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프렌드쇼어링인가, 관세를 앞세운 미국 우선 산업수탈인가- 반도체에서 완제품·에너지까지…한국 기업에 미국 투자를 압박하는 트럼프식 통상정책을 비판한다[신문고뉴스] 조찬옥 칼럼 = 미국의 통상정책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과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단순한 우호국 간 공급망 협력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핵심은 관세를 지렛대로 미국 내 생산과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반도체를 국가안보와 직결된 핵심 산업으로 규정하면서 자국 내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6년 1월 백악관의 반도체 관련 조치는 일정 범주의 첨단 반도체에 25% 관세를 부과하면서도 미국의 기술 공급망과 국내 제조능력을 강화하는 투자에는 예외 또는 우대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미국 상무장관 하워드 러트닉은 외국 기업이 미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이전하거나 투자할 경우 관세를 면제하거나 낮추는 방안을 언급했다. 반도체 자체뿐 아니라 노트북과 게임 콘솔, 데이터센터 서버 등 반도체를 사용하는 완제품으로 관세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결국 미국 내 생산에 투자하지 않으면 관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글로벌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관세를 무기로 미국에서 생산하면 혜택을 주고 미국 밖에서 생산하면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은 협력이라기보다 압박에 가깝다.
더욱이 한국 기업들은 이미 미국에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반도체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미국 내 반도체 생산기지 투자 규모는 2030년까지 약 37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인디애나주에 4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 관련 첨단 패키징 및 연구개발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2029년부터 차세대 HBM4E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며 미국 정부도 CHIPS Act를 통해 관련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한국 기업에 요구해야 할 것은 추가적인 일방적 양보가 아니라 기존 투자의 경제적 가치와 한국이 미국 공급망에 기여한 부분을 인정하는 상호주의여야 한다. 이미 막대한 투자를 결정한 동맹국 기업에 다시 관세를 앞세워 추가 투자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 경제동맹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반도체 제조시설뿐 아니라 반도체를 사용하는 전자제품과 데이터센터 등 연관 산업까지 미국 내 생산과 투자를 확대하려 하고 있다. 결국 반도체에서 장비와 패키징, 데이터센터, 노트북과 서버에 이르기까지 산업 생태계 전체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으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수도권 일부 기업에만 국한된 산업이 아니라 소재와 장비, 후공정, 전력, 물류, 인력 등 수많은 산업 및 지역경제와 촘촘하게 연결된 국가 핵심 산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에서 추진돼 온 대규모 반도체 투자와 지역 산업 생태계 구축이 미국의 관세 압박 때문에 미국으로 이동한다면 이는 단순한 기업의 해외투자 문제가 아니다. 국내 생산과 투자 감소에 따른 산업공동화는 물론 지역경제와 일자리의 공동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미 투자 요구는 반도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 등이 알래스카 LNG 사업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혀 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실무적으로 구체적인 공동투자가 논의된 것은 아니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여왔다. 이 사업은 약 1,300km에 달하는 가스관 건설 등을 포함해 초기 사업비만 약 450억 달러로 추산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과거부터 경제성과 막대한 투자비 문제 때문에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정부 역시 미국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 알래스카 LNG 사업 참여 가능성을 검토해 왔지만, 사업의 경제적 부담과 위험성을 면밀하게 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돼 왔다.
물론 미국의 에너지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사업성이 충분하고 한국에 안정적인 LNG 공급이라는 실익이 있다면 투자할 수 있다. 문제는 경제성과 사업성이 아니라 관세와 통상압박을 배경으로 투자 결정을 사실상 유도하는 구조다.
관세를 높이겠다는 압박과 미국에 투자하면 관세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조건이 결합된다면 기업의 정상적인 시장경제적 판단에 따른 투자라고만 보기 어려워진다. 한국은 이미 미국과 대규모 투자 패키지를 합의했고, 2026년에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계획을 뒷받침하는 국내 절차도 진행됐다.
그 가운데 2,000억 달러는 미국 전략산업에 대한 투자와 관련되고, 1,500억 달러는 조선 협력에 배정되는 구조다. 이제 한국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얼마나 더 투자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 투자가 한국 경제에도 어떤 이익을 가져오는가’여야 한다.
한미동맹은 중요하다. 미국과의 경제협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동맹이 곧 경제적 일방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맹국이라면 오히려 서로의 산업기반을 약화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세우더라도 한국에는 핵심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전문인력과 장비산업을 포함한 산업 생태계가 남아 있어야 한다. 친구라면 한쪽의 산업을 빼내 다른 한쪽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산업 경쟁력을 함께 키우는 관계여야 한다.
미국이 국가안보를 위해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맹국에 고율 관세를 압박하고 미국 내 투자를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관세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 일반화된다면 이는 프렌드쇼어링이라는 본래 취지를 넘어선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더라도 국내 핵심 생산기지와 연구개발 기능을 유지하면서 미국 투자에 상응하는 관세 혜택과 시장 접근권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의 투자가 미국의 산업과 일자리에 기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이익이 한국에도 돌아오는 상호주의가 작동해야 한다.
알래스카 LNG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성이 충분하게 검증되지 않은 사업에 통상협상의 대가라는 이유만으로 국민과 기업의 자본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 사업의 수익성과 장기 구매가격, 운송비와 건설비, 환경규제, 프로젝트 금융조건 등을 철저히 따져 경제성이 있을 때 투자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반미도 친미도 아니다. 국익을 기준으로 한 실용적인 통상외교다. 미국의 산업정책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 설계되고 있다면 한국 역시 한국의 산업과 일자리, 기술과 미래를 지키기 위한 산업정책을 세워야 한다.
진정한 프렌드쇼어링이라면 동맹국들이 서로의 산업기반을 지키면서 공급망을 함께 구축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생산시설과 자본을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이라면 그것을 과연 동맹을 기반으로 한 공급망 협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되물어야 한다.
여기서 지금 미국에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미국의 동맹국인가, 아니면 미국 산업정책의 투자재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앞으로 한미 경제관계와 통상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 조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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