휘문이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팀을 이겼다는 뜻) 제목을 붙여 보도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스포츠 기사로 전해진다.


체육에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 일반 독자와 양반들은 야구 관련 기사를 보며 '신문에 게재할 게 얼마나 없으면 젊은 사람들과 학도들이 장난한 것을 보도하느냐'며 비웃었다 한다. 그중에는 모든 운동경기를 '밥지랄' 한다고 비하하며 선수들을 '운동꾼', '놀음꾼' 등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야구는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시기 청년들의 의기를 북돋워 줬다. 단순한 스포츠 그 이상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08년 8월 19일에는 고종황제 요청으로 선수들을 불러 어전(御前)에서 시범경기를 갖기도 하였다.


1909년 7월 21일 일본 유학생들이 야구단을 조직하여 고국을 방문한다. 그들은 유니폼에 스파이크를 신고 황성 YMCA 팀과 열전을 펼쳤다. 이 대항전은 한국 야구사에 '제1차 동경 유학생 모국방문경기'로 기록된다. 선수들 옷차림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는 복장이어서 구경꾼이 많이 모여들었다. 유학생 야구단과 경기를 치르면서 기량을 터득한 황성 YMCA 팀은 이듬해 평양, 개성, 선천, 안악 등지로 원정경기를 다니며 전국으로 야구붐을 일으키는 데 공헌한다.
 

▲ 1911년 11월 평양원정에 나선 황성기독청년회 야구단. 앞줄 맨 오른쪽이 질레트 선교사(조선야구사)ⓒ 동국사    

 


1910년, 황성 YMCA 야구단은 최초로 'YMCA'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착용한다. 선수들은 경기를 치를수록 실력이 급성장, 강팀으로 변모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일본팀과 야구를 보급한 미국 선교사 팀까지 연파하면서 국내 야구를 평정한다. 그리고 1912년 가을 원대한 꿈을 품고 '일본원정' 길에 오른다. 당시 이를 보도한 일본 언론들은 투지 넘치는 선수들 모습을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1910년대는 한국 야구의 여명기로 선수를 지도하고 감독할 통일된 기관이 없는 데다 규칙(rule)도 엉성하였다.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기차요금도 엄청나게 비싸 규모가 큰 대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방 경기도 친선경기나 대항 경기가 산발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경기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피압박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터뜨리는 한풀이 마당의 성격이 강해진다.


황성 YMCA 야구단은 1913년 이후 그라운드에 오를 수 없게 된다. 일제의 탄압이 야구장까지 손을 뻗쳤던 것. 그해 6월 조선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문제 삼아 질레트 선교사를 국외로 추방하고 리더들이 유학을 떠나면서 활동이 위축되고 그해 10월 팀이 해체된다. 그 후 야구단이 이룩한 영광도, 선수들 얼굴도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된다.


덧붙임: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과 기독교인 수백 명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그중 105명이 감옥에 갇힌다.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을 지켜본 질레트는 '105인 사건'은 조작 날조된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세계선교사 위원회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한다. 국제사회에 폭로하려 했던 것. 그러나 이를 알아챈 조선총독부가 질레트를 강제 추방하였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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