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보고 배워서 다시는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평화의 선물을 남겨주고 싶어요.”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겨서는 안됩니다.” (김복동 할머니 말씀 중에서)
김복동 인권평화운동가가 이 땅의 청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선물 ‘평화’를 담은 김복동평화센터 ‘김복동의 나비길’이 오는 11월 4일, 한신대 교정에 활짝 문을 연다.
<김복동의 희망>은 올해(2024년) 김복동 인권평화운동가의 5주기를 맞이하면서, 학생의 날인 11월 3일 다음날인 11월 4일에 김복동평화센터를 한신대 교정에 세우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추진위원을 모집하고 있다. 후원하는 모든 분은 추진위원으로, 기부자의 벽에 새긴다.
김복동 인권평화운동가는 1992년 3월에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한 후, 2019년 1월 28일,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 중단, 재일조선학교 차별철폐 등을 위해 활동했다.
그로 인해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은 김복동은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불렀다. 콩고와 우간다, 코소보 등 세계 무력분쟁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게 김복동은 ‘우리의 엄마, 우리의 영웅’이었다. 국제기자단체인 ‘국경없는 기자회’와 ‘AFP통신’은 2016년에 김복동을 세계 100인의 영웅으로 선정하여 책에 수록하고, 출간하였다.
김복동은 누구인가?
1992년 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해방 후 반세기동안의 침묵을 깨고, 일본정부를 향해 외쳤다. “이 김복동이가 피해자입니다. 내가 똑똑히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로부터 어느 덧 32년이 지났다.
만 14세에 경상남도 양산 집에서 연행되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된 김복동은 중국 광동으로, 홍콩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로 끌려 다니며 일본군 성노예로써 참혹한 고통을 겪었다.
소중한 10대를 그렇게 일본군에게 빼앗겨버리고 22세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를 기다린 것은 한국사회의 혹독한 멸시와 천대였다. 그 멸시가 두려워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김복동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냈다.
김복동은 67세가 되던 1992년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피해자임을 신고하고, 2019년 1월 28일 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가해국 일본정부에게 역사적 사실 인정과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에 올바르게 기록·교육, 추모비와 박물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인권운동가로 적극 활동했다.
미래 세대들에게 전쟁없는 세상,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노르웨이,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세계를 돌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았다.
콩고와 우간다, 코소보 등 세계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나비기금을 지원하며 “끝까지 싸우면 이긴다”고 용기를 주고, 두려움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생존자들에게 “두려워하고 불안해해야 할 자들은 가해자” 라며 피해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었다.
일본의 차별과 배제, 탄압 속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있는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차별당한다고 기죽지 마라, 재일동포들에게도 조국이 있다” 하시며, 전 재산을 비영리민간단체 김복동의희망에 기부하심으로써 장학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하셨다.
마지막 생애, 암투병으로 병상에 누워계시면서도 2015 ‘위안부’한일합의로 세워진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외교부장관과 대통령에게 목소리를 냈고, 마침내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2019년 1월 28일, 한 많은 세상에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드높여 놓으시고 눈을 감았다.
죽음마저 평화로 꽃을 피워 낸 김복동, 김복동은 세계 사람들이 우리 문제를 알아야 한다며 1년에도 여러 차례 직접 세계로 발길을 향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일본정부를 향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라며 외쳤고, 생이 다하는 그 순간에 곁에 있는 활동가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 달라, 희망을 잡고 살자” 며 죽음으로 희망이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한신대학교의 동행과 약속
한신대학교의 적극적인 동행이 있었기에 김복동평화센터 ‘김복동의 나비길’건립의 꿈이 현실화될 수 있었다.
2024년 봄, 김복동 할머니 살아 생전에 수요시위에도 함께 참여하고,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모금에도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연대를 해 오신 박상필 목사(김복동평화센터추진위원회 상임위원장)가 한신대에 김복동평화센터 필요성과 학교의 공간 협력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학교측이 협의하여 만우관의 공간을 사용하도록 승인해 준 것이다.
한신대학교는 1940년 한국 최초의 신학대학으로 개교하고 1980년 종합대학이 된 이래, 학문과 양심의 자유, 인권과 민주화, 민족 자주 독립과 반군부독재 투쟁, 한반도 평화통일, 민중과 함께 하는 신학 등 한국사회의 변혁을 주도했다.
특히, 이우정 등 한신 여성들은 해방 후 미군 기지촌의 성착취 피해자, 일본인의 기생관광이라는 미명하게 자행되던 성착취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등 한국의 역사 속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인권옹호 활동에 헌신하였고, 민주화와 민족 통일을 위해 앞장섰다.
그리하여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정대협이 결성되고, 전면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시작되는 일에 함께 하였다. 이후 김학순, 김복동 등 피해자들의 신고가 잇따랐고, 피해자들 스스로 인권 평화활동가가 되었다.
지난 역사에서 한신 여성들의 삶이 피해자의 삶을 존귀한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데 함께 했듯이, 김복동평화센타를 통해 아팠던 피해자들의 역사, 숭고한 인권평화운동의 피해자들의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되어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전쟁 때 태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었다”하시며 학교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시고, 대학생.청년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던 김복동 할머니가 공부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이제 김복동평화센타를 통해 대학생들 곁에서 인권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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