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곽마을 7개권역 생활문화 기록집 발간

신종철 기동취재본부 본부장 | 기사입력 2017/02/19 [14:11]

서울시, 성곽마을 7개권역 생활문화 기록집 발간

신종철 기동취재본부 본부장 | 입력 : 2017/02/19 [14:11]


[신문고 뉴스] 신종철 기자 = 서울시는 지난 2년여간 7개권역 성곽마을에 대한 마을의 역사, 도시형태 및 생활문화자료조사, 주민인터뷰 등을 실시하고, 그 내용을 담은 성곽마을 생활문화기록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성곽마을이라는 장소적 특성을 역사‧사회‧경제‧건축 등 다방면에서 조사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지역의 정체성을 재조명하고,17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성곽마을 재생사업을 통해 마을의 가치를   보존관리하는 사업 등에 반영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번에 발간하는 보고서는 15년부터 재생계획을 수립 중인 ‘이화‧충신권’, ‘행촌권’, ‘부암권’, ‘다산권’, ‘혜화‧명륜권’, ‘삼선권(369마을)’, ‘성북권(북정마을)’ 등 7개권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화‧충신권 성곽마을’ 은 빼어난 도심 조망경관과 대학로와의 근접성을 바탕으로 문화예술인들이 다수 거주하며, 서울시 최초 연립주택단지이자 주거사박물관인 ‘이화동 국민주택단지’(현재 104채 중 90채 존치)가  잘 보존되는 등 ‘예술과 문화가 숨쉬는 하늘동네’ 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화충신권은 조선시대 5대 명승지로 손꼽힐만큼 산새가 빼어나 많은 문인들이 찾아 풍류를 즐긴 곳으로, 석양루, 조양루, 이화정 등 왕족 저택, 정자가 있던 곳이다. 조선왕실에 우유를 공급하던 유우소(乳牛所)가 있었고, 우유를 재료로 한 ‘타락죽’이 왕실과 권세가에 보양식으로 제조 되었다.


왕실, 세도가에 공급되던 최고의 배추 생산지인 ‘방아다리 배추밭’, 청국에 볼모로 갔던 효종에게 맛있는 동치미를 담가줬던 흥덕이에게 하사했던 ‘흥덕이밭’ 등이 있던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무분별하게 지어진 토막촌, 판자촌을 정비하고, 주택 양성화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연립주택단지인 ‘이화동 국민주택단지’를 건설하였으나,  노후화로 공가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을 최근 주민 스스로 마을박물관 형태로 전환‧관리를 통해 서울에서 유일하게 그 모습이 잘 보존된 중요 자산인 「살아있는 주거사 박물관」 으로 자리잡았다.


2000년 후반부터 문화예술인들이 유입되어, 주민들과 함께 매년 ‘이화 마을박물관축제’ 등을 여는 등 지역문화 보존과 주민화합을 꾀하고 있다.


행촌권 성곽마을’ 은 조선 후기 자생적인 한양도성 바깥마을로서 근대 서울 실크 생산의 중심지이자, 한국 커피문화의 발상지이며, 4대문안 농산물을 제공하던 경작지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경사지 특성상 많은 일조량, 여유공지, 저층주택 옥상 등을 활용, 도시농업 시범마을로 특화되어 가고 있다.


마을 외곽으로는 사직단, 경희궁,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경교장 등이 있으며, 마을 내부에는 딜쿠샤와 바로 옆 600년 가량된 행촌동 은행 나무를 비롯, 홍난파가옥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는 반면, 민가는 조선 후기부터 나타난 자생적인 한양도성 바깥마을이다.


192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내 동리 명물’ 시리즈에서는 교남동 명물로 대장간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이 경기감영, 경기중영, 북일영 등 군영이 많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하며, 1884년 잠상공사(蠶桑公司)가 설립되어 경희궁 후원에 뽕나무 수천 그루를 심은 이래, 행촌동 일대는 근대 서울 실크 생산의 중심지였다.


한양행 건물 뒤편에는 쁘레상 집터가 있었는 데, 프랑스사람 쁘레상은 땔감사업을 하면서 무악재를 넘어 오는 나무장수들에게 ‘화살통만한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건네며 흥정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양탕국으로 불린 커피가 대중화한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행촌권은 한국 커피문화의 발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도 ‘남으로 창을 내겠소’ 의 김상용 시인, ‘감자’를 쓴 김동인 작가가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며,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과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진 추계 최은희 선생도 행촌동에서 꽤 시간을 보내는 등 행촌동은 ‘문인과 학자의 마을’이기도 하였다.

 

부암권 성곽마을’ 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조선시대 도성 안의  치열한 현장에서 한걸음 벗어나 사회,문화,정치를 논하는 중심이었던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가 있던 곳으로, 몽유도원도(안견)의 실제 배경이기도 하다.


현재 다양한 분야 전문가, 예술가들이 거주하면서 삶과 깊숙이 맞물려진 다양한 켜의 문화예술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지리적인 가장 큰 특징은 백악과 인왕산 능성에 둘러진 한양도성과 흔히 자하문이라고 불리는 창의문에 있다. 부암동이라는 지명은 세검정(洗劍亭)쪽 길가에 높이 2m의 부침바위(付岩)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


특히, 무계동은 자하문 밖 서쪽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수석이 좋고 경치가 매운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위 부암동의 최초 주민이라고 일컬어지는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자리 잡으면서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현장에서 한걸음 벗어난 사회, 문화, 정치를 논하는 중심이 되었다.


부암동 및 신영동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전국에서 가장 질 좋은 한지 생산지였고, 중국에 공물로 보내는 종이, 왕실과 관청용 종이, 과거 시험용 종이 등의 대부분 이 곳 소산이었다.


또한, 부암동은 성북동과 더불어 18세기 이래 옷감을 짜서 햇볕에 말리는 표백업의 중심지였고, 동아일보(1928.5.13.)에 의하면 창의문 밖은 ‘경개는 아름답지만 토척지박(土瘠地薄)하여 농사는 잘 되지 않고 오직 과수 재배에는 적당하여 능금이 잘 되는 곳’으로 알려져 1940년대까지도 여름이면 능금을 사러 오는 서울시민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 지역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예술가가 거주하면서 단순한 문화예술활동 보다는 삶과 깊숙이 맞물려진 다양한 켜의 문화예술적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혜화‧명륜권’ 은 조선시대 유일한 대학촌이자 하숙촌이었던 지역의 특성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조선왕조 최고 학부였던 ‘성균관’ 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인 반촌(泮村)지역으로 문묘와 성균관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곳으로, 주된 생업은 하숙업과 숙박업이었다.

 

반촌(泮村)’ 이란 문묘 양 옆으로 흐르다가 그 앞에서 합치는 물길을 ‘반수(泮水)’라 하는 데, 이 두 물길 주위에 형성된 마을을 반촌이라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반촌’은 조선시대 신성시되던 문묘와 성균관 때문에 치외법권지역이었고, 18세기말에는 경모궁(서울대병원)까지 반촌의 경계로 삼았다.

 

1920년대 후반 ‘반촌’ 대신 ‘학교촌’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930년대부터는 ‘신문화촌’이라는 이름도 얻었고 지금에 이른다.


조선시대 이 지역 주변에 유명했던 ‘흥덕사’ 와 송동일대의 넓은 앵두밭이 있었고, 흥덕사를 올라가는 골짜기에 따라 흥덕동천이 흐르고, 조선시대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집도 위치해 있다.

 

다산권’ 은 도성 밖 남산자락에 자리잡은 지역으로 도시민의 일상이 살아있는 남산아랫마을이다.


희문(수구문)은 도성안의 상여를 밖으로 통과시키던 문이었기 때문에 문 밖에는 神堂이 많았고 신당동의 동명은 신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문 밖 신당동은 신당이 밀집한 무속 중심 지대였기 때문에 북, 장구, 징, 꽹과리, 부채 등의 무구와 유기, 목기 등의 제기류를 제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선정부는 훈련도감 창설 직후, 도감병을 정예병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른 군영의 병사들보다 우대하여 최고급 면포를 지급하였고 이를 띠, 대님, 댕기 등으로 염색, 가공하여 내다파는 등 군병과 그 가족들의 부업활동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며 살아온 서민주거 마을이었다.


1930년대까지 이 마을은 대부분 논과 밭이다. 6·25이후 실향민이 내려와 판잣집이 조성되었으며 1960~70년대에 주택개량 및 양성화 조치 이후 저층 주거지로 형성되었다.

 

삼선권 369마을’ 은 넓고 평평한 들판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군사훈련장이자 운동장으로 최초 축구경기, 자전거 경주대회가 열렸던 곳이다.


최근 장수마을을 시작으로 삼선3, 삼선6구역 등이 재개발구역을 해제하였고, 한성대, 청년예술가 등과 연계, 예술로 물드는 성곽마을 조성을 통해 지역재생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혜화문 밖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를 포함한 넓은 평평한 들판이었던 ‘삼선평’의 지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세 신선과 놀았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선평’ 은 20세기 초까지도 흰 모래사장과 잔디밭이 펼쳐진 한적한  농촌지대로서 인가조차 드물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까지 군사훈련장이자 운동장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경기와 최초의 자전거 경주대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14년말 마을계획단을 구성, 주민이 주도하는 마을 만들기에 나서고 있으며, 최근 커뮤니티비즈니스를 기반으로 사회적경제를 구축코자 ‘도성하우징 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또한, 한성대, 청년예술가들과 협업, ‘예술로 물드는 성곽마을’ 조성을 계획하고, 지역재생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성북권 북정마을’ 은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일제 강점기 대표적 문인촌이자,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교류가 일어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메주를 쑤어 궁궐에 납품한 곳으로도 유명하며, 이를 바탕으로 현재도 마을주민이 직접 생산한 된장을 판매하며, 월월(月wall)축제, 산신제, 원두막 지붕올리기 등 다양한 마을활동을 하고 있다. 


북정마을 일대는 60년대 김광섭 시인이 사랑과 평화에 대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이 된 지역으로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달동네이며, 서울시가 선정한 2013년 우수마을 공동체로 뽑힌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자연지형과 계곡, 복숭아나무 등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풍류객이 많이 찾아 왔고, 정계 혼란을 피해 문인, 시객들의 은거 수양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의 대표적 문인촌이자 부호들의 별장지대로서, 해방직전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교류가 일어난 지역이었다.


북정마을의 유래로 가장 타당성 있는 것은 한글 ‘북적거리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인데, 영조 44년(1768년)에 궁궐에서 쓸 메주를 쑤어 납품할 권리를 성북동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메주를 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 고 해서 북정마을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성곽마을 생활문화자료조사는 이외에도 지역민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마을살이를 돌아볼 수 있었으며, 생동감 있는 기록을 위해 사진 및 영상 기록물도 제작하였다.


또한, 보다 많은 시민이 성곽마을 가치를 공유할 수 있도록 탐방 가이드북 제작(3월). 성곽마을별 순회 전시회 개최(5월) 등에 활용예정이다.


진희선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전세계적으로 역사마을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양도성 주변 성곽마을을 보전하고 발전시키려는 서울시의 노력을 알리는 시작” 이며,  “앞으로도 소중한 역사적 자원과 문화를 아끼고, 미래가치를 발굴하여 발전시키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할 예정이다.” 라고 말했다.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