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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곳이 한강 변 이어서 아침 일찍 출근하기 전에 이곳을 산책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있다.
멀리 한강 철교 위를 지나가는 기관차를 볼 적마다 내가 회사 일로 일본에 주재하였을 때 비즈니스로 만났던 마루야마 씨의 생각이 난다. 마루야마 씨의 어릴 적 꿈은 철도 기관사가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철도 기관사의 꿈을 가진 성실한 비즈니스맨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높은 직책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듯 보였다. 그가 일하는 회사는 일본에서 마켓 쉐어가 거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소방차를 제조하는 회사의 공장장이었다. 꽤 높은 지위의 비지니스맨이었고 성실했던 분으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일하는 소방차 회사의 상무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소화기를 제조하는 회사에도 근무한 적도 있었다. 소화기 제조공장은 일본의 미에현의 어느 작은 시골이었는데 오사카에서 철길로 가도 1시간 반 이상이나 걸릴 정도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공장이 있었다. 일본에는 시골 구석구석에도 제법 번듯한 공장도 많이 있었다.
그는 꽤 먼 거리를 그의 오사카의 집에서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는 전형적인 성실한 일본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서 오사카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도 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출장을 가야 했기에 오사카에 내려서 미에현까지 열차를 이용해서 미에현의 소화기 공장까지 가야 했다. 열차의 차창으로 보이는 시골풍의 산야와 초목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광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들이 연속해서 지나가고 있는구나 생각했다.
열차역에는 마루야마 씨가 언제나처럼 역 앞에서 그의 차를 대기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의 비즈니스 회의는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회의는 거의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을 때가 많았다. 정작 소화기 공장에 도착해 서의 회의는 형식적인 회의였고 그와 나는 차 안에서 그날 회의의 결론은 이미 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고 형님 아우처럼 친하게 지냈다.
공장 방문 후 소화기 공장의 직원들과 공장 근처의 작은 정원이 있는 일식집에서 저녁 식사도 함께했다. 미에현의 소화기 제조공장은 공장 지역이라기보다 오히려 잘 정돈된 농촌 지역의 홀로 서 있는 공장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정도로 외딴곳에 있고 있었다.
일본 미에현에서 쌓은 신뢰와 우정
미에현의 시골 지역은 예전부터 강수량이 부족해서 농촌의 전답에 물을 대는 것이 어려워서 산언덕의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전답에 대기 위해서 콘크리트로 만든 수로를 100여 년전에 여러 곳에 물길을 만들어서 물이 필요한 전답에 물을 대고 있었다.
물 내려오는 소리가 꽤 요란스러웠는데 호텔이 인근에 있어서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히려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역시 자연의 소리는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루야마 씨의 소화기 공장에 여러 부품을 오래도록 납품했는데 소화기에 들어가는 부품은 숫자가 많아서 한국에서 수출하는 큰 물량은 내가 하는 회사의 매출액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소화기의 종류에는 축압식과 가압식 소화기가 있는데 일본은 거의 다 가압식 소화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90% 이상을 가압식 소화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축압식 소화기 보다는 가압식 소화기의 구조가 조금 더 복잡했고 가공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소화기 부품을 수출하기 위해서 소화기 부품을 가공해야 했는데 한국의 작은 중소기업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가공이어서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한국에서 가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마루야마 씨는 일본 소화기의 부품을 가공하는 공장에 한국의 가공 기술자를 데려가서 견학을 시켜 주었던 적이 있었다,
일본의 가공공장에서는 그들의 일거리를 빼앗기는 상황인데도 마루야마 씨가 워낙 무서웠던 탓인지 울며 겨자 먹기로 기술을 알려 줄 수밖에 없었는데 속상해하는 것 같았다. 일본의 가공공장을 견학하고 나오면서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마음이 아프기는 하였다. 그런데 마루야마 씨는 그 공장에 또 다른 일거리를 주기로 했다면서 괜찮다고 하여서 마음이 놓이기는 하였다.
마루야마 씨와 나는 소방차 회사 회장님의 소개로 어느 특장차 업체의 공장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에서 온 내가 일본에 자동차부품을 수출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만나보고 한국의 부품을 소개받아 보라고 해서 어느 계열사의 특장차 공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와 대화를 해 보니 만나는 그 순간부터 서로가 의기투합이 잘 되었고 마루야마 씨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았다.
우리는 이후에도 대화가 잘 통했고 비즈니스의 소통이 잘 되었고 비즈니스 이외에도 작은 가정생활의 일이라든지 가족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부품을 소방차 회사와 계열회사인 특장차 공장 그리고 소화기 공장으로 한국산 부품을 생산해서 수출하게 되었다.
나는 기아자동차의 일본 주재원으로 수년간 일본에서 일했었는데 그 후 한국에 복귀하고 얼마 후 일본에서 만났던 일본 비즈니스 파트너의 도움으로 나의 회사를 만들어서 오랫동안 회사를 운영해 오고 있다.
내가 독립해서 운영했던 나의 회사의 실적의 많은 부분을 마루야마 씨가 도와주는 덕분에 매출액도 많아지게 되었고 내가 경영하는 회사의 기반을 다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루야마 씨는 한국에 올 때마다 다음에는 또 다른 부품을 개발해서 납품하라고 하면서 도면을 가지고 와서 부품을 만들어서 수출해 보라고 했다.
그가 한국에 올 적마다 나에게 회사를 성장하게 할 수 있는 꿈을 가지게 했었다. 나는 일본과의 비즈니스로 회사가 반석 위에 올라가겠구나 생각되어 고마워했었다.
그가 비즈니스 차 한국에 온다고 해도 비즈니스의 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궁전과 인사동 명동 등 시내를 다녀 보기도 하고 한국 특유의 특산품도 사서 가기도 했다.
그는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판문점에 가보고 싶어 했다. 비즈니스가 끝난 후 협력공장의 대표와 함께 판문점 근처의 땅굴에 가게 되었다. 땅굴은 생각보다 한참을 걸어서 지하로 내려가야 했다.
판문점의 땅굴은 나도 처음이었는데 내려갈 때는 큰 부담 없이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왔는데 문제는 올라오는 것이 문제였다.
걸어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마루야마씨는 땅굴에서 올라가는 것이 무척 힘들어 보였다. 더욱이 땅굴에는 산소가 부족한 탓인지 그는 숨을 가파르게 헐떡이고 있었다. 마루야마 씨는 큰 체격에 살이 쪄서 심장이 좋지 않았다.
위급한 상황에서 큰일 났다 싶었는데 다행히 연세 드신 협력업체 대표가 기지를 발휘해서 마루야마 씨의 엉덩이를 뒤에서 밀고 올라갔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시 연장자의 경험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후 마루야마 씨는 결국 심장이 좋지 않아서 심장병으로 이른 나이에 일생을 마감했다.
그때가 아마도 그의 나이 65세가 채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과 멀어지게 되어서 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것도 살아 계시는 그의 어머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며느리의 오랜 보살핌 속에 그의 어머니는 오히려 더 오랫동안 사셨고 100세를 넘겨서 세상을 떠났다.
끝내 지켜주지 못한 아쉬움과 감사
남편 없는 며느리의 보살핌은 힘든 일이었겠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인의 남편 없이 시부모를 섬기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터이고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지만 며느리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면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해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마루야마 씨는 말년에는 심장병으로 수년간 병원에 입원한 채로 일상을 보내야 했는데 그러한 와중에도 내가 필요한 서류가 있어야 해서 연락을 하니 입원한 병원에서 특별외출 허가를 받고 나와서 그의 집에서 서류를 찾아서 내게 보내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 나의 이 세상 마지막 비즈니스였는데 그 후 그는 거의 한 달도 채 못되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아쉽고 애석한 마음에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가끔씩 들려 오는 것 같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심장에 좋다고 하는 영지버섯이라도 많이 보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니 아쉬움이 눈 앞을 가린다.
그가 매번 나에게 한국의 영지버섯이 심장병에 좋다고 보내 달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커다란 컨테이너 한가득 채워서 보냈더라면 여한이 없었겠다고 생각한다.
마루야마 씨는 호방한 성격에 큰 키에 덩치도 있어서 어디서나 호감을 받는 사람이었다. 오사카의 번화가인 난바에 이따금 씩 저녁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요정의 입구에서 언제나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의 회사에서는 고위직의 공장장 직책이었기에 저녁 식사도 제법 비싼 곳에 나를 초대해 식사를 함께했다.
그와 함께 요정으로 들어가면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이랏쌰이마세(어서오세요)” 소리치면서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조금씩 나오는 가이세끼 요리를 먹고 그가 좋아하는 아쯔깡(따뜻한 정종) 한 잔씩 하면서 헤어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는 나에게 일본의 비싼 술집의 문화를 나에게 학습시켜 주고 있는구나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공장에서 필요한 제조 기술도 가르쳐 주었지만, 일본 술집의 밤 문화도 알려 주는 그런 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일본의 오사카의 많은 술집과 밥집을 경험하게 하여 주었는데 일본의 생활상을 알게 되어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일본에 오랫동안 주재 하는 동안에 마루야마 씨를 통해서 일본의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게해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술 한잔씩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 언제나 그는 나에게 택시 티켓을 한 장 주었는데 내가 집에 도착한 후 메터기에 나오는 금액만큼 내가 싸인 해 주면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 주는 분이구나 생각했다.
마루야마 씨는 나에게 언제나 큰형님 같은 분이었고 나에게 비지니스를 할수 있도록 많은 주문을 주었고 나는 일본으로 엄청나게 많은 부품을 수출할 수가 있었다.
그는 내가 일본에 오랫동안 주재할 때 일본 사정을 잘 모르는 나에게 외국 생활에 익숙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그가 작고한지 이미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감사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
세상을 살아보니 돈으로 엮여진 친구들은 비지니스가 종료되면 인간관계도 끝나지만 친구의 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비지니스가 끝나고도 지속적으로 생각도 나고 그가 타계한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 짐을 느낀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은퇴한 그와 여전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비지니스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 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눈앞을 가린다.
예전에는 마루야마 상이 형님처럼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에게 베풀어 줄 수도 있을 만큼 되었는데 그가 없는 세상이 살아가는 즐거움의 한 자락이 없어져 버린 것 같아 못내 가슴이 아프다.
그는 학창 시절 트럼펫 주자로 활약했었는데 차라리 운동을 취미로 했었다면 오래도록 건강할 수 있었겠다는 그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나의 일생도 훨씬 더 윤택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가 타계한 이후 그의 가족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게 되어 그의 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접할수 없게 되었다.
그의 전화번호는 나의 전화기에 여전히 그의 이름과 함께 메모 되어 있다.
다음번 일본 출장 때는 시간을 내어서 오랜 친구이자 대선배의 오하카마이리(산소참배)를 가야겠다고 생각 한다.
아득히 먼 길을 떠나버린 그와의 고마웠던 옛일들을 떠올려 보면서 일본으로의 추억여행을 떠나 보았으면 좋겠다.
#오하카마이리 #마루야마 요시하루 #미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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